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억은 의문을 남기는 것이어야지, 무엇이 '진실'인지 판정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 홍상수, 2010년 칸 인터뷰
2010년. 칸 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대상(최고상). 뤽 고다르, 지아 장커 등 거장들의 작품을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제치고. 홍상수가 처음으로 칸에서 수상하는 순간이다.
⟪하하하⟫는 홍상수 필모그래피의 결정적 전환점이다. 이 영화부터 홍상수의 유머는 한층 경쾌해지고, 구조 실험은 더 정교해지며, 인물들의 자기기만은 거의 희극적 차원에 이른다. 그리고 처음으로 홍상수 영화가 진정으로 '하하하' 웃기다.
1.1. 이중 시간대 형식
영화는 두 개의 시간대로 구성된다.
현재(흑백): 영화감독 문경(김상경)과 영화평론가 중식(유준상)이 술을 마시며 서로 최근에 있었던 '좋은 일'들을 이야기한다.
과거(컬러): 두 사람이 각자 통영에서 겪은 경험들이 컬러 영상으로 펼쳐진다.
이 흑백(현재)/컬러(과거) 방식은 홍상수가 처음으로 시도하는 형식적 이분법이다. 관객은 칸 수상 이후 더 날카로워진 홍상수의 영화 문법을 여기서 만난다.
1.2. '이름을 말하지 않는다'는 규칙
두 남자는 대화에서 자신들이 통영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기로 암묵적으로 합의한다. 이 규칙이 핵심이다: 인물을 이름으로 규정하지 않고 묘사로만 접근함으로써, 기억이 얼마나 주관적이고 얼마나 자의적인지가 드러난다. 홍상수에 따르면 이것은 "대상을 단번에 규정하는 것을 피하고, 순수한 묘사만으로 실체에 다가가려는 시도"다.
2.1. 관객만이 아는 진실
문경과 중식은 각각의 기억을 이야기한다. 두 사람이 만났던 인물들은 대부분 동일인이다 — 하지만 두 남자는 그 사실을 모른다. 관객만이 두 이야기를 동시에 보면서 그 겹침을 인식한다.
이 구조적 아이러니가 영화의 핵심 장치다. 두 사람이 좋은 기억만 이야기하고 있는 사이, 관객은 그 기억들 사이의 간극, 왜곡, 그리고 자기기만을 본다. 하하하 — 웃음은 그 간극에서 나온다.
2.2. '좋았던 일'만 이야기한다는 것의 의미
두 남자는 서로에게 '좋았던 일'만 공유하기로 했다. 실제로 통영에서 각자가 겪은 것들 중에는 불편하고, 부끄럽고, 실패한 것들도 있다. 하지만 그 기억들은 나오지 않는다. 선택적 회상. 홍상수는 이것이 인간관계에서 우리 모두가 하는 일임을 조용히 폭로한다.
3.1. 청계산 막걸리 씬 — 홍상수 술자리의 새로운 차원
청계산에서 막걸리를 나눠 마시는 문경과 중식의 흑백 씬은 홍상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아름다운 술자리 장면 중 하나다. 소주가 아닌 막걸리, 서울 도심이 아닌 산 아래 — 이 변화가 두 남자의 대화에 다른 분위기를 부여한다. 좀 더 철학적이고, 좀 더 너그럽고, 좀 더 낭만적이다.
3.2. 통영의 컬러 — 기억의 질감
컬러로 찍힌 통영의 기억들은 흑백 현재보다 더 선명하고 더 생생하게 보인다. 이 역설이 의미심장하다: 기억은 종종 현재보다 더 생생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 생생함이 기억의 정확성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3.3. 줌인 — 코미디 포인트에서도 사용
이 영화에서 홍상수의 줌은 처음으로 코미디 포인트에서 사용된다. 인물이 자기도 모르게 민망한 말을 할 때 카메라가 조인다. 긴장 연출이 아니라 웃음 연출. 홍상수의 줌이 이제 다양한 정서를 다룰 수 있는 도구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4.1. '좋은 기억만 공유하기'는 우정인가, 공모인가
문경과 중식은 서로에게 좋은 면만 보여준다. 이것은 일종의 우정의 윤리처럼 보인다. 하지만 홍상수는 이것이 동시에 자기기만의 공모임을 보여준다. 두 사람이 서로의 기억을 검증하지 않기 때문에, 각각의 왜곡이 그대로 보존된다.
4.2. 칸 수상작으로서의 가치 — '예술적 성숙'의 증거
⟪하하하⟫가 칸 심사위원 만장일치 수상작이 된 이유는 무엇인가. 홍상수가 이 영화에서 처음으로 유머, 형식 실험, 심리적 깊이를 완벽하게 균형 잡았기 때문이다. 이 전에 홍상수의 영화들은 날카롭지만 무거웠다. ⟪하하하⟫부터 홍상수는 가볍게 웃으면서도 깊게 찌를 수 있게 되었다.
홍상수 중기 코미디의 두 정점.
| 비교 항목 | 하하하 (2010) |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2015) |
|---|---|---|
| 구조 | 흑백 현재 + 컬러 기억 (두 남성의 교차 회상) | 동일 이야기 이중 반복 (1부 Wrong, 2부 Right) |
| 웃음의 기제 | 두 남성 기억의 불일치 — 관객만이 안다 | 동일 인물의 솔직함/거짓말의 결과 차이 |
| 기억의 처리 | 기억은 주관적이고 왜곡된다 | 기억의 변조 없음 — 현재의 선택이 결과를 바꾼다 |
| 비교 수상 | 칸 주목할만한시선 대상 (2010) | 베를린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 (2015) |
⟪하하하⟫의 코미디는 '기억의 구조적 불완전성'에서 온다.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의 코미디는 '선택의 도덕적 차이'에서 온다. 두 영화는 서로 보완하며 홍상수 코미디의 가장 높은 봉우리를 이룬다.
영화가 끝나면 관객은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느낀다: 웃음과, 그 웃음 뒤에 오는 약간의 씁쓸함.
우리는 문경과 중식처럼 서로에게 좋은 기억만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진실은 조금씩 왜곡된다. 그 왜곡이 쌓여 우정이 되고, 그 우정이 삶을 지탱한다. 하하하.
홍상수는 이 자기기만의 사회적 기능을 처음으로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거짓 속에 진심이 있다. 왜곡 속에 유대가 있다. 그것이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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