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명의 오디션 끝에 감독이 찾은 건 진짜 괴인이 아니라 "그냥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웃기게도, 이게 가장 무서운 발견이다. <괴인>은 제목부터 낚시질의 완성형인데, 정작 영화 안엔 특별히 괴이한 인물 따윈 없다. 대신 우리가 매일 마주치는, 이해할 수 없는 평범한 괴물들이 135분간 서로를 견디고 견디다 못해 견뎌내는 이상한 동거 실험을 벌인다.
영화의 시발점, 목수 기홍(박기홍)은 갑자기 고함부터 지르기 시작한다. 왜? 아무도 모른다. 본인도 모를 것이다. 이게 바로 이 영화가 던지는 첫 번째 미들핑거다.
영화의 공간 설계는 그 자체로 인간관계학 박사논문이다. 두 개의 현관문을 가진 2층 공유주택은 분리되어 있지만 연결된 구조로, 현대인의 관계 딜레마를 건축물로 번역해낸 메타포다. 거리를 두고 싶지만 완전히 분리될 수는 없는 그 절묘한 애매함 말이다.
색감은 철저히 회색지대의 미학을 추구한다. 화려하지도 음침하지도 않은, 판단 유보의 팔레트다. 이는 "이 상황이 정상인가 비정상인가?"를 끊임없이 묻게 만드는 시각적 가스라이팅이기도 하다.
이들의 관계는 언어적으로도 정의불가능의 영역에 있다. 친한 건지 아닌 건지, 위아래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당사자들도 모른다.
기홍의 갑작스러운 고함은 언어폭력이면서 동시에 소통에 대한 절망적 시도다. 그는 소리를 질러야만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음성학적 자해에 이르는 것이다.
"타인은 지옥이다" 라는 사르트르의 악명 높은 테제가 2층 공유주택에서 일상화된다. 하지만 이 지옥은 불가피하면서도 매혹적이다. 인물들은 서로를 견딜 수 없어 하면서도 떠날 수 없는 관계의 삼각지에 갇혀있다.
바흐친의 카니발도 읽힌다. 기존 사회적 질서가 전복되고, 상하관계가 뒤바뀌며, 일시적으로 모든 것이 허용되는 축제적 공간이 바로 이 집이다. 집주인과 세입자의 경계가 흐려지고, 불륜이 농담처럼 오가는 이상한 리미널 스페이스말이다.
에드워드 호퍼의 <야경꾼들>이 연상되는 순간들이 곳곳에 있다. 특히 피아노 학원에서 잠드는 하나의 모습은 호퍼가 그린 도시의 고독한 인물들과 완벽하게 겹친다. 창밖을 바라보는 시선, 인공조명 아래의 고립감까지.
데이비드 린치의 초현실주의도 강하게 느껴진다. 특히 "얼굴을 확인할 수 없는 흐릿한 포커스" 장면들은 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 스타일 현실과 꿈의 경계 흐리기 테크닉을 연상시킬 만하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소외 3부작과의 유사성도 무시 못 한다. 소통 불가능성과 관계의 권태를 다루는 방식에서 특히 그렇다. 다만 안토니오니가 부르주아의 권태를 그렸다면, 이정홍은 서민층의 불안 또한 포착한다.
작업장에서 기홍이 동료들에게 고함을 지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카메라는 핸드헬드로 불안정하게 움직이며 기홍의 내적 불안을 시각적으로 번역한다. 좁은 작업공간은 압력솥 같은 밀실 공포를 조성한다.
형광등의 차가운 빛이 지배적이며, 이는 비인간적 노동환경을 강조한다. 작업도구들이 무기처럼 보이는 순간들이 있어 잠재적 폭력성을 예고한다. 이는 후에 기홍의 폭발적 성격에 대한 시각적 복선이기도 하다.
기홍과 경준이 피아노 학원에 몰래 들어가는 장면은 영화의 핵심 모티프를 압축한다. 타인의 공간에 대한 무단침입은 곧 타인의 내면에 대한 침범의 은유다.
피아노의 흑건반과 백건반의 대비는 이분법적 사고의 한계를 시사한다. 인간관계는 흑백으로 나뉘지 않는다. 모든 것이 그레이존이다. 침묵 속에서 들리는 피아노 소리는 하나라는 인물의 존재를 청각적으로 예고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집주인 부부 정환과 현정과의 만남은 계급관계의 복잡성을 드러낸다. 술을 함께 마시며 허물없이 지내지만, 근본적인 권력관계는 변하지 않는다. 이는 한국사회의 위계질서가 얼마나 끈질기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준다.
2층 계단은 위계질서의 물리적 구현이면서 동시에 비밀스러운 만남의 통로가 된다. 현정과 기홍의 불륜관계는 이 애매한 공간에서 싹튼다. 계단이라는 중간지대에서 벌어지는 중간관계인 셈이다.
하나(이기쁨)의 등장은 불안정했던 삼각관계에 새로운 균형을 가져온다. 그녀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존재로, 우연성이 필연성으로 전환되는 순간을 보여준다.
하나가 2층 통로에 거주하게 되면서 기홍과 현정의 밀회가 물리적으로 차단된다. 이는 공간적 차단이면서 동시에 심리적 정화의 과정이다. 하나라는 순수한 존재가 부정한 관계를 물리적으로 방해한다는 설정은 약간 도덕극 같은 뻔함이 있지만, 이것조차 의도된 클리셰인 것처럼 보인다.
영화 후반부의 "흐릿한 포커스에서 시작한 긴 데드타임" 장면은 의도적인 혼란을 조성한다. 관객은 무엇을 보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는 상태에 빠진다.
이 순간 카메라의 시점이 기홍에서 정환으로 이동하면서 관점의 전환이 일어난다. 우리는 기홍이 겪은 사건을 알 수 없게 되고, 마치 "구멍 속으로 밀려나는" 느낌을 받는다. 이는 린치식 리얼리티 해체 테크닉의 한국적 변용이라 할 수 있다.
<괴인>의 사운드 디자인은 극도로 미니멀하다. 일상음이 주를 이루며, 대화의 침묵이 더 큰 의미를 갖는다. 피아노 소리는 하나의 존재를 상징하며, 깨진 유리창 소리는 관계의 균열을 청각적으로 구현한다.
특히 2층 계단을 오르내리는 발걸음 소리는 권력관계의 변화를 예고하는 청각적 모티프로 작용한다. 누가 위로 올라가고 누가 아래로 내려가는가가 곧 그 순간의 관계 역학을 드러낸다.
코로나19 이후 심화된 사회적 거리두기와 그럼에도 불가피한 타인과의 접촉 사이의 딜레마를 <괴인>은 2층 공유주택이라는 공간으로 빼어나게 은유했다. 물리적으로는 가깝지만 심리적으로는 먼 관계의 패러독스가 이 시대의 핵심 정서라는 듯.
"비전문배우들의 어색한 연기"를 지적할 수도 있겠지만, 바로 그 어색함이야말로 현실의 어색함을 그대로 담아낸 것으로 볼 수 있다. 프로 배우의 매끄러운 연기로는 절대 포착할 수 없는 날것의 불편함이 있다.
심지어는 "너무 모호하다", "결론이 없다", "뭘 말하려는 건지 모르겠다"는 반응도 한편. 하지만 이런 반응야말로 이 영화의 성공을 증명한다.
우리는 매일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사람들과 설명할 수 없는 관계를 맺으며 산다. <괴인>은 바로 그 설명 불가능성을 승화시킨다.
<괴인>을 보고 나면 "괴인은 누구지?"라는 질문에서 "난가?"라는 피하고 싶은 깨달음으로 넘어간다. 이정홍은 인간 존재의 근본적 애매함을 135분 동안 구현한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4관왕을 수상한 것을 비롯해 상을 휩쓴 것도 우연이 아니다. 이 영화는 한국 독립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동시에 우리 모두가 괴인이라는 불편한 진실을 보게 만든다.
"결코 닫히지 않는 상태"라는 감독의 표현처럼, 이 영화는 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더 좋은 질문들을 던진다. "타인과 어떻게 살 것인가?", "이해할 수 없는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관계의 경계는 어디까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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