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야케 쇼(三宅唱)의 <여행과 나날>(旅と日々, 2025)은 영화 그 자체가 여행이자 나날이 되는 기이한 순환을 목격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츠게 요시하루(つげ義春)의 만화 「海辺の叙景」(해변의 서정, 1967)과 「ほんやら洞のべんさん」(혼야라도의 벤상, 1968)을 원작으로 삼았지만, 이 영화는 원작의 '재현'이라는 안전지대를 단호히 거부한다. 오히려 감독은 츠게의 세계를 인용하되, 그 인용 자체를 극 중 극의 형식으로 메타적으로 전시함으로써, 영화와 만화, 언어와 이미지, 재현과 경험 사이의 간극을 직시하게끔 유도한다.[1][2][3][4]
이 영화의 구조는 이중적이다. 여름 파트에서는 한국인 각본가 이(李, 심은경 분)가 츠게의 만화를 각색한 영화가 대학 강의실 스크린에 투사된다. 바다가 보이는 어느 여름날, 나기사(渚, 카와이 유미 河合優実 분)와 나츠오(夏男, 타카타 만사쿠 髙田万作 분)라는 두 남녀가 우연히 만나고, 폭풍 전야의 바람이 불어오고, 대화는 어색하지만 묘하게 친밀하다. 그러나 이 여름 이야기를 본 이는 자신에게 "재능이 없다"고 말한다. 언어로 포착한 것이 영상 앞에서 무력해지는 순간, 각본가는 언어의 한계를 체감한 것일까?[3][5][4][1]
겨울 파트는 이가 스승 우오누마(魚沼) 교수의 급작스러운 죽음 이후, 그의 형견인 필름 카메라를 손에 쥔 채 설국(雪国)으로 떠나는 여정을 따라간다. 거기서 그녀는 고색창연한 여관의 주인 벤조(べん造, 츠츠미 신이치 堤真一 분)를 만난다. 난방도 제대로 안 되고, 식사도 변변찮고, 이불도 스스로 깔아야 하는 이 여관에서, 두 사람은 이로리(囲炉裏, 화로)를 사이에 두고 대화를 나눈다. 대화는 어색하지만, 그 어색함 속에서 묘한 유머와 온기가 피어오른다.[1][3]
메타픽션으로서 <여행과 나날>의 진짜 야심은, 각본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데 있다. 이는 단순히 직업 설정이 아니라, 영화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존재론적 질문의 화신이다. 각본가 이는 언어로 세계를 구축하는 사람이지만, 정작 자신이 쓴 각본이 영상화된 것을 보고 무력감을 느낀다. 이 순간은 미야케가 츠게의 만화를 영화화하면서 느꼈을 법한 감각—"언어(만화의 칸, 대사, 지문)를 영상과 소리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무언가를 잃는다"는 불안—을 반영한다.[2][4]
감독 자신도 인터뷰에서 밝혔듯, "말에서 일단 멀어지는 경험"이 필요하지만, 최종적으로는 주인공이 다시 펜을 들고 말과 재회한다. 이는 언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 '너머'를 경험한 뒤 다시 언어로 돌아오는 순환을 그린다. 여행(언어를 떠남)과 나날(언어로의 귀환)은 이렇게 하나의 변증법적 과정을 이룬다. 영화는 언어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며, 동시에 언어가 다시 필요해지는 지점을 정직하게 인정한다.[6]
극 중 극의 구조는 또한 관객의 시선을 복잡하게 만든다. 우리는 이가 쓴 각본을 보는 대학생들을 보고, 그 대학생들이 보는 영화(나기사와 나츠오의 이야기)를 보고, 그것을 보는 이의 표정을 본다. 시선의 층위가 중첩되면서, "영화를 본다는 것"의 의미가 재정의된다. 미야케는 "영화를 보는 행위 자체가 여행과 유사하다"고 말한다. 일상에서 벗어나 어둠 속에서 낯선 이미지를 대면하는 것, 그것이 여행이든 영화든 본질적으로 같은 경험일지도 모른다는 제안이다.[5][4][2][3][1]
여름과 겨울이라는 두 파트는 표면적으로는 대칭적이지만, 그 내부는 정교한 비대칭으로 채워져 있다. 미야케는 "세부적으로는 처음부터 의식적으로 대비를 설계하지 않았다"고 밝힌다. 여름 파트를 찍고 반년 정도 겨울 파트 준비 기간을 가지면서, 여름의 성과와 반성점을 겨울에 반영했다고. 이는 영화 내부의 구조뿐 아니라, 제작 과정 자체가 "여행과 나날"의 리듬을 따랐음을 의미한다. 촬영은 일상이자 여행이었고, 영화는 그 과정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아낸다.[3]
여름 파트의 신츠시마(神津島) 바닷가는 푸른 파도가 넘실대고, 폭풍 전야의 바람이 불어온다. 나기사와 나츠오는 만남을 기대하며 최고의 옷을 입었지만, 갑작스러운 폭우에 젖어버린다. 감독은 "당사자에게는 비애가 있지만, 옆에서 보면 건기(健氣)하고 사랑스럽다"고 말한다. 이 관점의 이중성—비극이면서 동시에 희극—은 츠게 요시하루의 만화가 지닌 특유의 톤이기도 하다.[5][1][3]
겨울 파트의 야마가타현(山形県) 쇼나이(庄内) 설경은 한없이 고요하지만, 그 고요함 속에는 예측 불가능성이 도사리고 있다. 미야케는 촬영 중 "사진 한 장으로 보면 안정적이고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맑으면 순식간에 녹고, 밤이 되면 다시 쌓이고, 하루도 같은 설경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이 발견은 단순한 제작 에피소드가 아니라, 영화의 주제의식과 직결된다. "우리는 항상 변화하는 것들 속에 있다"는 대사는 이렇게 촬영 현장의 물리적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다.[7][1]
눈 속에서 벤조와 이가 밤에 나가 잉어가 있는 연못을 보러 가는 장면은, 영화의 핵심적인 시퀀스 중 하나다. 이 장면을 촬영하면서 심은경은 "서로의 목소리에 의지하며, 목소리에 집중해서 연기했다"고 회고한다. 어둠 속에서 시각이 차단되면, 청각과 촉각이 전면에 나선다. 시청각의 미장센이 아니라, '청촉각(聽觸覺)'의 미장센이라고 해야 할 이 장면은, 영화가 언어 너머의 감각을 어떻게 포착하는지를 보여주는 예시다. 눈 속에서 들리는 자신의 숨소리, 상대방의 발소리, 눈이 부서지는 소리—이 모든 것이 대사보다 더 많은 것을 전달한다.[1]
이로리(囲炉裏)라는 오브제는 단순한 소품이 아니라, 관계의 은유이자 영화 공간의 중심축이다. 벤조와 이가 처음 만나 이로리를 사이에 두고 앉는 장면은, 미야케가 리테이크를 요구한 유일한 신이기도 하다. 처음 촬영에서는 감독이 "재미있어서" 대사를 너무 많이 써서, 벤조라는 인물이 한 번에 다 드러나버렸다고 한다. 심은경 역시 "벤조에게 친밀감이 너무 빨리 생겨서 만담(漫談) 같은 분위기가 됐다"고 고백한다.[1]
이 에피소드는 거리감의 조절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타인은 본질적으로 두렵고, 그 두려움을 유지하면서도 조금씩 가까워지는 과정이 드라마다. 이로리는 물리적으로 두 사람을 분리하지만, 동시에 불의 온기를 공유하게 만든다. 분리와 연결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이 공간은, "타자성을 유지하면서도 친밀해지는" 역설적 관계의 공간화다.[1]
심은경이 촬영 중 즉흥적으로 던진 "사요오데고자이마스카(左様でございますか, 그러하시군요)"라는 대사는, 이 영화가 "현장에서만 나올 수 있는 것"을 얼마나 중시하는지를 보여준다. 미야케는 "그런 좋은 대사는 내가 쓸 수 없다"고 인정한다. 이는 감독이 배우를 신뢰하고, 현장의 우연성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태도를 반영한다. 리허설을 거의 하지 않고, 의상과 세트가 준비된 후에야 대사를 소리 내어 읽게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도쿄의 회의실에서 심은경과 츠츠미 신이치를 나란히 앉혀놓고 그 여관을 상상할 수 있겠냐"는 감독의 말은, 영화가 단순히 각본의 시각화가 아니라 장소와 시간, 배우와 오브제의 만남에서 비로소 생성되는 것임을 강조한다.[1]
츠게 요시하루는 일본 만화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는 작가다. 그의 작품은 일상과 환상, 현실과 꿈의 경계가 흐릿하며, 가난하고 무기력한 주인공들이 여행을 떠나지만 어디에도 도착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반복한다. 「해변의 서정」은 바다에서 만난 남녀의 어색한 만남을, 「혼야라도의 벤상」은 눈 내리는 여관에서의 기묘한 체류를 그린다. 두 작품 모두 플롯다운 플롤이 없고, 사건은 거의 일어나지 않으며, 분위기와 정조가 전부다.[8][9][4]
미야케는 츠게의 세계를 "재현"하는 대신, 그 세계를 "경험"하려 한다. 그가 주목한 것은 츠게가 "입념하게 그려넣은 자연의 풍경과 하늘의 모습"이다. 만화의 칸 속에 빼곡히 그려진 구름, 파도, 나뭇잎의 흔들림—이것들을 영화는 실제로 촬영한 바람과 물결로 대체한다. 이때 영화는 만화를 "배신"하면서도 동시에 만화가 하지 못한 것을 완성한다. 만화는 시간을 정지시키지만, 영화는 시간을 흐르게 한다. 츠게의 정지된 시간 감각을 영화의 지속으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역설적으로 츠게적인 무언가가 더 강렬하게 드러난다.[4][3]
츠게의 작품에는 "현재의 삶에서 벗어나 다른 인생을 살고 싶다는 욕망"과 "익숙한 것도 여행지에서는 새롭게 보인다는 감각"이 있다고 미야케는 말한다. 이는 곧 일상의 이방인화(異邦人化)다. 여행은 멀리 떠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을 낯설게 보는 시선의 전환이다. 이가 설국에서 경험하는 모든 것—난방 없는 방, 이불 깔기, 이로리의 불—은 그녀에게는 낯설지만, 벤조에게는 지극히 일상적이다. 그 낯섦과 익숙함의 교차 속에서, 두 사람은 조금씩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1]
미야케 쇼는 편집 감독 오카와 케이코(大川景子)와의 대담에서 "間合い(타이밍/거리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편집자인 오카와는 완성된 영화를 고향 카나자와(金沢)에서 다시 봤을 때, "나기사와 나츠오의 바다 장면이 정말 무섭다고 느꼈다"고 고백한다. 편집 중에는 무수히 반복해서 봤던 장면인데, 왜 극장에서는 다르게 느껴졌을까? 이는 극장의 어둠과 사운드가 만들어내는 몰입의 차이, 그리고 영화가 관객과 맺는 관계의 특수성을 시사한다.[10][5]
촬영감독 츠키나가 유타(月永雄太)의 카메라는 인물들을 쫓아가지 않는다. 오히려 인물들이 프레임 안으로 들어오고 나가기를 기다린다. 이는 관조적 시선이지만, 냉담하지는 않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파도가 밀려왔다 빠지는 리듬, 눈이 쌓이고 녹는 과정—이 모든 것이 인물의 감정만큼이나 중요하게 다뤄진다.[9][4][3]
특히 겨울 파트에서 이와 벤조가 눈 속 강을 걷는 장면은, 촬영 당시 심은경이 "깜짝 놀랐다"고 회고할 만큼 즉흥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대본에는 "강가를 걷는다"고 돼 있었지만, 실제로는 강물 속을 걸었다. 겨울 한밤중의 강물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목소리에만 의존해 길을 찾는다. 이 장면의 사운드 디자인은 발소리, 물소리, 숨소리로 채워져 있다. 대사는 최소화되고, 소리의 질감이 전면에 나선다. 이것이야말로 "언어 너머"를 포착하는 영화의 방법론이다.[1]

인물들의 이름은 단순한 기호가 아니다. 이(李)는 성씨이자 동시에 "떠남[異世界]"을 암시하는 단음절이다. 원작에서는 일본인 남성이었던 주인공을 한국인 여성 각본가로 바꾼 것은, 미야케가 심은경과의 만남을 떠올리면서 "그녀가 연기한다면 상상만으로도 설렌다"고 느낀 데서 비롯됐다. 이 결정은 단순히 캐스팅의 문제가 아니라, 타자성의 층위를 더한다. 한국인 여성이 일본의 설국을 여행한다는 설정은, 언어적·문화적 이방인으로서의 위치를 강화한다. 심은경의 한국어 내레이션은 이 영화에 독특한 분위기를 더한다고 평가받는다.[4][5]
벤조(べん造)는 "변(弁)"과 "조(造)"의 합성어로 보일 수도 있지만, 원작 만화에서는 히라가나로만 표기된다. 이는 그의 정체성이 고정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는 여관 주인이지만, 손님을 제대로 대접하지도 않고, 오히려 손님을 끌고 밤에 연못을 보러 나간다. 그는 고독하지만 외롭지 않고, 무뚝뚝하지만 따뜻하다. 츠츠미 신이치의 연기는 이 모순을 자연스럽게 체화한다.[11][9]
나기사(渚)는 "물가, 해변"을 뜻하는 단어 그 자체다. 그녀는 바다 옆에 서 있는 존재이며, 경계에 있는 사람이다. 나츠오(夏男)는 "여름 남자"라는 직역이 가능한데, 이는 그가 계절처럼 일시적이고 덧없는 존재임을 암시할지도 모른다. 두 사람의 만남은 여름이라는 계절성 속에서만 가능한, 찰나적이고 반복 불가능한 사건이다.[4]
심은경은 인터뷰에서 "어릴 적 이와이 슌지(岩井俊二) 감독의 <러브레터>(Love Letter, 1995)를 보고, 언젠가 저런 눈 풍경 속에서 영화를 찍고 싶었다"고 밝혔다. <러브레터>는 오타루(小樽)의 설경 속에서 펼쳐지는 기억과 상실의 드라마였고, <여행과 나날>의 겨울 파트 역시 야마가타(山形)의 설경 속에서 타자와의 만남을 그린다. 그러나 <러브레터>가 멜로드라마의 감성적 고조를 추구했다면, <여행과 나날>은 그 반대 방향으로 나아간다. 감정은 절제되고, 드라마는 최소화되며, 대신 존재의 질감이 전면에 나선다.[7][1]
오즈 야스지로(小津安二郎)의 영향 역시 감지된다. 특히 이로리를 사이에 둔 정적인 구도는 오즈의 다다미 쇼트(畳ショット)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오즈가 가족이라는 제도 내부의 해체를 그렸다면, 미야케는 가족이 아닌 타자들 간의 일시적 공동체를 그린다. 오즈의 인물들은 집을 떠나지 못하지만, 미야케의 인물들은 이미 여행 중이다.
여행영화의 계보에서 보자면, 빔 벤더스(Wim Wenders)의 로드무비들, 특히 <파리, 텍사스>(Paris, Texas, 1984)나 <베를린 천사의 시>(Der Himmel über Berlin, 1987) 같은 작품들이 떠오른다. 벤더스 역시 "여행은 도착이 아니라 과정"이라는 명제를 영화화했다. 그러나 벤더스의 여행이 실존적 방황이라면, 미야케의 여행은 존재론적 치유에 가깝다. 이는 떠나서 무언가를 찾는 것이 아니라, 떠남 자체를 통해 조금씩 회복되는 과정이다.[11]
미야케는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금표범상을 받으며 "최악의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 세상에서, 영화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반복해서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 발언은 단순한 수상 소감이 아니라, 이 영화를 관통하는 윤리적 질문이다. 영화는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 하지만 영화는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을 바꿀 수 있다.[3][5][1]
감독은 "순수하게, 자신이 영화에 다시 놀라고 싶다"고 말한다. 영화를 보고 "와" 하고 놀라는 순간, 말을 잃는 그 감각을 얼마나 만들어낼 수 있는가—그것이 영화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이는 스펙터클이나 반전을 의미하지 않는다. 바람이 불고, 파도가 밀려오고, 눈이 내리는 것—당연한 것들이 당연하지 않게 보이는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다.[3]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미야케는 "극장 속 어둠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각"을 강조했다. OTT 시대에 이 발언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영화는 집에서 혼자 보는 콘텐츠가 아니라, 어둠 속에서 낯선 타자들과 함께 경험하는 의식(儀式)이다. 극장은 일종의 공동체를 일시적으로 형성하는 공간이며, 그 공동체는 영화가 끝나면 해체된다. 하지만 그 일시성이야말로 여행과 닮았다.[5][1]
심은경은 로카르노와 부산 영화제 상영 때 "상상 이상으로 웃음이 일어나서 놀랐다"고 했다. 미야케 역시 "유머 초중요"라고 강조한다. 극 중 대사에 나오는 "인간의 슬픔과 우스꽝스러움"—이 상반된 두 감정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영화관에서 보내는 시간의 특별함이라고.[1]
츠게 요시하루의 만화 역시 비애와 유머가 공존한다. 가난하고 무기력한 인물들이 겪는 일들은 비극적이지만, 동시에 어딘가 우스꽝스럽다. 미야케는 이 톤을 정확히 포착한다. 여름 파트에서 나츠오는 최고의 알로하 셔츠를 입고 나기사를 만나러 가지만, 폭우가 쏟아진다. 겨울 파트에서 벤조는 난방도 없는 여관을 운영하면서, 손님에게 "잉어를 보러 가자"며 한밤중에 눈 속으로 끌고 나간다. 이 모든 상황은 비극이자 희극이다. 인간은 비참하지만 동시에 사랑스럽다는, 그 역설을 미야케는 판단 없이 제시한다.[3][1]
미야케는 "이 영화는 여름과 겨울 두 이야기라기보다, 훨씬 많은 작은 이야기들이 있어서 하나의 영화가 된 것 같다"고 말한다. 여름 파트에서 나기사가 자료관에서 보는 사진들—그 사진 한 장 한 장에 이야기의 시작이 있다고. 이야기의 씨앗과 싹들이 쌓여서, 후반부에서는 그 씨앗을 키워나가는 느낌이라고.[3]
이 발언은 영화의 서사 구조를 이해하는 열쇠다. <여행과 나날>은 선형적 플롯이 아니라, 프랙털 구조에 가깝다. 큰 이야기(이의 여행) 안에 작은 이야기들(극중극, 자료관의 사진들, 벤조의 과거 암시 등)이 겹겹이 접혀 있고, 각각의 작은 이야기는 다시 더 작은 이야기들을 품고 있다. 관객은 이 구조 속에서 길을 잃을 수도 있지만, 그 길 잃음 자체가 여행의 본질이다.
반복과 변주는 음악적 기법이기도 하다. 이로리 주변의 대화, 눈 속을 걷는 행위, 카메라를 들어 무언가를 찍는 행위—이런 모티프들이 조금씩 다른 맥락에서 반복되면서, 의미의 층이 두터워진다. 마치 미니멀 뮤직에서 같은 패턴이 반복되지만 매번 조금씩 변주되면서 전체적으로 거대한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미야케는 일본 사회의 외국인에 대한 배타적 정서를 언급하며, "다른 존재를 두려워하면서도 존중하고, 거리를 좁혀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는 단순히 사회적 메시지가 아니라, 이 영화의 구조 자체에 내재된 윤리다. 이와 벤조는 언어도, 배경도, 나이도 다르다. 하지만 이로리를 사이에 두고 앉아, 조금씩 서로를 이해해간다. 이 과정은 급진적이지 않다. 극적인 화해도, 감동적인 고백도 없다. 그저 함께 있음만이 있다.[5]
2025년 현재, 전 세계는 분열과 혐오의 시대를 지나고 있다. 타자를 배제하고, 경계를 세우고, 동질성을 강요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런 시대에 <여행과 나날>은 타자와 함께 앉아 침묵을 나누는 것의 가치를 조용히 제안한다. 이는 나이브한 휴머니즘이 아니다. 미야케는 "타인은 두렵다"고 솔직히 인정한다. 하지만 두려움을 인정하면서도, 그 두려움을 넘어서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1]
또한 이 영화는 각본가의 위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메타적이다. AI가 각본을 쓰고, 알고리즘이 서사를 결정하는 시대에, 인간 각본가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영상이 범람하는 시대에 "언어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과 직결된다. 이가 각본을 쓴 영화를 보고 무력감을 느끼지만, 결국 다시 펜을 든다는 것은—언어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언어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은—창작자의 윤리적 선택이다.[2][6][4]
<여행과 나날>은 제78회 로카르노 국제영화제에서 최고상인 금표범상을 수상했다. 일본 영화로는 18년 만의 쾌거라고 한다. 이는 분명 영광이지만, 동시에 이 영화에 "거장의 걸작"이라는 무게를 덧씌운다. 미야케 자신도 인터뷰 서두에서 "국제영화제 그랑프리라는 영예도, 걸작이라는 평가도 이 작품에는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12][13][2][1]
이 지적은 정확하다. <여행과 나날>은 "위대한 영화"로 소비되기를 거부한다. 그것은 조용하고, 느리고, 사건도 별로 없고, 해결도 제시하지 않는다. 그저 눈이 내리고, 바람이 불고, 사람들이 만났다가 헤어진다. 이런 영화를 "최고"라고 칭송하는 순간, 우리는 이 영화가 하려는 것을 놓치게 된다. 이 영화는 "최고"가 되려는 게 아니라, "지금 여기"를 기록하려는 것이다.[3]
극 중에서 이가 쓴 각본이 영화화되어 상영되고, 그것을 본 학생이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묻자 이는 "재능이 없다고 생각했다"고 답한다. 이 장면은 창작자의 자기 의심을 정면으로 다룬다. 각본가는 자신이 쓴 것이 영상으로 구현되는 것을 보며, 언어의 무력함을 느낀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무력함을 느끼는 과정 자체가 창작의 동력이 된다.[4][1]
미야케 쇼가 츠게 요시하루를 영화화하면서 느꼈을 불안과 설렘, 좌절과 발견이 고스란히 이 장면에 투영돼 있을 것이다. 원작을 "충실히" 재현하는 것이 목표였다면, 극 중 극이라는 구조는 필요 없다. 하지만 미야케는 "영화화한다는 것 자체"를 영화 안에 넣음으로써, 번역의 불가능성과 동시에 번역의 필연성을 드러낸다. 언어는 이미지가 될 수 없지만, 이미지 역시 언어 없이는 사유될 수 없다. 이 긴장 속에서 영화는 존재한다.[4]
<여행과 나날>은 영화가 끝나도 끝나지 않는다. 이가 다시 펜을 들 것이라는 암시는 있지만, 그녀가 무엇을 쓸지는 알 수 없다. 벤조는 여전히 그 여관에 있을 것이고, 나기사와 나츠오가 다시 만날지도 알 수 없다. 모든 것은 미완이고, 진행 중이며, 여행의 도중이다.[6][1]
미야케는 "영화관을 나선 후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지만, 마치 자신이 여행 중인 것처럼, 자신의 생활권이 여행지처럼 느껴진다면 재미있지 않겠냐"고 말한다. 이것이야말로 이 영화가 관객에게 건네는 선물일지도 모른다. 극장을 나서면 여전히 같은 거리, 같은 집, 같은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것들이 조금 다르게 보인다면—조금 더 낯설고, 조금 더 신기하고, 조금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면—그것으로 충분하다.[1]
결국 <여행과 나날>이 제안하는 것은 일상을 여행처럼, 여행을 일상처럼 사는 태도다. 떠남과 머묾, 낯섦과 익숙함, 언어와 침묵, 타자와 나—이 모든 이항대립들이 분리되지 않고 얽혀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는 항상 그 얽힘의 한가운데에 있다는 것. 눈은 녹고, 바람은 불고, 파도는 밀려온다. 우리는 그 속에서 조금씩 변하고, 조금씩 머물고, 조금씩 떠난다. 어쩌면 삶 자체가 여행이자 나날이라는, 너무나 당연하지만 쉽게 잊히는 진실을 이 영화는 상기시킨다.[3][1]
미야케 쇼의 <여행과 나날>은 언어가 침묵해야 하는 곳에서 영화가 말을 시작하고, 영화가 끝나는 곳에서 다시 언어가 필요해지는 그 순환의 아름다움을 기록한 작품이다. 이는 거창한 선언 없이, 조용한 목소리로, 하지만 흔들림 없이 우리에게 묻는다—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고 있으며, 무엇을 보고 있는가, 라고.[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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