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들〉(2016)은 흔히 “초등학교 왕따 영화”로 요약되곤 하지만, 그 요약은 이 작품을 거의 오해에 가깝게 축소하는 편에 가까워 보인다. 윤가은 감독이 여러 인터뷰에서 반복해서 말하는 건 “상처가 사람을 성장시키는 건지 의심한다”, “상처는 상처로 남고, 그걸 안고 어떻게 살아갈지가 중요하다”는 태도다. 이 말은 곧, 영화가 흔히 택하는 ‘트라우마는 결국 나를 더 강하게 만들었어’라는 값싼 성장 서사의 거부 선언에 가깝다.[3][4][5][2][1]
이 영화는 ‘어른이 된 우리’가 과거를 회상하는 구조도 아니고, ‘선(최수인)의 성장’이라는 전통적인 아크를 따르지도 않는다. 대신 사라지지 않는 여름의 열기처럼, 어느 시절의 공기와 촉각, 불편하게 식지 않는 감정의 반사열을 그대로 현재형으로 유지하는 쪽을 택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어릴 적 이야기를 담은 영화”가 아니라, 지금도 관객의 몸을 통해 계속 재생되고 있는 집단 소속의 잔혹극처럼 작동한다.[2][1]
한국 제목 “우리들”은 뻔해 보일 정도로 평이한 단어지만, 이 평이함이야말로 영화의 핵이다. “우리”는 한국어에서 거의 종교적 위상을 가진 대명사다. “나”와 “너”를 깎아내고, “우리 학교, 우리 반, 우리 편”이라는 집단적 1인칭이 윤리의 기준처럼 작동하는 언어 환경 안에서, “우리들”이라는 복수형은 이미 폭력의 씨앗을 품고 있는 말처럼 보인다.[1]
영어권에서는 이 영화가 The World of Us라는 제목으로 소개되는데, 이 번역은 “우리”가 단지 ‘여러 명’이 아니라, 각자의 폐쇄적인 작은 우주들이 겹쳐진 ‘세계’에 가깝다는 감각을 강조한다. “The World of Us”는 곧 ‘나만의 지옥이면서, 동시에 모두의 지옥인 세계’에 대한 호명처럼도 보이는데, 여기서 world는 공간이라기보다 관계의 총합, 계급과 가정환경과 말버릇까지 포함된 사회적 장(場)에 가깝다. 이 이중제목은 이미 영화의 구조를 미리 암시한다. 좁게는 교실, 넓게는 세계. ‘우리’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볼 것인가가 이 영화의 핵심 질문 쪽으로 다가간다.[6][7]
표면 줄거리를 아주 단순하게 정리하면 이렇다는 식으로 말할 수 있을 것 같다.[2][1]
그러나 이 줄거리 안에는 중요한 누락이 있다. 이 영화의 진짜 ‘시간’은 여름방학과 2학기를 구분하는 달력상의 시간보다, 관계의 온도 변화로 측정되는 시간이다. 여름방학 동안의 놀이터, 골목, 집 내부의 동선은 마치 RPG 게임의 ‘튜토리얼 맵’처럼 보이고, 2학기 이후의 교실과 운동장, 학원 복도는 본편이 시작된 게임의 PvP 존처럼 보인다. 윤가은은 달력 대신 공간의 배치를 통해 시간의 균열을 설계한다.[2]
이 영화가 속된 의미에서 “상징, 은유 같은 거 안 쓰는 리얼리즘 영화”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인물 이름부터 이미 꽤 노골적인 층위를 깔아두는 것 같다.
이 세 이름은 색채와 선, 시선이라는 영화의 기본 단위를 미리 언어 차원에서 선언해 둔 셈이다. 교실에서의 자리 배치(선은 항상 어느 모서리, 보라와 지아는 중심 근처), 의상 색감(선의 다소 바랜 톤, 지아의 상대적으로 밝은 색, 보라의 선명한 색감)도 이 이름의 층위와 맞물리는 편에 가깝다.[7][2]
이야기 구조를 아주 거칠게 나누면 다음과 같은 세 부분 구조로 정리해볼 수 있을 것 같다.[1][2]
윤가은은 인터뷰에서 “아이들의 싸움이지만, 거기엔 이미 어른들의 세계에서 온 힘의 구조가 스며 있다”고 이야기하는 편이다. 그래서 이 구조는 단순한 계절 드라마가 아니라, 비가역적인 사회화의 과정처럼 보이기도 한다. 여름의 골목은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처럼 잠깐 떠오르는 섬이고, 2학기의 교실은 현실 정치의 국회에 가깝다. 선과 지아는 잠시 이상국가의 시민이 되었다가, 곧 냉전의 첩자로 전락한다.[8][3]
〈우리들〉을 얘기할 때 가장 많이 반복되는 키워드 중 하나가 “아이의 시선으로 찍힌 영화”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건 단순히 카메라를 아이의 키 높이에 맞췄다는 촬영 기법 이야기를 넘어선다.[3][7][2]
윤가은은 어느 인터뷰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거나 설명하는 입장이 되지 않으려고 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 윤리는 쇼트 구성의 형태로 구현된다. 카메라가 어느 쪽 편을 들지 않고, 설명을 유보한 채, 아이들의 몸짓과 시선의 미세한 떨림을 따라가면서도, 그게 무엇인지 규정하는 언어를 제공하지 않는다. 관객은 이 빈자리를 자기 기억과 감각으로 채워야 한다.[4][3]
교실은 이 영화의 가장 노골적인 미장센의 실험실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반복되는 패턴이 눈에 띈다.[2]
교실은 형식상으론 민주적 공간(공교육의 장)이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민주주의 절차 없이 권력이 작동하는 일종의 소형 의회처럼 보인다. 다만 이 의회에는 의장도, 헌법도 없고, 오직 침묵과 웃음소리와 ‘우리끼리’의 감각만이 법처럼 통용된다.
여름 방학 동안 반복해서 등장하는 골목, 놀이터, 공터는 교실과 거의 반대되는 미장센이 배치된다.[7][2]
골목은 이 영화에서 거의 “소국(小國)의 지도”처럼 쓰인다. 우리 집과 너희 집의 경계, 놀이터로 가는 길, 편의점에서 돌아오는 길, 이 모든 동선이 “우리의 영토”를 임시로 설정하는 길이 된다. 그러나 이 ‘영토’는 2학기가 시작되면 교실의 영토 정치에 흡수되며 힘을 잃는다.
이 영화에서 가장 잔인한 무기는 주먹이 아니라 말이다. 윤가은은 “아이들이 서로를 어떻게 말로 찌르는지를 오래 관찰해 왔다”고 밝힌 적이 있는데, 실제로 영화 속 대사는 거의 문장이라기보다 권력 행사에 쓰이는 짧은 명령문, 낙인, 애매한 부정으로 이루어져 있다.[3][2]
윤가은은 인터뷰에서 “아이들이 상처를 주면서도, 자기가 한 말의 결과를 다 알지는 못한다고 느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래서 이 영화의 언어는 악의라기보다 미성숙한 힘의 실험에 가깝다. 그러나 그 미성숙함이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평생 지워지지 않는 문신처럼 남는다.[8][3]
〈우리들〉이 크게 떠들지 않는 대신, 아주 미세하게 반복하는 디테일 몇 가지를 짚어볼 수 있을 것 같다. 이건 거의 이스터에그에 가까운 층위로 작동한다.
이 모든 디테일은 관객에게 강요되지 않는다. 그러나 여러 번 볼수록, “아, 이 영화는 말보다 훨씬 집요하게 몸과 사물과 경계를 배열하고 있구나”라는 인식이 생긴다.
영화 초반, 교실에서 선이 어색하게 웃거나, 체육 시간 같은 상황에서 은근히 바깥에 밀려나 있는 장면들은 이미 세계가 완성된 후의 스냅샷에 가깝다. 이 장면에서 중요한 건 새로운 사건이 아니라, 이미 벌어진 일의 잔여물이란 점이다.[2]
이 첫 교실 장면은 이후 여름방학의 “유토피아”를 나중에 되돌아보게 만드는 전조가 된다. 여름 동안 관객은 선이 “원래부터 외톨이였던 아이”가 아니라, 특정한 구조 때문에 그렇게 위치 지워진 존재였음을 점점 깨닫게 된다.[7][2]
선과 지아가 서로의 집을 오가는 장면들은 구조적으로 서로 대칭을 이루는 편에 가깝다.[2]
이 두 집의 대비는 노골적인 빈부 격차를 강조하기보다는, “결핍의 종류가 다른 두 세계”를 보여주는 듯하다. 선의 집은 경제적 결핍이, 지아의 집은 정서적 결핍(부재한 아버지, 늘 바쁜 엄마)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여름 동안 이 두 결핍은 서로를 보완하듯 작동한다. 친구의 집은 나의 부족한 것을 임시로 채워주는 기지 같다. 하지만 2학기가 시작되면, 이 결핍들은 서로를 이해하게 하는 연결 고리 대신, 상대방을 공격할 때 사용할 수 있는 정보 자산이 된다.[2]
영어학원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한국식 계급 서사가 드러나는 파트에 가까워 보인다.[2]
학원 내부의 미장센은 교실보다 더 비인간적이다. 광고 포스터, 단어카드, 강사의 목소리, 형광등 조명이 공간을 차갑게 만든다. 여기서의 대화들은 거의 전적으로 성적, 선행학습, 진도, 학원비 같은 키워드를 중심으로 조직된다. 영어라는 외국어는 이 아이들에게 “더 넓은 세계로 나갈 수 있는 언어”가 아니라, 현재의 위계를 공고히 하는 도구에 가깝다.[7]
지아가 학원에서 보라와 친해지는 과정은, 단지 “새로운 친구가 생긴다”는 사건이 아니라, 시장의 논리에 의해 재구성된 소속 관계로 읽힌다. 선과의 우정은 무료이며, 골목과 시간만 있으면 유지되는 관계지만, 보라와의 관계는 학원비와 시험, 경쟁이라는 고정비 위에 세워져 있다.
운동장 피구 장면은 영화 속에서 여러 번 변주된다. 처음에는 선이 거의 공을 받지 못하고, 나중에는 어느 정도 팀의 일부로 섞이기도 하지만, 핵심은 공이 누군가를 맞히는 순간의 쾌감과 공포가 동시에 배치된다는 점이다.[7][2]
이 장면은 프로이트 식의 의미에서의 ‘투사(投射)’와도 연결된다. 아이들은 자신이 겪는 불안과 열등감을 공에 담아 타인에게 던진다. 공을 맞은 아이는 단지 아픈 것이 아니라, “너는 우리 편이 아니야”라는 집단의 선언을 몸으로 받게 된다. 윤가은은 이 피구 장면을 통해, 폭력이 제도화되고 놀이화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셈이다.
후반부, 선과 지아가 서로의 비밀을 폭로하며 관계가 돌이킬 수 없는 지점까지 가는 장면은 거의 고전비극에 가까운 구조를 갖는다.[2]
흥미로운 것은, 이 장면에서 ‘객관적 진실’은 거의 중요하지 않다는 점이다. 누가 먼저 거짓말을 했는지, 누가 누구의 집사정을 먼저 말했는지는 사건의 핵심이 아니다. 핵심은 누가 집단의 감정을 지금 당장 더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가, 즉 선동의 능력이다.
윤가은은 인터뷰에서 “아이들이 서로 상처 주고 상처받는 이야기를 만들고 나서, 후회가 들 정도로 마음이 답답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다음 작품 〈우리집〉에서는 아이들이 서로 연대하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다고 덧붙인다. 이 고백은 〈우리들〉의 클라이맥스를 다시 보게 만든다. 이 작품은 아직 연대까지 나아가지 못한 지점에서 멈춰 서 있다. 상처는 상처로 남고, 누군가의 사과나 껴안음으로 쉽게 봉합되지 않는다.[5]
엔딩에서 선이 지아에게 다시 말을 건네는 장면은 많은 평론에서 “희망”으로 읽히곤 한다. 그러나 그 희망은 디즈니식 해피엔딩과는 거리가 멀다.[7][2]
그럼에도 이 장면이 감동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상처는 상처로 남는다”는 전제를 포기하지 않은 채,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계를 다시 시도해보려는 윤리가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선은 더 성숙해진 것이 아니라, 단지 한 번 더 실패할 각오를 했을 뿐이다. 그 미약한 각오가 이 영화에서 허락되는 최대치의 희망처럼 보인다.[5][3]
한국과 해외 여러 매체 인터뷰에서 윤가은은 일관되게 “아이들을 순수한 존재로만 그리고 싶지 않았다”는 말을 반복하는 투에 가깝다.[9][8][3][7]
베를린 국제영화제 제너레이션 부문에 초청되었을 때도, 해외 평론가들은 이 영화가 ‘아동 영화’의 범주를 넘어서, “어른 관객에게 자기 어린 시절의 비겁함과 잔인함을 떠올리게 만드는 작품”이라는 평가를 한 바 있다. 이 영화는 아이들을 피해자로만 그리지 않는다. 그들은 동시에 가해자이고, 방관자이고, 때론 구조의 대리인이다.[6][7]
윤가은은 창작 과정에서 아이 배우들에게 완전한 대본을 주지 않고, 상황만 제시한 후 긴 리허설을 통해 대사를 함께 만들어갔다고 밝힌다. 이 방식은 영화의 윤리와도 맞닿아 있다. 어른이 짜놓은 시나리오 안에 아이들을 끼워 넣는 대신, 아이들의 말투와 반응을 수집해가며, 영화의 언어를 그들의 리듬으로 세팅한 셈이다.[4][3]
〈우리들〉의 연기가 지나치게 자연스러워 “다큐멘터리 같다”는 말이 자주 붙지만, 사실 이 자연스러움은 상당히 인공적인 설계의 결과에 가깝다.[3][4][7]
이 지점에서 떠올릴 수 있는 레퍼런스는 이란 영화(특히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아이들 영화들), 혹은 일본의 일부 아이 중심 영화들이다. 그러나 윤가은의 카메라가 그들과 다른 점은, 멜로드라마적 과장을 거의 끝까지 참으면서도, 정서의 농도를 포기하지 않는 선을 택한다는 데 있다.[7]
아이들이 제스처를 크게 취하지 않는 대신, 눈꺼풀 떨림, 숨 멈춤, 손가락 꼼지락 같은 아주 작은 단위들로 감정을 발화한다. 이 섬세함은 연극적 과장의 반대편에 있는, “마이크로 드라마”에 가깝다. 관객은 거의 기계적인 집중력을 요구받는다. 한 장면만 대충 보고 넘어가면, 인물 관계의 미세한 변화를 놓치게 된다.
이 영화는 표면상으로는 아이들의 이야기지만, 관객 타깃은 훨씬 넓다. 많은 해외 리뷰와 한국 평론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건, 〈우리들〉이 “어른 관객에게 자기 어린 시절을 강제 리와인드 시킨다”는 점이다.[6][7][2]
이때 영화관 스크린은 단순한 창(window)이 아니라, 거울(mirror)에 가까워진다. “The World of Us”는 곧 “The World of Me”가 된다. 관객 각자는 선이기도 하고, 지아이기도 하며, 때로는 보라였다. 윤가은의 영화는 관객에게 “너는 어느 쪽이었냐”고 묻지 않는다. 대신 “너는 언제 어느 순간, 누구의 편이었냐고 기억하냐” 정도의 질문을 던지는 편에 가깝다.
이 메타-영화적 장치는 영화 속에서 직접 언급되지는 않지만, 카메라의 비개입적인 태도와, 결말의 비-보상성을 통해 형식적인 차원에서 구현된다. 관객은 감정적 해소를 받지 못한 채, 미완의 관계를 가슴에 품고 극장을 나가야 한다. 그 미완성이 바로, 각자의 기억으로 영화가 이어지는 통로가 된다.[7][2]
아이가 주인공인 영화는 셀 수 없이 많지만, 〈우리들〉은 몇몇 작품들과 특이하게 공명한다.
또한, 소설 쪽으로는 사라 모스, 엘레나 페란테의 어린 시절 서사(특히 나폴리 4부작의 어린 시절 구간)와도 느슨하게 연결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친구 관계가 곧 계급의 언어로 변하는 순간, ‘우리’가 곧 폭력의 또 다른 이름이 되는 그 지점을, 〈우리들〉은 초등학교 4학년의 키 높이에서 포착하고 있다.
2016년 한국에서 이 영화가 나왔을 때, 많은 관객이 “드디어 아이들 이야기를 아이들의 자리에서 다룬 영화”라고 반응했다. 그러나 2020년대 이후, 팬데믹과 온라인 문화, 더 폭력적인 형태의 사이버 따돌림과 ‘왕따 문화’가 진화한 지금, 〈우리들〉은 약간 다른 의미로 보이기도 한다.[2]
또한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아이들끼리 그러다 말지 뭐”라는 식으로 가볍게 치부되는 아동 간 폭력의 인식 문제 역시, 이 영화를 현재형으로 만드는 요인이다. 윤가은은 아동권리 관련 인터뷰에서 “아이들이 주체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다”고 말하며, 〈우리들〉 이후의 〈우리집〉을 그렇게 설계했다고 밝힌다. 이 맥락에서 보면, 〈우리들〉은 일종의 어두운 전편(前篇)처럼 위치해 있다. 아직 연대가 발생하기 전, 상처만이 넘쳐나는 시대의 초상이다.[8][5]
〈우리들〉은 거창한 이데올로기를 말하지 않는다. 대신 한국어의 가장 일상적인 단어, “우리” 위에 조용히 카메라를 올려놓는다.
이 영화의 인물들은 모두 “우리” 안에 들어가고 싶어 한다. 친구들 사이의 우리, 가족으로서의 우리, 학원 동료로서의 우리. 그러나 그 모든 ‘우리’는 누군가를 내쫓는 힘을 통해 유지된다. 선은 늘 경계에 선 채로 그 사실을 몸으로 배운다. 지아와 보라 역시 예외가 아니다. 그들 또한 언젠가, 다른 곳에서 또 다른 ‘우리’에게 배제당할 것이다.
엔딩에서 선의 “같이 놀자”는 말은, 그래서 하나의 소규모 혁명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말은 이전까지의 “우리”가 전제하던 배제의 논리를 아주 미약하게 비틀어 본다. 이 ‘우리’는 기존의 우리와 다를 수도 있고, 결국 별로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 영화는 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관객에게 묻는다.
“그때의 너는, 누구의 편이었니. 그리고 지금은, 누구를 또 빼놓고 있니.”
그 질문이 아직도 마음 한구석을 찌른다면, 이 영화는 여전히 현재형으로 작동하는 중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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