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 구아다니노의 1999년 장편 데뷔작 'The Protagonists'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으로 세계를 매혹하기 18년 전, 이미 "관찰과 재현의 윤리"를 탐구한 메타텍스트적 걸작이다. 겉으로는 1994년 런던에서 벌어진 실제 살인사건—두 옥스퍼드 10대가 SAS 입대를 위한 가짜 통과의례로 이집트 요리사 모하메드 엘-사예드를 살해한 사건—을 다루는 다큐드라마처럼 보이지만, "페이크 다큐의 해부학"을 수행하며, 각 씬이 마치 "거울의 파편"처럼 기능하여 전체 진실을 반사하되 동시에 왜곡시킨다. 이 파편들이 결합하는 순간은 "결합의 불가능성" 자체를 깨닫는 순간이다.
이탈리아 팀의 런던 도착 장면은 전형적인 다큐멘터리의 "현장 진입" 문법을 따른다. 하지만 핸드헬드 카메라의 의도적으로 과장된 흔들림과 "너무 완벽한" 자연스러움은 이것이 "연출된 자연스러움"임을 폭로한다. 여기서 페이크 다큐의 첫 번째 파편이 생성된다: 관찰자 자신이 관찰당하고 있다는 사실.
피해자 가족과의 첫 인터뷰에서 구아다니노는 "진실을 말하는 얼굴"이라는 다큐멘터리의 핵심 믿음을 교묘히 훼손한다. 인터뷰이의 대답들이 지나치게 완성되어 있고, 감정 표현이 "연기처럼" 느껴지는 순간들을 의도적으로 노출시킨다. 이는 다큐멘터리에서 "진실성의 기표"로 기능하는 요소들이 얼마나 쉽게 조작 가능한지 보여준다.
살인 장면을 재연하는 과정에서 "뱀파이어 같은 인물"이나 비현실적 조명 등 환상적 요소들이 침투한다. 이는 "객관적 재현"이라는 다큐멘터리의 기본 전제가 얼마나 허구적인지 드러낸다. 현실을 재구성하려는 순간 그것은 이미 "픽션"이 되어버린다는 포스트모던적 통찰의 시각화다.
영화 곳곳에 삽입되는 저화질 VHS 영상들은 "기억 자체가 이미 매체화된 경험"임을 시사한다. 우리가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은 영화나 TV를 통해 학습된 "기억의 문법"에 의존한다. 따라서 진정한 기억과 매체를 통해 구성된 기억을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틸다 스윈턴이 카메라를 직시하며 던지는 발언들은 "누가 이야기하고 있는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제기한다. 그녀는 "틸다"라는 캐릭터인가, 아니면 틸다 스윈턴이라는 배우인가? 이러한 정체성의 유희는 다큐멘터리의 "화자의 투명성" 신화를 해체한다.
표면적으로는 "진실에 접근하는 순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관음증적 욕망이 탐사 저널리즘으로 포장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여기서 파편들은 "가짜 결합"을 이루며, 관객은 자신이 진실을 목격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
"피해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기"라는 명목으로 틸다가 피를 뒤집어쓰고 자동차에 앉는 장면은 "감정이입의 폭력성"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타인의 고통을 "체험"하겠다는 시도 자체가 얼마나 오만하고 불가능한지 보여주는 "결합의 실패" 순간이다.
극단적 폭력에 대한 대화 중 갑작스럽게 체인 레스토랑 외관으로 패닝하는 이 장면은 "일상성과 극단성의 기묘한 병존"을 포착한다. 파편들이 결합되려는 순간, 자본주의적 일상이 침투하여 그 결합을 방해한다. 이는 현대사회에서 "진정한 경험"이 불가능함을 시사한다.
영화는 틸다 스윈턴이 연기하는 이름 없는 이탈리아 여배우가 다큐멘터리 제작진을 이끌고 런던에 와서 사건을 "재구성"하는 과정을 그린다. 하지만 이 재구성은 점점 더 현실에서 멀어져가며, 관객은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허구인가?"라는 질문에 사로잡힌다. 구아다니노는 의도적으로 "환상적 요소들"—과장된 색채, 지나치게 단순한 세트, 비현실적인 크리스마스 장식들—을 삽입하여 재현의 인위성을 드러낸다.
"영화 속의 영화"라는 구조를 통해 구아다니노는 지속적으로 "이것은 영화다"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몽타주, 네거티브 필름, 의도적으로 저품질의 비디오 등을 사용함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매체의 물질성을 의식하게 만든다. 이는 페데리코 펠리니의 '8과 1/2'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보이지만, 더 급진적이고 불안정한 형태로 변형시킨다.
스윈튼은 이 영화에서 세 개의 다른 역할을 연기하며, 그녀의 "자기적 시선이 카메라를 응시하는" 순간들은 관객을 불편하게 만든다. 특히 그녀의 "기괴한 눈썹"이 이야기의 감정적 강도에 따라 색깔과 모양을 바꾼다는 관찰은 구아다니노가 추구하는 "인위적 자연주의"의 핵심을 보여준다.
영화 곳곳에 삽입된 VHS 품질의 몽타주는 단순한 기술적 선택이 아니다. 1990년대 말 아날로그 매체의 물질성을 통해 "기억의 불완전성"과 "재현의 한계"를 시각화한다. 디지털 시대 이전의 이 거친 질감은 관객으로 하여금 매체의 개입을 의식하게 만든다.
영화에 등장하는 기자는 두 살인자를 "각각 완전히 무해하지만 함께하면 치명적인 두 화학물질"이라고 묘사한다. 이는 "악의 평범성"에 대한 한나 아렌트의 통찰을 범죄 심리학적으로 확장한 것이다. 구아다니노는 "무엇이 대부분의 사람들을 살인으로부터 멈추게 하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문명의 얇은 베니어 아래 숨겨진 폭력성을 탐구한다.
두 살인자의 "SAS 가입에 대한 강박적 집착"은 '취약한 남성성'을 증명하려는 욕망으로 해석된다. 이들 사이의 "숨겨진 성적 긴장"이 살인의 진짜 동기일 수도 있다는 암시를 통해, 구아다니노는 호모소셜한 유대와 폭력 사이의 연관성을 탐구한다.
펠리니의영화 제작 과정 자체를 소재로 한다는 점에서 펠리니의 걸작 '8과 1/2'과 연결되지만, 구아다니노는 이를 더욱 "사브-데이비드 린치적 기괴함"으로 발전시킨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후반부는 린치의 영향을 받았지만, 더 실험적이고 소격적이다.
1920년대 시카고에서 벌어진 유명한 쾌락 살인 사건(레오폴드와 로에브 사건)과의 연관성이 언급되지만, 구아다니노는 이를 단순한 범죄 재현이 아닌 "재현 행위 자체에 대한 성찰"로 전환시킨다.
구아다니노는 페이크 다큐 장르의 각 구성요소를 "바이러스처럼" 변형시킨다:
이러한 변형을 통해 그는 장르 자체의 "DNA 조작"을 수행하며, 페이크 다큐가 아닌 "다큐에 대한 페이크"를 만들어낸다
구아다니노는 "창작 과정에 의해 세탁된 침입적 충동"이라는 개념을 통해 예술가들이 자신의 관음증적 욕망을 예술적 정당성으로 포장하는 메커니즘을 폭로한다. 이는 현재 소셜미디어 시대의 사생활 침해와 공적 관심 사이의 경계 문제와 직결된다.
"아이디어의 과잉"이라는 어떤 지적처럼, 이 영화에서는 "젊은 감독이 가능한 한 많은 아이디어를 탐구하려는 열망"이 느껴진다. 이는 데뷔작의 전형적 특징이지만, 동시에 구아다니노의 평생에 걸친 **"형식적 실험 정신"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The Protagonists'는 루카 구아다니노가 25세의 나이에 던진 "예술과 윤리"에 대한 근본적 질문들이 2025년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함을 보여준다. 넷플릭스의 트루 크라임 다큐멘터리들이 범람하고, 소셜미디어가 모든 사생활을 공적 스펙터클로 전환시키는 현재, 이 영화의 "재현의 윤리"에 대한 탐구는 더욱 절실해졌다.
구아다니노는 이후 'I Am Love', 'Call Me by Your Name', 'Suspiria', 'Bones and All', 'Challengers'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욕망과 윤리"의 문제를 탐구해왔지만, 그 출발점은 바로 이 데뷔작에서 제기된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어떻게 바라보는가?"라는 질문이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여전히 찾아지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지속하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마치 틸다 스윈튼이 카메라를 응시하며 관객에게 던지는 불편한 시선처럼, 우리는 여전히 그 질문의 무게 아래에서 꿈틀거리고 있다. 그리고 그 불편함이야말로 진정한 예술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소중한 선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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