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의 2013년작 <설국열차>는 빙하기가 된 지구를 순환하는 거대한 열차 안에서 벌어지는 계급 투쟁을 그린 SF 액션 스릴러다. 하지만 이 1001칸의 열차는 단순한 미래적 배경이 아니라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완벽한 축소판이며, 꼬리칸에서 엔진칸까지의 여정은 단테의 신곡을 수평적으로 펼쳐놓은 계급 사회의 지옥순례처럼 보인다.
영화는 지구온난화 해결을 위해 살포한 CW-7이 빙하기를 초래한다는 설정으로 시작된다. 이는 인간의 과학적 오만이 더 큰 재앙을 불러온다는 현대적 바벨탑 신화다. 환경 문제 해결책이 더 큰 환경 재앙으로 이어지는 아이러니는 기술 만능주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면서, 동시에 기후변화 시대의 현실적 공포를 반영한다.
17년 전의 재앙이 현재의 계급 구조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사용된다는 점은 위기가 어떻게 권력 집중의 명분이 되는지를 보여준다. 윌포드의 구원자 서사는 재난 자본주의의 전형이다.
<설국열차>의 혁명적 공간 설계는 전통적인 상하 구조를 수평적 선형 구조로 전환시킨다. 꼬리칸이 지하라면 엔진칸은 천상이지만, 이 수직적 위계가 수평적 이동으로 시각화된다. "앞으로 가라"는 명령은 "위로 올라가라"와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홍경표의 촬영은 이 선형적 움직임을 극대화한다. 좌에서 우로의 카메라 이동이 계급 상승을 의미하고, 뒤에서 앞으로의 트래킹이 권력 접근을 상징한다. 열차의 흔들림마저 사회적 불안정성의 물리적 구현이다.
영화의 가장 충격적인 순간 중 하나는 꼬리칸 주민들이 17년간 먹어온 갈색 젤리 형태의 프로틴 바가 바퀴벌레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장면이다. 양갱처럼 보이는 이 보급식은 빈곤층의 영양 불평등을 가장 노골적으로 시각화한 장치다.
하지만 더 섬뜩한 것은 커티스가 이 사실을 알고도 "그래도 식인보다는 낫다"고 반응한다는 점이다. 영화 초기 17년 전 식량 부족 시기에 "아기가 가장 맛있었다"는 커티스의 고백과 연결되면서, 바퀴벌레 프로틴 바는 문명적 진보의 상징으로 역설적으로 기능한다. 곤충 단백질이 인육보다 문명적이라는 끔찍한 상대성을 드러낸다.
이는 계급 사회의 식문화 위계를 극한으로 밀어붙인 설정이다. 상층부는 스시와 수족관의 물고기를, 하층부는 바퀴벌레를 먹는 음식 아파르트헤이트는 현실의 영양 불평등을 SF적으로 극대화한 은유다.
틸다 스윈튼의 메이슨은 중간 관리자의 그로테스크한 캐리커처다. 그녀의 가짜 이빨과 어색한 신발은 권력의 인위성과 허위의식의 물질화를 보여준다. 메이슨이 한쪽 신발을 벗고 고문받는 장면은 권위가 얼마나 허약한 기반 위에 서 있는지를 시각적으로 폭로한다.
그녀의 과장된 연설과 히스테리컬한 몸짓은 이데올로기적 선전의 코믹하면서도 위험한 면을 드러낸다. "신발을 제자리에"라는 연설은 체제 유지 논리를 가장 직접적으로 표현한 명장면이다.
에드 해리스의 윌포드는 현대판 제우스이자 기술 만능주의의 화신이다. 엔진룸의 대칭적 구조와 차가운 금속성은 신성함과 비인간성을 동시에 표현한다. 윌포드가 아이들을 기계 부품으로 사용한다는 설정은 자본주의가 인간을 소모품으로 취급한다는 직접적 은유다.
"엔진은 영원하다"는 윌포드의 신념은 기술적 불멸성에 대한 종교적 맹신이면서, 자본주의 시스템의 자기 영속화 욕구를 드러낸다. 그가 커티스를 후계자로 지명하려는 시도는 혁명조차 시스템 유지의 도구로 활용하려는 교활한 전략이다.
영화의 가장 잔혹한 반전은 신성한 엔진룸에서 어린 아이들이 기계 부품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티미(Marcanthonee Reis)를 비롯한 꼬리칸의 아이들이 엔진의 회전 기어 사이에서 수작업으로 기계를 돌리고 있는 장면은 산업혁명 시대 아동노동의 포스트 아포칼립스적 재현이다.
윌포드의 "영원한 엔진"이라는 기술적 신화가 실제로는 가장 원시적인 인력에 의존한다는 아이러니는 현대 자본주의의 숨겨진 진실을 폭로한다. 첨단 기술의 이면에는 항상 착취당하는 약자들이 있다는 구조적 모순을 시각화한다. AI로 앱을 만들어준다던 미국의 스타트업 '빌더 AI'가 알고보니 인도 개발자 수백명에게 의존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요나가 바닥을 들춰내어 발견하는 이 충격적 장면은 문자 그대로 시스템의 밑바닥을 폭로하는 메타포적 연출이다. 아이들의 작은 손만이 정교한 기계 틈에 들어갈 수 있다는 물리적 필연성은 착취의 효율성을 냉혹하게 드러낸다.
<설국열차>의 진정한 충격은 혁명 지도자 길리엄(존 허트)과 시스템 지배자 윌포드(에드 해리스) 사이의 은밀한 공모 관계가 밝혀지는 순간이다. 표면적으로는 대립하지만 실제로는 협력해온 이들의 관계는 혁명조차 시스템 유지의 도구라는 절망적 진실을 드러낸다.
길리엄의 혁명은 진정한 변화가 아니라 인구 조절과 사회적 가스 배출을 위한 계산된 연극이었다. 윌포드가 커티스를 후계자로 지명하려는 시도는 기존 지배자가 새로운 지배자를 선택하는 권력 승계 시스템의 자기 복제 과정으로 보인다.
크리스 에반스의 커티스는 전형적인 할리우드 영웅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혁명의 허상을 체현한다. 그의 17년 전 식인 체험과 현재의 리더십 사이의 모순은 순수한 영웅성의 불가능을 드러낸다. 길리엄(존 허트)과의 사제관계는 지혜의 전수가 아니라 기만의 계승이었다는 충격적 반전으로 귀결된다.
커티스가 마지막에 자신의 팔을 기계에 넣어 시스템을 파괴하는 행위는 개인적 속죄이면서 동시에 시스템에 대한 문자적 저항이다. 하지만 이 영웅적 희생도 전체 시스템 붕괴로 이어지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는다.
<설국열차>의 시각적 설계는 꼬리칸의 어둠에서 엔진칸의 빛으로 이어지는 명암의 그라데이션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빛으로의 이동이 진정한 해방이 아니라 더 정교한 억압으로의 이동임이 점차 드러난다.
꼬리칸의 금속 쓰레기와 엔진칸의 정밀 기계 사이의 물질적 대조는 계급 간 생활 수준 차이를 극명하게 시각화한다. 프로틴 바와 스시 사이의 음식 격차는 영양 불평등을 넘어서 존재론적 차별을 암시한다.
열차라는 밀폐 공간에서 벌어지는 액션의 한계를 봉준호는 창의적으로 극복한다. 도끼 전투 장면에서 터널 통과 시 절대 어둠이 되는 설정은 공간적 제약을 서사적 장치로 활용한 뛰어난 아이디어다.
각 칸의 서로 다른 환경—수족관, 교실, 나이트클럽, 온실 등—은 다양한 액션 무대를 제공하는 동시에 계급별 문화적 차이를 보여준다. 물 부족 상황에서 수족관의 물고기를 보는 아이러니는 자원 배분의 불합리성을 압축적으로 드러낸다.
송강호의 남궁민수는 혁명보다 탈출을 선택하는 제3의 길을 제시한다. 그의 크로놀 중독은 현실 도피적 성격을 암시하지만, 동시에 시스템 외부에 대한 상상력을 보여준다. 문을 열어야 한다는 그의 신념은 체제 개혁보다 체제 거부를 의미한다.
딸 요나의 투시 능력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상징하지만, 동시에 비현실적 낙관주의일 수도 있다는 양면성을 갖는다. 마지막에 북극곰을 보는 장면은 새로운 생명의 가능성이면서 새로운 위험의 시작이기도 하다.
<설국열차>의 청각적 구성은 기계음과 인간음의 대위법으로 이루어진다. 엔진의 리드미컬한 소음은 시스템의 규칙성을, 인간의 불규칙한 소리는 개인의 저항을 상징한다. 프로틴 바를 씹는 소리와 스시를 먹는 소리 사이의 청각적 대비는 계급 격차를 소리로 번역한다.
마르코 벨트라미의 음악은 전자음과 관현악을 혼합하여 미래적 배경과 원시적 감정을 동시에 표현한다. 혁명 장면의 타악기는 집단적 에너지를, 엔진룸의 현악기는 권력의 우아함을 나타낸다.
열차의 순환 구조는 우로보로스(꼬리를 무는 뱀)의 현대적 변주처럼 보인다.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회전은 니체의 영원회귀 개념을 공간적으로 구현한다. 하지만 이는 초인적 긍정이 아니라 시지포스적 절망에 가깝다.
홍수신화의 현대적 변주로서 <설국열차>는 노아의 방주를 계급 사회로 재해석한다. 선택받은 자들의 구원이 새로운 억압 시스템이 되는 종교적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새로운 세계의 시작이 옛 세계의 반복일 수 있다는 순환적 역사관을 제시한다.
비판적 관점에서 보면, <설국열차>는 서구의 디스토피아 소설 전통을 한국적 맥락 없이 차용한 피상적 작품이라는 목소리도 나온다. 매트릭스, 엘리시움, 블레이드 러너 등 기존 SF 영화들의 클리셰를 조합한 창의성 부족이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또한 프랑스 원작 만화를 한국인 감독이 영어로 각색한 문화적 정체성의 혼재가 주제 의식의 모호함을 초래했다는 지적도 있다. 할리우드 배우들의 캐스팅이 상업적 고려에 치우쳐 작품성을 해쳤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하지만 기후 위기와 불평등은 특정 국가나 문화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전 지구적 현상이다. 봉준호는 한국적 특수성보다는 인류 공통의 위기를 다루려고 했다는 점에서 모종의 정당성을 갖는다고 변호할 수 있겠다.
서구 장르의 차용도 모방이 아닌 전유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 동일한 소재를 다른 관점으로 재해석한 창조적 변주이며, 원작을 넘어서는 새로운 의미를 창출했다. 다국적 캐스팅 역시 지구적 재앙이라는 주제에 부합하는 선택으로 충분히 평가할 수 있다.
126분 동안 봉준호는 인류 문명의 총체적 모순을 하나의 열차 안에 압축해낸다. 진보와 퇴보, 혁명과 반복, 희망과 절망이 끊임없이 순환하는 영원회귀의 악몽 속에서, 인간은 과연 시스템을 뛰어넘을 수 있는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제기한다.
마지막에 요나와 티미가 북극곰을 보는 장면은 새로운 시작인지 또 다른 시작인지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처리된다. 문명의 붕괴가 자연으로의 회귀를 의미할 수 있지만, 동시에 새로운 억압의 시작일 수도 있다. 열차는 멈췄지만, 순환의 논리는 여전히 작동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불확실성이야말로 인간 조건의 가장 정직한 표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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