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레에다 히로카즈(是枝裕和)의 <원더풀 라이프>(ワンダフルライフ, 영문 제목 After Life, 1998)는 제목부터가 온유한 사기다. '원더풀'은 경이롭지만 동시에 아이러니하며, '라이프'는 살아있음이 아니라 이미 종결된 것을 가리킨다. 베니스 영화제 금의 오젤라상(金のオゼッラ賞)을 받은 데뷔작 <환의 빛>(幻の光, 1995) 이후 두 번째 장편인 이 영화는, 고레에다가 25-26세에 쓴 TV 드라마 각본을 10여 년 후 영화로 재구성한 것이다. 하지만 그 재구성의 과정에서 다큐멘터리와 픽션의 경계 자체가 용해되었다. 고레에다는 500명을 인터뷰하며 "당신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기억 하나를 선택한다면?"이라는 질문을 던졌고, 그 응답들이 영화의 뼈대가 되었다. 2025년 TIFF(도쿄 국제영화제)에서 클로이 자오(Chloé Zhao) 감독은 이 영화를 재관람하고 "1시간 동안 울었다"고 고백했다 - 그녀가 울었던 것은 슬픔이 아니라, 기억이 얼마나 허약하고 동시에 폭력적인지를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1][2][3][4][5]
영화는 월요일 아침, 안개에 싸인 낡은 건물에 22명의 노소남녀가 도착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들은 전날 사망했고, 여기서 7일간 머물며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기억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선택된 기억은 직원들에 의해 영화로 재현되고, 토요일 상영회 후 그들은 그 기억 속으로 영원히 들어간다. 이 설정은 단테(Dante Alighieri)의 『신곡』(神曲, Divina Commedia, 1320) 중 연옥(Purgatorio) 개념을 일본적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읽힌다. 단테의 연옥에서 영혼들은 정화를 거쳐 천국으로 오르지만, 고레에다의 림보(Limbo)에서는 선택 자체가 정화 과정이다.[2]
하지만 이 림보는 영적 공간이라기보다 관료적 사무실처럼 보인다. 직원들은 클립보드를 들고 일정을 관리하며, 회의실에서 토론한다. 고레에다는 인터뷰에서 말한다: "사후 세계를 신비화하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일상적인 노동의 연장으로 보이게 하려 했다". 이는 죽음조차 관료제의 일부라는 카프카(Franz Kafka)적 악몽을 연상시킨다. 『변신』에서 그레고르 잠자가 벌레로 변한 후에도 출근을 걱정하듯, 고레에다의 망자들은 죽은 후에도 여전히 '선택'이라는 노동을 수행해야 한다.[3][6]
고레에다와 그의 팀은 제작 과정에서 실제로 500명을 인터뷰했다. "당신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기억은?"이라는 동일한 질문을 던졌고, 고레에다는 놀랐다: "사람들이 얼마나 자주 불행한 경험을 선택하는지 흥미로웠다". 이는 행복의 기억이 아니라 의미의 기억을 선택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프루스트(Marcel Proust)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À la recherche du temps perdu, 1913-1927)에서 마들렌 과자가 촉발하는 것은 단순한 행복이 아니라 존재의 연속성이듯, 고레에다의 망자들도 자신이 '살았음'을 증명하는 순간을 찾는다.[5][7]
촬영감독 야마자키 유타카(山崎裕)는 다큐멘터리 전문가였다. 고레에다는 회상한다: "야마자키 씨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무언가 말하기 시작하면 어느새 찍고 있었다. 홈비디오처럼 카메라를 돌렸고, 나는 '필름 부족해지는데 어떡하지' 생각했지만, 올라온 것이 재밌었다". 픽션 영화감독이 다큐멘터리 촬영감독에게 배우는 순간 - 이는 고레에다 시네마의 미학적 전환점이었을 것이다. 16mm 필름과 8mm 필름을 혼합 사용하며, 일부는 컬러로, 일부는 흑백으로 촬영된 기억 장면들은 매체 자체의 물질성을 통해 시간의 층위를 구분한다.[6][3]
영화의 핵심 서사는 직원 모치즈키 타카시(望月, 이우라 아라타 井浦新 Arata Iura 연기)와 1945년 태평양전쟁 말기에 전사한 와타나베(渡辺, 데라지마 스스무 寺島進 연기)의 교차점이다. 모치즈키는 1945년 22세에 전사했고, 이후 기억을 선택하지 못해 림보의 직원으로 남았다. 그는 자신의 삶에 "소중한 순간이 없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8]
하지만 와타나베를 담당하면서 충격적 사실을 알게 된다: 와타나베의 아내 교코(恭子)는 모치즈키의 옛 정혼자였다. 와타나베는 자신이 교코에게 "잘해주지 못했다"는 속죄로, 결혼 후 함께 영화관에 갔다가 벤치에 앉아 대화하던 순간을 선택한다. 그는 떠나기 전 모치즈키에게 편지를 남긴다: "교코가 당신의 정혼자였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와 함께한 긴 시간이 소중했음을 여기서 깨달았다".[6][8]
이 편지는 질투의 소급적 해소다. 와타나베는 평생 교코가 다른 남자를 사랑했음을 알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결혼생활을 긍정한다. 이는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의 『사랑의 단상』(Fragments d'un discours amoureux, 1977)에서 분석된 '질투의 기호학'을 넘어선다. 와타나베는 사랑받지 못했음에도 사랑했던 시간을 선택함으로써 피해자성을 거부한다.
모치즈키는 아카이브에서 교코가 선택한 기억을 찾아본다. 놀랍게도 그녀는 50년 결혼생활의 남편이 아닌 젊은 모치즈키와 함께 있던 벤치 장면을 선택했다. 이 순간 모치즈키는 깨닫는다: "나는 다른 사람의 행복의 일부였다". 그는 이 깨달음의 순간 자체를 자신의 기억으로 선택하고, 림보를 떠난다.[9][8][6]
이 서사는 기억의 비대칭성을 폭로한다. 모치즈키는 교코를 잊지 못했지만, 자신이 그녀의 기억에서도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죽어서야 알았다. 우리는 타인의 기억 속에 존재하지만, 그 존재를 확인할 방법이 없다. 일본의 철학자 와쓰지 데쓰로(和辻哲郎)가 『풍토』(風土, 1935)에서 인간 존재의 관계성(間柄, aidagara)을 강조했듯, 고레에다는 기억조차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획득함을 보여준다.
여성 직원 시오리(しおり, 에리카 오다 小田エリカ 연기)는 모치즈키를 좋아하지만 그의 마음은 여전히 교코에게 있다. 시오리는 18세에 사망해 림보에 남았고, "아버지 없이 자랐다"는 암시가 있다. 그녀의 이름 시오리(しおり)는 '책갈피'를 의미하며, 이는 그녀의 존재론적 위치를 압축한다 - 그녀는 타인의 이야기에 끼어든 표식일 뿐, 자신의 서사를 갖지 못한다.[5][8]
시오리와 모치즈키의 관계는 성립하지 못한 로맨스의 고고학이다. 로베르 브레송(Robert Bresson)의 <무셰트>(Mouchette, 1967)에서 소녀 무셰트가 죽음으로만 세상과 소통하듯, 시오리는 림보라는 정지된 시간 속에서 영원히 모치즈키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고레에다는 인터뷰에서 말한다: "시오리는 모치즈키가 떠나는 것을 원하지 않지만, 동시에 그가 떠나야 함을 안다. 이 모순이 그녀의 비극이다".[3]
이세야 유스케(伊勢谷友介)가 연기한 캐릭터는 기억 선택을 거부한다. 그는 "단 하나의 기억이 자신의 전체 인생을 대표할 수 없다"며 선택을 보류하고, 결국 직원으로 림보에 합류한다. 이세야는 오디션 때부터 이 입장을 표명했다: "같은 곳을 계속 반복하는 것은 행복하지 않을 것"이라고.[8][3]
이 캐릭터는 고레에다 자신의 철학적 입장을 대변하는 것으로 보인다. 고레에다는 프레스 노트에서 밝힌다: "우리의 기억은 고정되거나 정적이지 않다. 그것은 역동적이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아를 반영한다. 따라서 기억하는 행위, 과거를 돌아보는 행위는 결코 불필요하거나 부정적이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가 진화하고 성숙하도록 도전한다".[5][6]
선택을 거부하는 것은 변화할 권리를 유보하는 것이다.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의 실존주의가 "선택하지 않는 것도 선택이다"라고 주장했다면, 고레에다는 "선택하지 않는 것이 영원한 선택의 가능성을 유지하는 방법"임을 제시한다. 이세야 본인도 인터뷰에서 말한다: "내 캐릭터는 림보에 남기로 선택했지만, 그것이 포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돕는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3]
영화에는 다양한 노인들의 기억 선택 과정이 교차편집된다. 한 할머니는 "빨간 드레스를 입고 춤춘 날"을 선택하고, 한 할아버지는 "전차 의자에 앉아 있던 순간"을 선택한다. 이 기억들의 공통점은 '사건'이 아닌 '감각'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역사적 순간이나 성취가 아닌, 바람의 감촉, 햇빛의 온도, 옷의 색깔을 기억한다.[9]
이는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의 현상학을 영화적으로 구현한다. 메를로-퐁티는 『지각의 현상학』(Phénoménologie de la perception, 1945)에서 의식은 항상 신체를 통해 세계와 접촉한다고 주장했다. 고레에다의 망자들도 추상적 의미가 아닌 구체적 감각을 통해 자신의 삶을 회상한다. 한 노인이 선택한 "나무 그늘 아래"라는 기억은,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가 없지만, 그 순간의 평온함이야말로 존재의 증거였다.
영화의 후반부는 직원들이 선택된 기억을 "영화로 재현"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들은 세트를 만들고, 조명을 조정하며, 8mm와 16mm 카메라로 촬영한다. 이 장면들은 <원더풀 라이프> 자체의 제작 과정을 메타적으로 반영한다. 우리가 보는 것은 기억의 재현이 아니라 재현의 재현이며, 그 이중성 속에서 진실과 허구의 경계는 흐려진다.[2][6]
고레에다는 말한다: "<원더풀 라이프>의 기억들은 실제 경험으로 제시되고 나중에 영화로 재구성되지만, 캐릭터들이 말하는 이야기를 '진실'로, 재현을 '허구'로 구분할 수 없다. 그것들은 매우 복잡하게 얽혀있다". 이는 장 뤽 고다르(Jean-Luc Godard)의 메타영화적 실험과 다르다. 고다르가 영화 문법 자체를 해체했다면, 고레에다는 기억의 본질이 이미 영화적임을 보여준다. 기억은 원본 경험이 아니라 편집된 버전이며, 우리는 모두 자신의 인생 영화의 감독이다.[7]
스틸 사진가 스키타 마사요시(杉田昌義)가 기억 시퀀스 촬영에 참여했는데, 그는 짐 자무쉬(Jim Jarmusch)의 <미스터리 트레인>(Mystery Train, 1989) 세트에서 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틸 사진가를 동영상 촬영에 투입한 것은 의도적 선택이었을 것이다 - 기억은 운동보다는 정지된 이미지에 가깝다.[6]
림보의 건물은 "낡은 학교나 폐쇄된 관공서" 같다. 벽지는 벗겨지고, 복도는 어두우며, 직원들의 사무실은 서류로 가득하다. 이 미장센은 일본의 고도성장기 이후 방치된 공공 건축물을 연상시킨다. 1990년대 거품경제 붕괴 후 일본 전역에는 이런 폐허가 산재했다.[2]
고레에다는 의도적으로 "시간이 정지된 듯한" 공간을 선택했다. 프레더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이 『포스트모더니즘』(1991)에서 말한 '역사성의 상실'이 여기서 물리적 공간으로 구현된다. 림보는 과거도 미래도 아닌 영원한 현재이며, 그 현재는 관료적 업무의 반복으로만 채워진다. 직원들은 매주 월요일 새로운 망자들을 맞이하고, 토요일 그들을 보내며, 일요일 휴식 후 다시 월요일을 맞는다 - 시지프스의 신화의 사무직 버전.
영화는 반복적으로 안개 장면을 삽입한다. 망자들이 도착할 때도, 떠날 때도 안개가 그들을 감싼다. 안개는 림보와 다른 세계 사이의 경계를 시각화하지만, 동시에 그 경계가 얼마나 불분명한지를 보여준다. 구로사와 아키라(黒澤明)의 <거미집의 성>(蜘蛛巣城, 1957)에서 안개가 미혹과 운명을 상징했다면, 고레에다의 안개는 기억 자체의 불확실성을 나타낸다.[2]
안개는 또한 촬영의 실용적 필요였을 것이다. 저예산 영화에서 안개는 세트의 한계를 숨기는 동시에 신비감을 부여하는 경제적 선택이다. 하지만 그 경제성이 오히려 미학적 강점이 되었다 - 안개 속에서 인물들은 윤곽만 보이고, 이는 기억 속 인물들이 명확한 형태를 잃어가는 과정을 상징한다.
음악은 카사마츠 야스히로(笠松泰洋)가 담당했다. 그의 스코어는 극도로 절제되어 있으며, 종종 무음에 가깝다. 피아노 단음들이 드물게 울리고, 현악기가 긴 지속음을 유지하며, 대부분의 시간은 앰비언스 사운드만 남는다. 이는 아르보 페르트(Arvo Pärt)의 '틴티나불리(tintinnabuli)' 양식 - 종소리처럼 울리는 최소한의 음향 - 을 연상시킨다.[2]
고레에다는 인터뷰에서 말한다: "음악이 감정을 지시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관객이 스스로 느끼게 하고 싶었다". 이는 브레송의 원칙 - "음악은 화면을 설명해서는 안 된다" - 과 일치한다. <원더풀 라이프>에서 침묵이야말로 가장 웅변적이다. 망자들이 자신의 기억을 떠올리며 말없이 앉아있는 장면들, 그 긴 정적 속에서 관객은 자신의 기억을 소환하게 된다.[3]
영화는 16mm 필름으로 촬영되었고, 기억 재현 장면들은 8mm와 16mm를 혼합 사용했다. 16mm의 그레인(grain)은 디지털의 매끄러움과 대조되며, 그 거칠기가 오히려 진정성의 표지가 된다. 수잔 손택(Susan Sontag)이 『사진론』(On Photography, 1977)에서 말했듯, 아날로그 사진의 그레인은 시간의 흐름을 가시화한다.[6]
컬러와 흑백의 혼합 사용도 의미심장하다. 일부 기억은 컬러로, 일부는 흑백으로 재현되는데, 이는 기억의 선명도가 일정하지 않음을 시사한다. 크리스 마커(Chris Marker)의 <라 주테>(La Jetée, 1962)가 거의 전체를 스틸 이미지로 구성하며 기억의 정지성을 탐구했다면, 고레에다는 매체의 다양성을 통해 기억의 층위를 구분한다.
고레에다는 종종 오즈 야스지로(小津安二郎)의 후계자로 불린다. <원더풀 라이프>에서도 오즈의 영향이 감지되는데, 특히 인물이 없는 풍경 쇼트(pillow shot)의 사용이다. 복도, 창문, 나무 - 이러한 무인 쇼트들이 장면 전환에 삽입된다. 오즈가 이를 통해 시간의 흐름과 존재의 무상함을 암시했다면, 고레에다는 림보의 시간 정지를 강조한다. 빈 복도는 누군가 지나갔지만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빈 의자는 앉았던 사람이 떠났음을 상기시킨다.
하지만 고레에다는 오즈와 달리 로우 앵글을 고집하지 않는다. 오즈의 '다타미 높이' 카메라가 일본 전통 주거 공간과 연결되었다면, 고레에다는 더 다양한 앵글을 사용하며 현대적 공간에 적응한다. 이는 오즈의 모방이 아닌 대화이며, 전통의 계승이 아닌 변주다.
고레에다는 인터뷰에서 <원더풀 라이프>와 (2001)가 "2000년 전후 일본을 덮고 있던 시대감을 잘 표현한다"고 인정한다. 1995년 한신 대지진(阪神淡路大震災)과 오움 진리교(オウム真理教) 사건은 일본 사회에 집단적 트라우마를 남겼다. 지진은 자연의 무차별적 폭력을, 오움 사건은 인간의 광기를 드러냈다.[3]
<원더풀 라이프>는 이러한 맥락에서 죽음의 의미를 재협상하려는 시도로 읽힌다. 대량 사망이 일상화된 사회에서, 개인의 죽음은 어떻게 존엄을 유지하는가? 고레에다의 답변은 기억을 선택하는 행위 자체가 존엄이라는 것이다. 6천 명 이상이 사망한 한신 대지진 희생자들, 사린 가스 공격 피해자들 - 그들은 자신의 기억을 선택할 기회조차 없었다. 림보의 망자들에게 주어진 7일은 그들이 빼앗긴 시간을 상징적으로 보상한다.
영화는 명확한 해결 없이 끝난다. 모치즈키는 떠났지만, 시오리와 다른 직원들은 남는다. 새로운 주가 시작되고, 새로운 망자들이 도착한다. 이 순환은 끝나지 않으며, 림보는 계속 작동한다. 앨버트 카뮈(Albert Camus)의 『시지프스 신화』(Le Mythe de Sisyphe, 1942)가 떠오른다: "우리는 시지프스가 행복하다고 상상해야 한다."[8]
고레에다는 해피엔딩도 비극적 결말도 제공하지 않는다. 대신 과정 자체를 긍정한다. 일본 선불교(禅仏教)의 개념 '무상(無常, mujo)'이 여기서 작동하는데, 이는 모든 것이 덧없다는 비관이 아니라 덧없음을 수용하는 평정을 의미한다. 직원들은 매주 같은 일을 반복하지만, 매주 다른 사람들을 만난다. 이 반복 속의 차이가 바로 삶이며, 림보조차 또 다른 형태의 삶이다.
클로이 자오가 1시간 동안 울었던 것은, 아마도 이 긍정의 잔혹함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야 하고, 기억해야 하며, 선택해야 한다 - 그 과정이 고통스럽더라도. <원더풀 라이프>는 위로를 주지 않는다. 단지 기억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왜 불가피한지를 보여줄 뿐이다. 그리고 그 불가피성 안에서, 어쩌면 우리는 각자의 벤치를, 각자의 빨간 드레스를, 각자의 나무 그늘을 발견할 것이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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