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브스턴스>의 감독 코랄리 파르자(Coralie Fargeat)의 2003년 단편 전보(Le télégramme)는 12분이라는 러닝타임 안에 전쟁의 공포와 인간의 이기심, 그리고 운명의 잔혹한 아이러니를 압축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이후 <복수(Revenge, 2017)>와 <서브스턴스(The Substance, 2024)>로 세계적 주목을 받게 될 파르자의 첫 번째 걸작에서, 우리는 이미 그녀 특유의 "체계에 대한 분노"와 "인간 존재의 임의성"에 대한 통찰을 발견할 수 있다.
2차 대전 중 프랑스의 작은 마을, 두 여성 블랑쉬(Blanche, 미리암 보이에)와 피에레트(Pierette, 아를레트 테파니)가 우편배달부 맥로리(MacLaurie, 스테판 도스)의 도착을 기다리는 상황. 표면적으로는 극도로 단순한 설정이지만, 파르자는 이 "기다림"이라는 행위 자체를 실존적 불안의 총체로 전환시킨다.
영화의 핵심은 "죽음의 임의적 본성"과 "실존적 위협에 직면했을 때 나타나는 인간의 본질적 이기심"을 폭로하는 것이다. 두 어머니가 보이는 상반된 반응—블랑쉬의 히스테리적 수다와 피에레트의 침묵—은 같은 불안을 다르게 표현하는 방식의 대조다.
두 여성이 창밖을 내다보며 맥로리의 접근을 지켜보는 구도는 단순한 관찰이 아니라 "관찰당하는 자와 관찰하는 자"의 권력관계를 문제화한다. 창문은 안전한 내부와 위험한 외부를 분리하는 경계선이면서, 동시에 그 경계의 허약함을 드러내는 투명한 막이다.
맥로리가 걸어오는 마을의 단일 거리는 시간의 선형적 흐름을 공간화한 것이다. 그의 발걸음 하나하나는 운명의 시계바늘처럼 작동하며, 관객은 두 여성과 함께 그 "죽음의 행진"을 실시간으로 체험하게 된다.
"맥로리가 절름발이임을 조롱하며 그를 새디스트라고 부르는" 블랑쉬의 발언들은 불안이 어떻게 타인에 대한 공격성으로 전환되는지 보여준다. 그녀의 "점증하는 히스테리"는 단순한 감정 표출이 아니라 죽음의 공포에 대한 방어기제다.
대조적으로 피에레트의 "거의 침묵에 가까운" 반응은 같은 불안을 내재화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파르자는 이 웅변적인 침묵을 통해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공포의 깊이를 암시한다.
차를 마시며 대화하는 두 여성의 표면적 평온함은 곧 깨질 허상임을 암시한다. 파르자는 의도적으로 "평범한 이웃간의 차담"이라는 일상적 설정으로 시작해 관객의 경계를 늦춘다.
창밖에 나타난 맥로리의 모습과 함께 영화의 리듬이 변한다. 카메라는 두 여성의 시선과 동일시되며, 관객 역시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인 맥로리를 관찰하는 공범이 된다.
블랑쉬의 발언이 점점 더 공격적이고 비합리적으로 변해가는 과정에서, 파르자는 "문명의 얇은 베니어가 벗겨지는" 순간을 포착한다. 인간의 도덕적 우월감이 생존 본능 앞에서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 보여준다.
맥로리가 두 집을 지나쳐 계속 걸어가는 순간, 영화는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전환된다. 자막을 통해 밝혀지는 진실—"오늘의 전보는 맥로리 자신의 아들의 끔찍한 소식"—은 관찰자와 피관찰자의 위치를 전복시킨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에서처럼, 진실을 찾으려는 자가 결국 그 진실의 희생자가 되는 구조를 차용한다. 맥로리는 매일 죽음의 소식을 전하는 메신저였지만, 결국 자신이 그 메시지의 최종 수신자가 된다는 비극적 아이러니다.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사르트르의 명제가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어떻게 발현되는지 보여준다. 블랑쉬와 피에레트는 서로를 위로하는 듯하면서도 동시에 서로의 불안을 증폭시키는 존재들이다.
한편 '고도를 기다리며'의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처럼, 두 여성은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혹은 오지 않기를 바라는) 무언가를 기다리며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베케트와 달리 파르자는 "기다림의 대상"이 실제로 도착하며, 그 결과는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코랄리 파르자는 의도적으로 카메라의 움직임을 최소화함으로써 관객의 주의를 인물들의 심리적 변화에 집중시킨다. 이는 후기 작품들에서 보여줄 역동적 카메라워크와 대비되는 절제된 연출이다.
실내외의 자연광 대비를 통해 안전함과 위험, 알려진 것과 미지의 것 사이의 경계를 시각적으로 구현한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은 외부 세계의 위협이 내부로 침투하는 통로 역할을 한다.
또한 대사 외의 소음들—발걸음 소리, 문 여닫는 소리, 그릇 부딪치는 소리—이 긴장감 조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히 맥로리의 발걸음은 운명의 드러밍처럼 기능한다.
두 여성의 관계는 진정한 연대와 이기적 경쟁 사이에서 모호하게 흔들린다. 파르자는 이를 통해 "여성성"을 이상화하지 않으면서도 가부장제 시스템의 피해자로서의 여성들을 그린다.
전쟁터에 나간 남성들과 집에 남은 여성들이라는 전통적 젠더 역할 분담을 전제로 하지만, 파르자는 "기다리는 여성"의 수동성을 해체한다. 두 여성은 각자의 방식으로 능동적으로 불안에 대처한다.
영화를 보는 관객 역시 두 여성과 마찬가지로 맥로리를 "관찰"하며 누가 전보를 받을지 궁금해한다. 파르자는 이러한 관찰자의 위치가 결코 무죄하지 않음을 마지막에 폭로한다.
또한 히치콕식 서스펜스 기법을 차용하면서도, 그것이 타인의 고통을 소비하는 행위일 수 있다는 자기반성적 시각을 포함한다. 이런 관찰자의 윤리학은 <서브스턴스>에서도 선연하게 나타난다.
전쟁을 배경으로 한다지만 정작 전쟁의 참상이나 정치적 맥락은 거의 다뤄지지 않는다. 파르자는 전쟁의 직접적 묘사보다는 그것이 일상에 미치는 심리적 영향에 집중한다. 전쟁의 "부재"야말로 그 존재감을 더욱 강렬하게 느끼게 만드는 역설적 효과를 낳는다.
거슬릴 정도로 계획적이고 인위적인 결말의 반전은 운명의 임의성을 강조하는 장치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진짜 비극들 역시 종종 "너무 작위적이어서 믿기 어려운" 형태를 띤다. 파르자는 이러한 현실의 부조리함을 의도적으로 과장함으로써 더 깊은 진실에 도달한다.
전보(Le télégramme)는 코랄리 파르자의 영화 여정에서 하나의 "씨앗"과 같은 작품이다. 이후 <복수>와 <서브스턴스>에서 더욱 대담하고 화려하게 펼쳐질 그녀의 주제의식—시스템의 폭력성, 인간의 이중성, 희생자와 가해자의 역전 가능성—이 이미 완성된 형태로 배태해있다.
파르자의 진정한 통찰은 마지막에 드러난다. 결국 우리는 모두 맥로리다. 타인에게 불행의 소식을 전하는 메신저이면서 동시에 그 불행의 최종 수신자이기도 한 존재들. 그리고 우리 역시 블랑쉬와 피에렛처럼 "제발 우리가 아니길" 바라며 타인의 불행을 관찰한다. 12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파르자는 인간 존재의 이 근본적 모순을 그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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