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의 2017년작 <옥자>는 미란도 그룹이 개발한 슈퍼피그 옥자와 강원도 소녀 미자(안서현)의 우정을 그린 액션 어드벤처 판타지다. 하지만 이 Netflix 5천만 달러 프로젝트는 단순한 소녀와 동물의 모험담이 아니라 글로벌 자본주의가 감정과 생명을 상품화하는 메커니즘을 폭로한 정교한 알레고리다.
영화는 "뉴욕에서 멀리 떨어진" 강원도 산골에서 시작된다. 미자와 옥자가 연못에서 뛰어놀고 산딸기를 따먹으며 평화롭게 공존하는 이 목가적 풍경은 산업 자본주의 이전의 원시 공동체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이 에덴의 순수함은 의도적으로 조작된 환상이라는 점에서 더욱 섬뜩하다.
다르덴 형제의 영화를 연상시키는 핸드헬드 카메라워크와 자연광의 활용은 다큐멘터리적 현실감을 조성하지만, 옥자라는 CGI 존재가 개입하면서 리얼리즘과 판타지의 경계를 교묘하게 흐린다. 이는 자본주의가 자연마저 인공적으로 재창조한다는 근본적 모순을 시각적으로 구현한다.
틸다 스윈튼이 일인이역으로 연기하는 루시와 낸시 미란도 자매는 글로벌 기업의 분열적 정체성을 상징한다. 루시의 과장된 밝음과 환경친화적 수사는 기업의 공식적 페르소나를, 낸시의 냉혹한 실용주의는 자본의 진짜 얼굴을 대변한다.
루시의 "슈퍼피그 프로젝트" 발표 장면에서 과도한 제스처와 히스테리컬한 웃음은 기업 광고의 코믹한 과잉을 풍자하면서, 동시에 그 이면의 불안을 드러낸다. "자연적으로 키운" 슈퍼피그라는 모순적 표현은 그린워싱의 전형적 사례다.
제이크 질런할의 TV 동물학자 조니 윌콕스는 스티브 어윈을 패러디한 미디어 엔터테이너다. 그의 과장된 호주 억양과 히스테리컬한 텔레비전 쇼 연출은 자연을 스펙터클로 소비하는 미디어 문화의 폭력성을 폭로한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상업적 콘텐츠로 포장하는 조니의 모습은 다큐멘터리마저 엔터테인먼트가 되는 현대 미디어 생태계의 왜곡된 현실을 보여준다. 그가 옥자를 "발견"하는 연출된 만남은 모든 자연적 순간이 자본의 스펙터클로 전환되는 과정의 축소판이다.
폴 다노가 연기하는 ALF 리더 제이는 동물권 운동의 도덕적 순수성과 전술적 실용주의 사이의 갈등을 체현한다. 비폭력 원칙을 고수하면서도 결과적으로는 옥자를 더 큰 위험에 빠뜨리는 그들의 행동은 순수한 의도와 복잡한 현실 사이의 간극을 보여준다.
특히 한국인 멤버 K(스티븐 연)가 미자의 동의 없이 계획을 진행한 후 "미자가 계획에 동의했다"고 거짓 번역하는 장면은 소통의 불가능성과 언어 권력의 남용을 동시에 폭로한다. K의 의도적 오역은 번역이 중립적 전달이 아닌 권력적 해석임을 보여준다. "번역의 정치학"이 동물권 운동의 핵심 쟁점으로 제시되는 독특한 설정이다.
영화에서 옥자가 젖꼭지 하나만을 가지고 있다는 언급은 단순한 설정이 아닌 다층적 상징이다. 일반적으로 돼지는 두 줄의 젖꼭지를 가져 많은 새끼를 키울 수 있지만, 옥자의 단일 젖꼭지는 자연적 번식의 불가능성을 암시한다. 이는 미란도가 생명체의 생식 능력까지 통제한다는 절대적 지배의 상징이다.
젖꼭지 하나라는 설정은 자본주의가 자연의 생산성을 인위적으로 제한하여 공급을 독점한다는 구조적 비판을 담고 있다. 옥자는 스스로 번식할 수 없으므로 미란도에 영원히 의존해야 하는 완벽한 상품이다. 생명의 자율성 자체가 박탈된 궁극적 소외 상태를 시각화한다.
또한 모성의 상징인 젖꼭지가 하나뿐이라는 것은 불완전한 모성, 제한된 돌봄 능력을 의미하기도 한다. 자본주의가 가족과 돌봄 관계마저 상품화하고 통제한다는 페미니즘적 비판이 은밀하게 스며있다.
미자와 옥자가 서울 지하상가를 질주하는 44-48분 시퀀스는 만화적 상상력이 영화적 공간을 완전히 재구성한 봉준호의 대표적 장면이다. 지하상가라는 수평적 미로에서 거대한 옥자가 뛰어다니는 초현실적 스펙터클은 일상 공간을 판타지로 전환시키는 마술적 사실주의의 전형이라 할 수 있겠다.
형광등 조명과 상점들의 네온사인이 만들어내는 인공적 색채 팔레트는 자연에서 온 옥자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문명과 자연의 충돌을 시각화한다. 카메라가 옥자의 거대한 몸체를 따라 유동적으로 움직이는 촬영 기법은 관객을 추격의 동반자로 만든다.
루시와 낸시 미란도가 담배를 맞대어 불을 붙이는 장면은 이 영화의 스쳐지나가는 가장 섬뜩한 순간 중 하나다. 표면적으로는 자매애를 보여주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권력 공유의 의식이며 분열된 기업 정체성의 통합을 상징한다.
한 사람이 두 개의 담배를 입에 물고 다른 사람이 불을 붙이는 이 친밀한 제스처는 그들이 사실상 한 몸임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루시의 친환경 마케팅과 낸시의 냉혹한 자본주의가 서로 다른 얼굴의 같은 시스템이라는 진실을 담배 연기 속에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담배라는 중독성 물질을 공유하는 행위는 자본주의의 독성이 얼마나 깊이 내재화되어 있는지를 암시한다. 그들은 서로를 중독시키면서 동시에 중독에서 벗어날 수 없는 공생적 의존 관계를 형성한다.
취한 조니 윌콕스(제이크 질런할)가 원통형 추출 도구로 옥자의 살점을 채취하는 장면은 이 영화의 가장 잔혹한 순간이다. "여자가 남자를 동료들 앞에서 모욕하면, 남자는 자기만의 결정을 내리고 싶어진다"며 거세 불안을 토로하는 조니의 모습은 남성성 위기와 폭력의 연결고리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남근적 형태의 추출 도구를 허리춤에 들고 옥자의 어깨를 천천히 살펴보며 정확한 위치를 물색하는 장면은 성폭력의 은유를 넘어서 자본주의적 착취의 성적 차원을 폭로한다. 권력을 잃은 남성이 더 약한 존재를 성적으로 지배함으로써 자존감을 회복하려는 병리적 메커니즘이다.
눈물을 흘리며 살점을 추출하는 조니의 모습은 가해자도 시스템의 피해자라는 복합적 현실을 보여준다. 그는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음을 알면서도 시스템의 압박 때문에 멈출 수 없는 구조적 폭력의 실행자다.
이 추출된 살점이 곧바로 요리되어 "최고 중의 최고"라고 평가받는 장면은 폭력의 즉시적 상품화를 보여준다. 고통에서 쾌락으로의 전환이 얼마나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이루어지는지를 냉혹하게 드러낸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인 도축장 장면은 봉준호 영화 중 가장 충격적인 시각적 폭력을 보여준다. 수백 마리의 슈퍼피그들이 컨베이어 벨트를 따라 기계적으로 도살되는 장면은 현대 축산업의 잔혹함을 SF적 과장 없이 리얼하게 재현한다.
미자가 금돼지 목걸이를 건네며 옥자의 생명을 "구매"하는 장면은 감정마저 거래의 대상이 되는 자본주의의 극한을 보여준다. 돈으로 사랑을 사는 이 거래는 모든 관계가 상품화되는 신자유주의 현실의 압축적 표현이다.
<옥자>가 8년이 지난 현재도 충격적으로 유효한 이유는 ESG 경영과 지속가능성 마케팅이 더욱 정교해졌지만 본질적 구조는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체육 시장의 급성장과 배양육 기술 발전은 슈퍼피그 프로젝트의 현실적 버전이다.
특히 팬데믹 이후 강화된 동물권 의식과 비건 문화의 확산은 옥자의 메시지를 더욱 현실적으로 만든다. 옥자의 단일 젖꼭지가 상징하는 생식 통제는 현실의 유전자 편집 기술과 직결되며, 조니의 살점 추출은 현재의 동물 실험과 구조적으로 동일하다.
<옥자>는 Netflix라는 글로벌 자본의 후원을 받아 제작되었으면서 글로벌 자본주의를 비판한다는 근본적 모순을 안고 있다. 이 역설은 현대 예술의 딜레마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자본의 지원 없이는 메시지 전달이 불가능하지만 자본의 지원을 받으면 메시지가 왜곡될 수 있다는 구조적 함정이다.
칸 영화제에서의 Netflix 로고에 대한 야유는 전통적 예술 제도와 새로운 유통 플랫폼 사이의 갈등을 상징한다. 영화관이 아닌 개인 디바이스로 관람되는 옥자의 운명은 영화 매체 자체의 변화와 연결된다.
<옥자>는 동물의 고통을 스펙터클로 소비하게 만드는 위선적 작품이라는 일각의 비판 또한 가능하다. 잔혹한 도축 장면을 시각적 충격으로 활용하면서 동물권을 주장하는 것은 결국 폭력을 오락화하는 모순된 행위라는 것에서다.
또한 서구 배우들의 과장된 연기와 한국적 정서의 결합이 부자연스럽다는 문화적 이질감도 지적된다. 글로벌 영화를 표방하면서도 결국 한국 중심적 시각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한계도 제기된다.
하지만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영화를 만드는 모순은 현실을 외면하는 이상주의보다는 전략적 활용으로 이해해야 한다. Netflix의 글로벌 유통망을 통해 더 많은 관객에게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면 모순을 감수할 가치가 있다는 현실주의적 판단이 유효할 것이다.
과장된 연기와 만화적 연출 역시 브레히트의 소외효과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의식적 선택이리라. 관객이 감정에 몰입하기보다는 비판적 거리두기를 통해 사회 구조를 성찰하게 만드는 정치적 영화 미학의 구현이다.
120분 동안 봉준호는 글로벌 자본주의의 감정적 조작과 생명의 상품화를 철저하게 폭로해낸다. 미자와 옥자의 순수한 우정조차 결국 자본의 마케팅에 활용되지만,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시스템의 모순이야말로 진정한 메시지다.
마지막에 미자가 새끼 돼지와 함께 강원도로 돌아가는 장면은 해피엔딩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더욱 절망적이다. 개인의 구원은 시스템 전체의 변화를 가린 채 계속 작동한다. 옥자는 구해졌지만 수천 마리의 다른 슈퍼피그들은 여전히 도축장으로 향한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그 고기를 먹으며 Netflix에서 옥자를 보고 감동한다. 바로 그 모순이야말로 현대 자본주의의 가장 정교한 메커니즘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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