
고레에다 히로카즈(是枝裕和)의 <아무도 모른다(誰も知らない)>라는 제목은 아마도 21세기 일본 영화사에서 가장 아이러니컬한 명명법 중 하나일 것으로 보인다. "아무도 모른다"고 선언하는 순간, 모든 이가 알게 되는 역설적 구조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1988년 스가모 아동 방치 사건(巣鴨子供置き去り事件)이라는 실화를 15년간 구상 끝에 픽션으로 재구성한 이 작품은, 사회적 무관심이라는 집단적 죄의식을 한 아파트라는 미시적 공간 안에서 응축시킨 현대적 비극으로 읽힐 수 있을 것이다.
야기라 유야(柳楽優弥)가 칸 영화제 역사상 최연소이자 일본인 최초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이 영화는, 아동이라는 사회적 약자의 시선을 통해 어른들의 세계를 관찰하는 독특한 구조를 갖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고레에다 감독 자신이 "영화에서 묘사한 전날과 다음 날도, 그 인간들이 그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싶다"고 언급했듯이, 이는 단순한 사건의 재현을 넘어서 삶 자체의 질감을 포착하려는 시도로 해석될 수 있다.
영화는 어머니 게이코(YOU)와 장남 아키라(明)가 새 아파트로 이사오는 장면으로 시작되지만, 이 평범해 보이는 이사에는 그림형제 동화를 연상시키는 기괴한 비밀이 숨어있다. 세 명의 동생들이 캐리어 속에 숨어서 운반되는 장면은 신데렐라의 호박마차를 뒤집은 현대적 우화로 읽힐 수 있을 것이다. 마법이 아이들을 공주로 변신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현실이 아이들을 "존재하지 않는 자"로 만드는 잔혹한 변형인 것이다.
특히 유키(ゆき)가 빨간 캐리어에서 나오는 장면은 색채 상징학적으로 의미심장하다고 볼 수 있다. 빨간색은 아시아 문화에서 행운을 상징하지만, 동시에 위험과 혈액을 암시하기도 한다. 리처드 홋슨(Richard Hodson)이 지적하듯이, 이 캐리어는 유키에게 "자궁과 같은 상징"이 되며, 어머니가 제공하지 못하는 안정감과 위로를 대신 제공하는 대체물로 기능한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아이들이 "밖에 나가지 마라", "큰 소리 내지 마라"는 규칙을 준수해야 하는 상황은 미셸 푸코의 규율사회 이론을 연상시킨다고 할 수 있다. 소음 통제라는 표면적 이유 뒤에는 사회적 가시성의 박탈이라는 더 근본적 폭력이 숨어있다. 아이들은 물리적으로 존재하지만 사회적으로는 부재하는 존재론적 모순 상태에 놓여있는 것이다.
고레에다의 카메라는 이런 공간적 제약을 시각적으로 구현한다. 낮은 앵글에서 아이들을 촬영하는 빈도가 높아질수록, **그들의 세계가 점점 축소되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오즈 야스지로의 다다미 시점과 유사한 이 기법은, 아이들의 물리적 왜소함이 사회적 무력함과 직결되어 있음을 시각적으로 강조한다.
게이코가 두 번째로 집을 비운 후 돌아왔을 때, **교코(京子)가 어머니의 매니큐어를 만지작거리다가 쏟는 장면은 이 영화의 상징적 전환점 중 하나로 보인다. 흘린 빨간 매니큐어는 "상처에서 나는 피처럼" 보이며, 교코가 손가락에 발라보는 행위는 **어머니 역할을 모방하려는 시도로 해석될 수 있다.
이 장면의 탁월함은 매니큐어라는 소품이 여성성의 표상이면서 동시에 모성의 부재를 상징한다는 이중성에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교코는 어머니의 화장품을 통해 여성이 되려고 시도하지만, 정작 필요한 것은 여성성이 아니라 모성이라는 아이러니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크리스마스 장면에서 바닥에 묻은 매니큐어 자국을 만지는 교코의 모습은, 과거와 현재 사이의 시간적 간격을 물질적 흔적으로 가시화한다.
하네다 공항으로 향하는 모노레일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모티프는 이동의 자유와 공간적 감금 사이의 대조를 강조하는 장치로 해석될 수 있다. 아키라가 유키에게 "언젠가 저걸 타고 비행기를 보러 가자"고 말하는 장면은, 아이들에게 모노레일이 현재의 제약된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의 상징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하지만 영화 후반부에서 유키가 하네다 공항 근처 들판에 매장되는 장면을 고려할 때, 이 모노레일은 희망의 상징이 아니라 운명의 아이러니를 예고하는 장치였던 것으로 재해석될 수 있다. 유키는 결국 모노레일이 도착하는 그 장소에 가게 되지만, *살아있는 승객이 아니라 *죽은 화물로서 도착하게 되는 것이다.
유키가 즐겨먹는 아폴로 초콜릿은 그리스 신화의 태양신 아폴로를 연상시키는 명명법을 갖고 있지만, 영화 맥락에서는 오히려 어둠 속으로 침몰하는 삶의 *마지막 단맛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초콜릿은 "어린이다움과 순수함"을 대변하는 동시에, "외부 세계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으로서 아이들이 접근할 수 없는 정상적 어린 시절을 상징한다.
유키의 생일날 아폴로 초콜릿을 먹는 장면과 죽음 후 관 속에 넣어지는 장면의 대조는 삶과 죽음을 연결하는 고리로서 이 과자가 기능함을 시사한다. 달콤함이라는 감각이 유키에게는 삶의 *마지막 기쁨이었지만, 관객에게는 *가장 쓰라린 기억으로 전환되는 **감정적 연금술인 것이다.
아파트 복도가 영화 전체에 걸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방식은 오즈 야스지로의 로카(廊下) 미학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고레에다 감독은 오즈를 대놓고 싫어하지만. 하지만 오즈의 로카가 가족 구성원들이 자연스럽게 오가는 사적 공간이었다면, 고레에다의 복도는 **"반공개적 공간"으로서 아이들에게는 위험과 노출의 가능성을 내포한 공간이다.
특히 아키라가 택배 기사를 피해 숨는 장면이나, 아이들이 이웃들의 대화를 몰래 엿듣는 장면 등은 복도가 사회와 개인 사이의 *경계 지대로서 기능함을 보여준다. *"다른 문들이 있지만 아무도 들어가거나 나오지 않는다"는 점은 이 공간이 **도시적 고립을 상징하는 메타포임을 시사한다.

가출 소녀 **사키(韓英恵)의 등장은 *외부 세계로부터의 첫 번째 *진정한 접촉을 의미하지만, 그녀 역시 사회에서 소외된 존재라는 점에서 아이들과 동일한 처지에 놓여있다. *학교 폭력을 피해 가출한 그녀가 원조교제를 통해 돈을 벌려고 시도하는 설정은, *사회적 보호망에서 배제된 미성년자들이 서로를 위로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드러낸다.
사키와 아키라의 관계는 전통적인 구원자-피구원자 관계를 넘어선 상호부조의 성격을 띤다고 볼 수 있다. 그녀는 아키라에게 외부 세계와의 연결고리를 제공하지만, 동시에 아키라는 그녀에게 판단 없는 수용과 따뜻함을 제공한다. 이런 수평적 관계는 고레에다가 추구하는 "혈연을 넘어선 정서적 유대"라는 주제의 구현으로 해석될 수 있다.
유키가 의자에서 떨어져 의식을 잃는 사고는 물리적 중력이 사회적 중력과 만나는 순간으로 읽힐 수 있다. 그녀가 *높은 곳에 올라가려는 시도는 제한된 공간 안에서도 자유를 추구하려는 *인간적 욕망의 발현이지만, 동시에 **그 욕망이 현실과 충돌할 때의 위험성을 예고하기도 한다.
유키가 쓰러진 다다미 위의 **빨간 방울이 매니큐어인지 피인지 구분할 수 없다는 디테일은, 영화 전체에 걸쳐 나타나는 빨간색 모티프들의 최종적 수렴점을 의미한다. 생명과 죽음, 희망과 절망을 구분하던 상징들이 하나로 합쳐지는 순간인 것이다.
고레에다가 다큐멘터리 출신이라는 배경은 이 영화의 연출 방식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아이들이 "전혀 연기하는 것 같지 않고 종종 실제로 연기를 하지 **않는다"는 평가는, 감독이 추구하는 자연주의적 연출의 성과를 보여준다. 이는 *로베르 브레송의 "모델" 이론이나 *켄 로치의 사회적 리얼리즘과 유사한 접근법으로 해석될 수 있다.
특히 야기라 유야의 "섬세하고 움직이며 아름다운 얼굴의 표현의 **미묘함"이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가져다준 것은, 전통적 연기론을 넘어선 새로운 표현 방식의 가능성을 시사한다."연기"가 아닌 "존재" 자체로 승부하는 연출 철학이 국제적 인정을 받은 사례인 것이다.
일부 연구는 고레에다의 작품에서 불교적 세계관의 영향을 발견한다. **<아무도 **모른다>에서도 "무아(無我)"와 "상호의존성"이라는 불교적 개념이 작동한다고 볼 수 있다. 아이들이 사회적 정체성을 박탈당한 상태는 불교에서 말하는 "자아의 해체"와 유사한 면이 있으며, 그들이 서로에게 의존하며 생존하는 방식은 "연기(緣起)" 사상을 구현한다.
특히 영화의 결말에서 아키라가 유키를 매장한 후 손을 떨며 흙을 털어내는 장면은 생명과 죽음의 경계에서 인간이 경험하는 근본적 고독과 동시에 **그 고독을 넘어선 자비의 실천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종교적 의식 없이 이루어지는 이 매장은 세속적 자비의 순수한 형태를 구현한다.

2025년 현재 일본의 아동 빈곤율이 여전히 OECD 평균을 웃도는 상황에서, <아무도 모른다>는 20년 전의 경고가 현재에도 유효함을 보여준다. 한부모 가정의 증가, 비정규직 확산, 사회적 고립의 심화 등 영화가 다룬 구조적 문제들이 오히려 악화된 면이 있다는 분석도 가능하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더욱 가시화된 "숨겨진 빈곤" 문제는 **이 영화의 예언적 성격을 부각시킨다. 외형상 정상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위기 상황에 놓인 가정들이 증가하면서, "아무도 모르는" 고통이 확산되고 있는 현실이다.
<아무도 모른다>에 대한 예상되는 비판 중 하나는 실제 아동 배우들을 극한 상황에 노출시켜 "현실적" 연기를 끌어냈다는 윤리적 문제 제기일 것이다. 특히 1년에 걸친 장기 촬영 과정에서 아이들이 겪었을 심리적 부담에 대한 우려가 제기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비판은 고레에다의 연출 철학을 오해한 것으로 보인다. 감독은 아이들에게 "자연스럽게" 반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을 뿐, 그들을 실제 고통 상황에 방치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전통적 아동 연기 지도가 강요하는 "어른스러운 연기"로부터 아이들을 해방시킨 혁신적 시도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또 다른 비판은 영화가 문제를 "고발"하는 데 그칠 뿐 구체적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지적이다. 사회 시스템의 구조적 문제를 지적하면서도 그에 대한 대안이나 희망의 메시지가 약하다는 비판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는 예술의 역할에 대한 협소한 이해에서 비롯된 비판으로 보인다. 고레에다가 추구하는 것은 직접적 사회 개혁이 아니라 관객의 "상상력 확장"이다. "극장을 나온 사람이 영화 이야기의 내부가 아닌, 그들의 내일을 상상하고 싶어지도록 하는" 연출이야말로 진정한 사회적 영향력을 갖는다는 철학인 것이다.
<아무도 모른다>는 "모른다"고 선언함으로써 "알게 만드는" 역설적 구조를 통해, 사회적 무관심이라는 집단적 죄의식을 개인적 각성으로 전환시키는 영화적 연금술을 구현한 작품으로 평가될 수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시선은 고발하지 않으면서도 나타내고, 감상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감동을 주며, 희망을 약속하지 않으면서도 용기를 북돋우는 미묘한 균형감을 유지한다.
1988년의 실화가 2004년에 영화화되고 2025년에도 여전히 유효한 메시지를 던지는 이유는, **이 작품이 특정 시대나 사회의 문제가 아닌 인간 사회의 근본적 속성—타자에 대한 무관심, 약자에 대한 외면, 불편한 진실에 대한 회피—을 다루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야기라 유야가 칸 영화제에서 받은 남우주연상은 단순히 한 배우의 개인적 성취가 아니라, 목소리 없는 자들의 존재를 세계가 인정한 상징적 사건으로 해석될 수 있다. "어른들만 살아 있는 건가요?(生きているのは、大人だけですか)"라는 영화의 캐치프레이즈는 질문의 형태를 빌려 가장 강력한 선언을 한다: 아이들도, 소외된 자들도, 보이지 않는 모든 존재들도 엄연히 "살아있다"는 선언을.
결국 "아무도 모른다"는 제목의 진정한 의미는 무지의 선언이 아니라 앎의 촉구이며, 무관심의 고백이 아니라 관심의 요청이다. 고레에다의 카메라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을 보이게 만들고, 들리지 않았던 목소리를 들리게 만들며, 존재하지 않았던 자들을 존재하게 만드는 마법을 부린다. 그리고 그 마법은 영화가 끝난 후에도 관객의 일상 속에서 계속 작동한다. 이것이 아마도 진정한 영화의 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