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스물다섯 살의 봉준호가 영화아카데미에서 연출한 31분짜리 단편 <지리멸렬>은 한국 사회의 권위주의적 위선을 해부한 사회학적 스케치다. 이 작품은 후에 <살인의 추억>, <기생충>으로 이어질 계급 의식과 사회 비판의 DNA가 이미 완성된 형태로 담겨 있다. 세 개의 에피소드와 에필로그로 구성된 이 옴니버스는 '지리멸렬'한 한국 사회의 오피니언 리더들을 향한 젊은 감독의 날카로운 관찰기다.
심리학과 김 교수가 도색잡지 펜트하우스를 보다가 강의실로 향하는 오프닝은 지식인의 이중성을 한 컷으로 압축한다. 그는 아도르노의 『권위주의적 성격』을 강의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그 권위주의적 성격의 전형임을 모르고 있다.
강의실의 형광등 조명은 차갑고 균일하게 설계되어 제도교육의 경직성을 시각화한다. 김 교수가 과대표 김양을 바라보는 시선은 카메라의 주관적 시점으로 포착되어, 관객을 그의 음흉한 내면 속으로 끌어들인다.
여학생을 연구실에 보내고 뒤늦게 당황하는 장면은 1990년대 캠퍼스 스릴러의 문법을 차용한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코미디가 아니라 권력 관계의 은밀한 폭력성에 대한 폭로다. 계단을 뛰어올라가는 교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학생 사이의 시간차 경주는 권력자가 가진 은밀한 공포—자신의 밑천이 드러날까 봐—를 긴박하게 연출한다.
조깅하는 노인이 남의 집 우유를 훔쳐 마시고 신문을 함부로 펼쳐 읽는 장면은 일상적 절도의 평범함을 드러낸다. 그가 신문배달 청년에게 우유를 건네는 행위는 자신의 범죄를 타인과 공유함으로써 죄책감을 희석시키려는 심리적 전략이다.
골목의 미로 같은 구조는 봉준호 영화의 공간적 특징—수직적 계급 구조와 수평적 탈출 욕구—을 보여준다. 노인이 골목을 뛰어다니며 도망치는 시퀀스는 추격 스릴러의 문법을 차용하지만, 동시에 도덕적 책임으로부터의 도피를 은유한다.
청년이 골목에서 신출귀몰하게 나타나 노인을 괴롭히는 장면은 양심의 가책을 물리적 추격자로 의인화한 것이다. 이는 후에 <마더>에서 도준을 괴롭히는 기억들이나 <기생충>에서 기택 가족을 따라다니는 냄새와 같은 심리적 압박의 시각화 기법의 원형이다.
세 번째 에피소드는 아파트 단지와 재래시장 사이의 공간적 대조를 다룬다. W의 고지대 아파트와 저지대 골목길의 구분은 이미 <기생충>의 공간 구조를 예고한다.
허름한 주택들 사이의 미로 같은 골목길을 느린 트래킹으로 지나가는 카메라는 서정적 사운드트랙과 함께 사라져갈 공간에 대한 애정을 담아낸다. 이는 도시 개발의 폭력성에 대한 조용한 저항이다.
빨래가 널린 골목길과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은 인간적 온기를 상징한다. 반면 W의 아파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는 설정은 현대적 주거 공간의 비인간성을 부각시킨다. 엔딩 크레디트에서 다시 등장하는 동네 골목은 봉준호의 그 공간에 대한 애정과 소멸의 아쉬움을 시각적으로 구현한다.
<지리멸렬>의 공간 구성은 봉준호 특유의 수직적 계급 의식을 보여준다. 대학의 6층 연구실, 고지대 아파트, 저지대 골목 등 높이에 따른 권력 배치는 후에 <기생충>에서 완전히 발전된 형태로 나타날 공간의 정치학의 초기 버전이다.
조명의 활용도 주목할 만하다. 강의실의 차가운 형광등, 골목길의 따뜻한 자연광, 연구실의 은밀한 조명 등은 각 공간의 사회적 성격을 시각적으로 규정한다.
김 교수가 아도르노를 인용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권위주의적 성격의 전형이라는 아이러니는 언어와 실제 사이의 괴리를 폭로한다. 이는 후에 <기생충>에서 박 사장의 교양 있는 말투와 실제 행동 사이의 모순으로 발전된다.
"거기, 내 연구실에서 좀 가져오겠나"라는 명령형 어조는 권력 관계를 당연시하는 태도를 드러낸다. 하지만 그 권위가 도색잡지라는 치부 때문에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권력의 취약성도 동시에 보여준다.
김 교수가 강의하는 아도르노의 권위주의적 성격 이론은 이 영화의 철학적 배경이다. 아도르노는 파시즘적 성격의 특징으로 경직된 사고, 권위에 대한 맹종, 약자에 대한 공격성 등을 제시했다. 김 교수는 이를 가르치면서도 스스로 체현하는 아이러니의 화신이다.
또한 도시 공간의 변화를 다루는 방식은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근대화 과정에서 사라지는 공간들에 대한 고고학적 탐구—와 맥을 같이 한다. 봉준호는 사라져가는 골목길을 카메라에 담아두는 행위를 통해 기억의 보존을 시도한다.
<지리멸렬>의 추격 시퀀스는 무성영화 시대의 키스톤 코미디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웃음 뒤에 숨겨진 사회 비판은 채플린의 <모던 타임스>나 키튼의 <셜록 주니어> 같은 사회 풍자 코미디의 전통을 계승한다.
골목길의 서정적 촬영은 오즈 야스지로의 <도쿄 이야기>에서 사라져가는 일본 전통 가옥들을 담아내는 방식과 유사하다. 변화하는 도시 공간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지리멸렬>의 사운드 활용은 미니멀하면서도 효과적이다. 강의실의 정적, 골목길의 생활음, 추격 장면의 발걸음 소리 등은 각 공간의 성격을 청각적으로 규정한다.
특히 침묵의 활용이 탁월하다. 김 교수가 포르노 잡지를 발견당할까 봐 두려워하는 순간의 긴장감 있는 무음은 그의 내적 공포를 증폭시킨다. 이는 후에 <기생충>에서 반지하 가족이 숨죽이며 숨어있는 장면들의 사운드 연출 기법의 원형이다.
<지리멸렬>이 제작된 1994년은 한국 사회의 민주화 과도기였다. 하지만 봉준호가 포착한 권위주의적 성격과 계급적 위선이라는 문제는 30년이 지난 현재도 유효하다.
대학 교수의 성희롱, 공공재에 대한 무책임한 태도, 개발 논리에 밀려나는 서민 공간 등은 2025년 현재도 반복되는 사회 문제들이다. 미투 운동 그리고 그 이후, 젠트리피케이션, 부동산 투기 등 현재의 이슈들과 구조적으로 동일한 문제의식을 다룬다.
특히 SNS 시대의 가식과 위선은 김 교수의 이중적 태도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예를 들어 온라인에서는 진보적 지식인을 자처하면서도 실제로는 권위주의적 행동을 보이는 사람들의 모순된 정체성을 예견한 셈이다.
비판적 관점에서 보면, <지리멸렬>은 대학생이 기성세대를 바라보는 상투적인 시선에 머물 수 있다. 교수의 성적 욕망을 희화화하는 방식이 남성중심적 시각을 반영한다는 페미니즘적 비판도 가능하다.
또한 서민 공간에 대한 향수가 실제 거주민들의 현실—불편한 주거 환경, 경제적 어려움—을 로맨틱하게 미화할 위험성도 있다. 중산층 지식인의 감상적 노스탤지어라는 계급적 한계를 지적할 수 있다.
하지만 봉준호는 개인의 도덕성 문제를 넘어서 사회 구조의 모순을 지적한다. 김 교수의 문제는 개인적 타락이 아니라 권위주의적 시스템이 만들어낸 구조적 산물이라는 점을 명확히 보인다.
골목길에 대한 애정도 단순한 향수가 아니라 개발 자본주의의 폭력성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다. 30년 후 <기생충>에서 반지하라는 공간을 통해 같은 문제의식을 더욱 체계적으로 발전시킨 것이 이를 방증한다.
마지막으로, 젠더 문제에 대해서도 봉준호는 단순한 희화화를 넘어서 권력 관계의 비대칭성을 문제 삼는다. 여학생이 심부름꾼으로 취급받는 상황 자체가 교육 현장의 위계적 폭력을 드러낸다.
<지리멸렬>의 진정한 성취는 31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한국 사회의 핵심적 모순을 세 가지 각도에서 입체적으로 포착했다는 점이다. 개인의 위선, 일상의 무책임, 공간의 정치학을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사회 전체의 지리멸렬한 상태를 총체적으로 진단한다.
코미디와 사회 비판의 절묘한 균형은 후에 <기생충>에서 완전히 꽃피울 봉준호 특유의 톤 앤 매너의 완성된 원형을 보여준다. 웃음을 통한 성찰이라는 희극의 본질적 기능을 현대적으로 업데이트한 젊은 거장의 선언문이다.
1994년의 스물다섯 살 봉준호는 이미 완성된 사회학자였고, 예리한 관찰자였으며, 능숙한 영화 문법 구사자였다. <지리멸렬>은 한국영화사에서 가장 짧으면서도 가장 밀도 높은 사회 진단서 중 하나다.
개 짖는 소리에 가려진 계급도, 봉준호 <플란다스의 개> 심층해석 (7) | 2025.08.17 |
---|---|
화이트칼라 사이코패스의 장난감이 된 '○○', 봉준호 <백색인> 심층해석 (9) | 2025.08.17 |
피부 아래로 침습하는 사랑, 마이클 생크스 <투게더> 심층해석 (5) | 2025.08.16 |
영안실에서 분출하는 탐욕의 온도, 박찬욱 <심판> 심층해석 (4) | 2025.08.16 |
아이폰으로 포획한 '디지털 샤머니즘', 박찬욱 <파란만장> 심층해석 (5) | 2025.08.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