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상호(Yeon Sang-ho)의 <얼굴>(영문 제목 The Ugly, 2025)은 제목부터가 번역의 정치학이다. 한국어 '얼굴'이 중립적 명사라면, 영어 'The Ugly'는 정관사를 동반한 판결문이다. 2018년 그래픽 노블을 7년 만에 영화화한 이 작품은, <염력>(2018) 촬영 당시 동시에 집필되었지만 투자를 받지 못해 방치되었다가, 결국 20명의 동료들과 노 개런티로 제작비 2억 원, 13회차 촬영이라는 초저예산으로 완성되었다. 연상호는 인터뷰에서 고백한다: "나 자신의 성취에 대한 집착이 어디서 왔는지 질문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1970년대 한국의 급속한 근대화 과정에서 무엇이 상실되고 착취당했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졌다". 시각장애를 극복한 영규와 추하다고 낙인찍힌 영희의 대비를 통해 그는 고도성장의 이면을 해부한다.[1][2][3][4][5][6][7][8]
영화의 가장 급진적 선택은 영희(신현빈 연기)의 얼굴을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다가, 마지막에 CGI로 합성된 얼굴을 공개하는 것이다. 연상호는 설명한다: "본질적으로는 연극과 영화지만, 마지막에 현실을 삽입하고 싶었다. 그 얼굴이 누구의 얼굴도 아니면서 동시에 모두의 얼굴처럼 보이길 원했다. CG 팀과 함께 당시 한국 여성의 평균 얼굴을 기준선으로 삼고, 화면에 나온 하반부는 배우의 것과 합성했다".[9][10]
이 방법론은 프란시스 골튼(Francis Galton)의 1880년대 '합성 사진술(composite photography)'을 21세기로 소환한다. 골튼은 여러 얼굴을 겹쳐 '범죄자 유형'이나 '질병 유형'을 추출하려 했다 - 우생학의 초기 도구였다. 연상호는 이 폭력적 기술을 전복시켜, 외모지상주의가 얼마나 통계적이고 비인간적인지를 폭로한다. 영희의 얼굴은 특정 개인의 것이 아니라 사회가 '못생김'으로 규정한 기준의 시각화다.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가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에서 말한 것처럼, 원본 없는 이미지가 원본보다 더 실재적이 된다.
권해효(Kwon Hae-hyo)가 연기하는 노년의 영규는 시각장애인이면서 전각(seal engraving) 분야의 국가무형문화재로 칭송받는다. 이 설정은 소포클레스(Sophocles)의 오이디푸스 신화를 뒤집은 것으로 읽힌다. 오이디푸스가 진실을 깨닫고 스스로 눈을 찌르는 반면, 영규는 태어날 때부터 눈이 보이지 않았고, 그럼에도 "아름다운 것"을 만든다. 하지만 영화가 폭로하는 것은 영규가 진정으로 보지 못한 것은 아내의 얼굴이 아니라 그녀의 고통이라는 사실이다.[11][12]
권해효는 역할 준비를 위해 "처음으로 렌즈를 착용"했다. 그의 장인이 실제로 시각장애인이었다고 밝히며, 이는 역할에 대한 개인적 공명을 더한다. 그가 표현하는 영규의 "짜증나고, 과묵하며, 에너지를 최소화하려는" 태도는 사회가 찬양하는 '장애 극복 서사'의 이면에 있는 피로를 드러낸다. 영규는 영웅이 아니라 생존자이며, 그 생존은 아내의 희생 위에 세워졌다.[3][13][1]
박정민(Park Jeong-min)은 젊은 영규와 그의 아들 동환을 모두 연기한다. 이 선택은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세대 간 트라우마 전승 이론을 시각화한다. 박정민의 실제 아버지도 시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은 이 역할을 "선물"로 만들었다고 그는 고백한다. 젊은 영규는 "항상 웃고, 좋은 얼굴을 하고, 친절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 과장된 친절은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가 말한 '상징적 폭력'의 내면화다 - 억압받는 자가 억압의 논리를 자발적으로 수행한다.[12][13][3]
하지만 박정민은 주의한다: 과거 장면들은 "늙은 영규의 상상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왜곡된 기억"일 수 있다. 영화는 객관적 과거가 아니라 구성된 과거를 제시한다. 이는 알랭 레네(Alain Resnais)의 『히로시마 내 사랑』(Hiroshima mon amour, 1959)에서 마르그리트 뒤라스(Marguerite Duras)가 썼듯, "당신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Tu n'as rien vu)"는 선언이다. 기억은 보는 것이 아니라 재구성하는 것이다.[13]
박정민은 짧은 준비기간에 실제 전각 기술을 배웠다. 이 육체적 훈련은 메소드 연기(Method Acting)를 넘어 기술 자체를 체화하는 것이다. 로베르 브레송(Robert Bresson)이 『시네마토그래프에 관한 단상』에서 말했듯, "모델은 연기하지 않고 존재한다." 박정민의 전각 시연 장면들은 연기가 아니라 실제 노동이며, 그 노동의 리듬이 캐릭터를 구축한다.[1]
신현빈(Shin Hyun-been)은 얼굴이 한 번도 나오지 않는 역할을 맡았다. 촬영감독 표상우(Pyo Sang-woo)는 "카메라를 그녀의 얼굴에서 멀리 두는" 전략을 고수했다. 이는 관객의 상상을 자극하지만, 동시에 우리 자신의 편견을 시험한다. 영화 속 인물들이 그녀를 "괴물", "더럽다"고 묘사할 때, 우리는 무엇을 상상하는가?[14][10]
신현빈은 "영희가 겉으로는 소심해 보이지만, 내면에 매우 강한 핵심을 가져야 한다"고 분석했다. 그녀의 연기는 신체성과 목소리에 집중된다. 특히 공장주 백주상(임성재 연기)과의 장면에서, 신현빈의 "물리적 취약성과 임성재의 육체적 위압감"의 대비가 권력 관계를 가시화한다.[14][13]
영희의 뒷모습이 반복되는 구도는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의 낭만주의 회화 - 특히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Wanderer above the Sea of Fog, 1818)를 연상시킨다. 프리드리히의 그림에서 뒷모습의 인물은 숭고(sublime)를 관조하지만, 연상호의 영희는 사회적 추방이라는 반(反)숭고를 응시한다. 그녀는 세상을 보지만 세상은 그녀를 보지 않으며, 본다 해도 혐오의 대상으로만 본다.
영화에서 영희의 별명은 "똥걸레(Dung Ogre)"로 번역된다. 로저 에버트(Roger Ebert) 웹사이트는 이 별명의 유래를 명시한다: "공장주가 너무 잔혹해서 그녀는 화장실에 갈 수 없다고 믿었고, 결국 바지에 대변을 실례했다". 이 사건은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분석한 '인간 존엄의 체계적 파괴'를 압축한다.[15][10]
아렌트는 나치 수용소에서 수감자들에게 화장실 사용을 금지하거나 극도로 제한한 것이 인간을 동물 이하로 전락시키는 전략이었다고 지적했다. 영희가 겪은 것은 1970년대 청계천 의류공장에서 벌어진 유사한 폭력이다. 연상호는 말한다: "영희는 불편한 정의를 대표했고, 이것이 사람들이 그녀를 추하다고 낙인찍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녀의 '추함'은 생물학적이 아니라 정치적이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가 『감시와 처벌』에서 말한 것처럼, 권력은 신체를 규율의 대상으로 만들며, 저항하는 신체는 오염된 것으로 표시된다.[16][13]
영화는 1970년대 청계천(Cheonggyecheon) 의류공장 지역을 배경으로 한다. 미술팀은 "청계천 지역의 세부적 측면을 완벽하게 재현"했으며, 배우들은 "깊이 있는 연기를 위한 조건을 제공해준 것"에 감사를 표했다. 제작비 2억 원으로 시대극을 만드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지만, 그 제약이 오히려 미니멀리즘의 진정성을 만들어냈다.[12][1]
청계천은 한국 현대사에서 노동착취의 상징적 공간이다. 1970년 전태일(Jeon Tae-il) 분신 사건이 일어난 평화시장도 같은 지역이다. 연상호는 전태일을 직접 언급하지 않지만, 영희의 이야기는 전태일 이후에도 변하지 않은 여성 노동 현실을 암시한다. 전태일이 남성 노동자의 아이콘이라면, 영희는 이름 없이 사라진 수많은 여성 노동자들의 합성체다.
오마이스타(OhmyStar) 평론은 지적한다: "영화는 <얼굴>이라는 제목이 무색하게 클로즈업을 남발하지 않고 풀샷 위주의 화면 구성을 취한다". 이 롱샷 미학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Michelangelo Antonioni)의 소외 시네마를 연상시킨다. 안토니오니의 『적막』(L'Eclisse, 1962)에서 인물들은 거대한 건축물 속에서 작아지듯, 영희는 공장의 재봉틀과 좁은 방 속에서 축소된다.[17]
한지현(Han Ji-hyun)이 연기하는 PD 김수진은 처음에는 영규의 "성공 스토리"를 담으려 하지만, 영희의 유골이 발견되자 즉각 "더 매력적인 다큐멘터리"로 초점을 전환한다. 수진은 현대 미디어의 착취적 본성을 체현한다. 한지현은 인정한다: "그녀가 이기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녀가 이 가족사를 파헤치는 방식이 좋아 보이지 않을 수 있다".[13]
이는 프레더릭 와이즈먼(Frederick Wiseman)의 다큐멘터리 윤리학을 환기시킨다. 와이즈먼은 『티티컷 폴리스』(Titicut Follies, 1967)에서 정신병원의 비인간적 처우를 폭로했지만, 동시에 환자들의 사생활 침해로 소송을 당했다. 진실을 밝히는 것과 피사체를 존중하는 것 사이의 긴장은 해결될 수 없다. 수진은 영희를 "잊혀진 여성으로서 조명하려" 하지만, 그 조명 자체가 또 다른 형태의 소비다.[13]
하지만 연상호는 수진을 단순히 악당으로 그리지 않는다. 한지현은 말한다: "그녀에게는 매우 명확한 동기가 있다. 결국 나는 이 캐릭터가 다른 사람들이 내린 선택, 동환을 포함하여, 판단하는 것으로 본다". 수진은 메타영화적 대리인이기도 하다 - 그녀가 하는 일은 연상호 자신이 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감독도 영희의 이야기를 "상품화"하여 관객에게 판다. 이 자기비판적 제스처가 영화를 단순한 고발을 넘어서게 한다.[13]
임성재(Im Sung-jae)가 연기하는 공장주 백주상은 "그 시대에 실제로 존재했던 많은 사람들과 닮았다"고 배우 자신이 말한다. "그는 특별히 나쁜 사람이 아니었지만, 어떤 면에서 그 시대가 이런 유형의 사람들이 존재하도록 허용했다".[13]
백주상은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 개념을 체현한다. 그는 사디스트가 아니라 사업가다. 그는 영희를 학대하지만, 그것은 개인적 악의가 아니라 이윤 극대화의 논리에서 나온다.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1984』에서 오브라이언이 윈스턴을 고문하는 것은 증오 때문이 아니라 "당신을 사랑하기 위해서"인 것처럼, 백주상은 영희를 착취하면서도 자신이 그녀에게 일자리를 '제공'한다고 믿을 수 있다.[13]
오마이스타 평론은 강조한다: "영화는 <얼굴>이라는 제목이 무색하게 클로즈업을 남발하지 않고 풀샷 위주의 화면 구성을 취한다. 정영희의 얼굴을 끝까지 숨기면서도 그녀의 존재감을 각인시키는 카메라". 이 선택은 야스지로 오즈(Yasujiro Ozu)의 미학과 대비된다. 오즈는 인물들의 얼굴을 정면으로 포착하는 '필로우 샷'을 애용했지만, 연상호는 정반대로 얼굴을 거부한다.[17]
이는 로베르 브레송의 『시골 사제의 일기』(Journal d'un curé de campagne, 1951)에서 사제의 고통을 손의 클로즈업으로 포착하는 방식과 유사하다. 얼굴을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관객의 투사를 극대화한다. 자크 라캉(Jacques Lacan)의 '응시(gaze)' 이론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항상 우리 자신의 욕망이 투영된 것이다. 영희의 보이지 않는 얼굴은 우리 각자의 편견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영희의 백골 시체가 40년 만에 "신도시 개발 과정에서" 발견된다. 이 설정은 한국의 압축 성장이 어떻게 과거를 문자 그대로 땅에 묻었는지를 상징한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의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Über den Begriff der Geschichte, 1940)가 말하듯, "문명의 기록은 동시에 야만의 기록이다."[6]
동환이 어머니의 유골과 마주하는 장면은 법의학 드라마의 관습을 전복시킨다. CSI에서 뼈는 과학적 증거를 제공하지만, 여기서 뼈는 단지 부재의 물질적 잔여물일 뿐이다. 조르주 디디-위베르만(Georges Didi-Huberman)이 『이미지들,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Images malgré tout, 2003)에서 논한 것처럼, 홀로코스트 희생자의 뼈는 증언하지만 동시에 침묵한다. 영희의 뼈도 마찬가지다 - 그것은 그녀가 죽었다는 것만 말하고, 어떻게, 왜 죽었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블러디 디스거스팅(Bloody Disgusting)은 경고한다: 영화는 "충격적이고 대면적인 결말을 목표로 하며, 그 이전의 모든 것을 뒤집는다". 구체적 스포일러를 피하지만, 결말은 영규의 도덕적 지위를 근본적으로 재평가하게 만든다. 평론은 계속한다: "주의 깊은 관객들에게, 다층적 피날레는 단순히 연상호가 냉소적으로 말해온 것의 증거일 뿐이다: 진정한 추함은... 우리 모두 안에 있다".[18]
할리우드 리포터(Hollywood Reporter)는 연상호의 알레고리를 해석한다: "시각장애인 영규는 역사적 투쟁과 글로벌 굴욕 이후 급속한 발전 단계의 한국을 상징한다. 눈먼 아버지처럼, 국가는 과거와 불리함을 초월하고 더 아름다운 미래를 추구하려 했다 - 하지만 이 추구는 종종 취약한 자존심을 수반하며, 다양한 불의를 초래했다".[16]
이 결말은 조지프 콘래드(Joseph Conrad)의 『어둠의 심장』(Heart of Darkness, 1899)의 "The horror! The horror!"를 한국적으로 재작성한다. 커츠 대령이 제국주의의 야만을 체현했다면, 영규는 발전주의의 야만을 체현한다. 그는 피해자이지만 동시에 가해자이며, 그 이중성이야말로 한국 현대사의 트라우마다.
마침내 <얼굴>이 증명하는 것은 보지 못하는 것이 면죄부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영규는 아내의 얼굴을 본 적이 없지만, 그녀의 고통을 몰랐다고 주장할 수 없다. 그는 들었고, 느꼈으며, 알았다. 단지 알기를 거부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거부 속에서, 그는 아내를 사회가 그녀를 보는 방식대로 - 추한 것으로 - 받아들였다. 연상호의 카메라는 이 공범을 추적하며, 동시에 우리 자신의 시선을 되묻는다. 우리는 무엇을 보지 않기로 선택하는가? 그리고 그 선택의 대가를 누가 치르는가? 영희의 CGI 얼굴이 스크린에 떠오를 때,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그녀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추함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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