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파르 파나히(Jafar Panahi)와 모즈타바 미르타마스브(Moztaba Mirtahmasb)의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This Is Not a Film)>는 케이크 속 USB라는 기발한 밀수 방식으로 2011년 칸 영화제에 도착한 순간부터 영화사적 전설이 되었다. 하지만 이 작품의 진정한 혁명성은 물리적 운송 방식이 아니라, 영화의 본질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을 76분이라는 압축된 시간 안에서 재정의하는 메타시네마적 천재성에 있다.
20년간 영화 제작 금지와 6년 징역형을 선고받은 파나히가 테헤란 아파트에서 가택연금 상태로 촬영한 이 작품은, 르네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초현실주의적 선언을 정치적 저항의 언어로 전유한다. 예술적 농담이 생존의 전략이 되고, 메타픽션이 현실 도피가 아닌 현실 직면의 수단이 되는 역설적 순간이다.
영화는 파나히가 아침 루틴을 수행하는 평범한 장면들로 시작되지만, 이 일상성 안에는 감옥의 미학이 숨어있다. 테헤란 아파트의 제한된 공간은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두 부랑자가 갇혀있는 실존적 무대와 구조적으로 동일하다.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서 시간을 채우는 행위들이 부조리극의 문법을 따른다.
카메라는 아파트의 모든 공간을 천천히 훑으면서, 각 방과 복도가 감독의 제한된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들임을 시각화한다. 창문은 바깥 세계로의 통로이지만 동시에 경계선이며, 문들은 다른 공간을 약속하지만 모두 같은 감옥 안의 칸막이에 불과하다는 공간적 아이러니를 구축한다.
특히 거실에서 침실로, 주방에서 발코니로 이동하는 파나히의 동선은 무작위가 아니라 계산된 안무다. 제한된 공간 안에서 최대한 많은 각도와 시점을 확보하려는 영화적 욕망이 일상적 움직임으로 위장되어 드러난다.
변호사와의 스피커폰 통화는 이 영화의 첫 번째 메타극적 순간이다. 보이지 않는 상대방과의 대화는 라디오 드라마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영화가 시각 매체라는 고정관념을 해체한다. 파나히는 스스로 "연기가 어색하다"고 평가하며 메타적 거리두기를 시도한다.
이 자기반영적 순간은 브레히트의 소외효과를 연상시킨다. 관객이 영화적 환상에 몰입하는 순간, 감독 자신이 개입해서 "이것은 연기다"라고 상기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소외는 예술적 기법이 아니라 정치적 현실의 직접적 반영이다.
파나히가 셀로테이프로 거실 바닥에 방의 경계를 표시하고 각본 속 소녀의 방을 재현하려는 시도는 이 영화의 핵심적 시퀀스다. 물리적 공간을 상상적 공간으로 전환시키는 이 의식적 행위는 연극의 가장 원초적 형태—빈 무대 위에서 상상력으로 세계를 창조하는—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테이프라는 가장 단순한 도구는 영화적 마술의 최소 단위가 된다. 2차원적 선이 3차원적 공간을 정의하고, 추상적 경계가 구체적 의미를 획득하는 순간은 아이젠슈타인의 몽타주 이론—서로 다른 요소들의 충돌에서 새로운 의미 생성—의 공간적 구현이다.
더 중요한 것은 파나히가 이 과정에서 "영화를 말로 설명할 수 있다면 왜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가?"라고 자문한다는 점이다. 이는 영화의 고유성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현재 상황—영화를 만들 수 없는 영화감독—에 대한 자조적 성찰이다.
파나히의 자작 영화 DVD들이 진열된 선반은 과거의 성취와 현재의 제약 사이의 시간적 괴리를 시각화한다. 흥미롭게도 라이언 레이놀즈 영화가 함께 꽂혀있다는 디테일은 하이 아트와 로우 아트의 경계 해체를 암시하면서, 영화감독도 일반적 소비자와 동일한 문화적 환경에 노출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자신의 영화를 DVD로 소유한다는 아이러니는 발터 벤야민의 "기계복제 시대의 예술작품" 이론과 연결된다. 창작자에게도 자신의 작품은 복제물의 형태로만 접근 가능하며, 원본이라는 개념 자체가 의문시된다. 더욱이 제작 금지 상황에서 과거작들은 현재의 불가능성을 증명하는 역설적 증거가 된다.
이웃이 데려온 시끄러운 개와 파나히의 애완 이구아나 사이의 긴장은 단순한 동물 에피소드를 넘어선 정치적 알레고리다. 개는 사회적 동물로서 집단성과 소속감을 상징하는 반면, 이구아나는 고립된 개체로서 감독의 현재 상황을 은유한다.
이구아나라는 선택 자체가 의미심장하다. 파충류는 냉혈동물로서 감정적 거리감을 상징하지만, 동시에 극한 환경에서의 생존력을 의미하기도 한다. 사막에서 살아남는 이구아나처럼, 파나히도 문화적 사막에서 예술적 생명력을 유지하려 노력한다.
카메라가 이구아나를 클로즈업할 때의 정적은 인간과 동물 사이의 의사소통 불가능성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파나히 자신과 외부 세계 사이의 소통 단절을 은유한다. 언어 없는 존재와의 교감 시도는 영화라는 매체의 비언어적 특성에 대한 성찰이기도 하다.
젊은 대학생이 방문하는 마지막 시퀀스는 세대적 연속성과 단절을 동시에 탐구한다. 학생은 파나히에게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경고하면서 현실적 제약을 상기시키지만, 동시에 젊은 세대가 기성세대를 보호하려는 역설적 상황을 만든다.
이 장면에서 파나히가 처음으로 아파트 밖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은 물리적 경계와 심리적 경계의 교차점이다. 실제 가택연금 상태인지 불분명한 상황에서, 자발적 감금과 강제적 감금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학생과의 대화는 미래에 대한 희망과 현재의 절망 사이의 변증법적 긴장을 만든다. 젊은이의 불확실한 미래는 파나히의 막힌 현재와 대비되면서, 시간과 가능성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유도한다.
파나히가 쓰레기 수거 청년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건물을 오르내리는 마지막 20분은 영화 전체의 클라이맥스다. 감독이 카메라 뒤로 물러나면서 "위험을 감수하고" 다시 영화감독이 되는 순간이다.
엘리베이터라는 밀폐된 공간은 사회적 계층의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그 만남의 한계를 드러낸다. 지적 노동자인 영화감독과 육체 노동자인 쓰레기 수거원 사이의 대화는 자연스럽지만 동시에 계급적 거리감을 완전히 해소하지는 못한다.
수직적 이동이라는 물리적 행위는 사회적 이동성에 대한 은유로 기능한다. 하지만 여기서 진정한 이동은 공간적이 아니라 시선적이다. 파나히가 자신의 처지를 벗어나 타인의 삶에 관심을 기울이는 순간, 예술가로서의 본능이 되살아난다.
"미래에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파나히의 질문에 청년이 "모르겠다"고 답하는 순간은 영화의 감정적 정점이다. 두 사람 모두 불확실한 미래를 마주하고 있지만, 그 불확실성의 성격은 완전히 다르다. 파나히의 불확실성은 정치적 억압에서 비롯되고, 청년의 불확실성은 사회경제적 제약에서 기인한다.
이 대화는 안톤 체홉의 단편들에서 자주 등장하는 "작은 사람들"의 서사를 연상시킨다. 거대한 역사적 변화 앞에서 개인의 미미함과 동시에 그 미미함 안에 깃든 존엄성을 포착하는 러시아 리얼리즘의 전통이다.
카메라가 청년의 얼굴을 클로즈업할 때, 관객은 이름도 모르는 한 개인의 실존적 무게를 직면한다. 이것이 바로 파나히 영화의 휴머니즘적 핵심—정치적 거대담론보다 개인적 일상의 소중함을 강조하는—이다.
제목 자체가 르네 마그리트의 유명한 작품 "Ceci n'est pas une pipe"에 대한 직접적 오마주라는 점은 명백하지만, 그 전유 방식은 단순한 인용을 넘어선다. 마그리트의 그림에서 부정은 철학적 유희였지만, 파나히의 부정은 정치적 생존전략이다.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라는 선언은 동시에 "그렇다면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을 제기한다. 전통적 영화 제작의 모든 조건—시나리오, 배우, 세트, 조명, 사운드 등—이 박탈된 상황에서도 영화적 경험이 가능한가? 이 질문에 대한 파나히의 답은 실천적이다. 만드는 것 자체가 답이다.
포스트모던 예술의 자기반영성이 여기서 정치적 급진성을 획득한다. "예술을 위한 예술"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예술", "자유를 위한 예술"로서의 메타픽션이다.
파나히가 카메라 앞에서 일상을 수행하는 행위는 미셸 푸코의 판옵티콘 이론과 직결된다. 보이지 않는 감시자의 존재 가능성이 개인의 모든 행동을 미시적으로 규율한다는 권력 메커니즘이 영화 제작 과정 자체에 내재되어 있다.
하지만 여기서 감시는 이중적이다. 국가권력의 감시 뿐만 아니라, 관객의 시선,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감시까지 중첩된다. 파나히는 감시당하는 자이면서 동시에 관찰하는 자, 촬영당하는 자이면서 동시에 연출하는 자라는 복합적 정체성을 체현한다.
이런 시선의 정치학은 로라 멀비의 "남성적 시선" 이론을 정치적 맥락으로 확장한다. 권력자의 시선이 피권력자를 객체화하는 메커니즘이 영화 매체 자체의 구조적 특성과 어떻게 결합되는지를 탐구한다.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가 2011년 제작되었지만, 2025년 현재의 디지털 환경에서 더욱 절실한 의미를 갖는다. 소셜미디어 플랫폼의 알고리즘 검열, 딥페이크 기술로 인한 진실성 논란, AI 생성 콘텐츠의 저작권 문제 등 새로운 형태의 표현 제약들이 등장했다.
파나히가 아날로그적 방식—DVD 플레이어, 셀로테이프, 직접 촬영—으로 영화를 만드는 과정은 디지털 플랫폼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 창작의 가능성을 시사한다. 기술적 미니멀리즘이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역설적 수단이 될 수 있다는 통찰이다.
특히 케이크 속 USB로 영화를 밀반출한 사건은 물리적 매체의 정치적 의미를 재조명한다. 클라우드 서버와 온라인 스트리밍이 지배적인 현재, 물리적 저장매체는 검열 우회의 마지막 보루가 될 수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동안 전 세계인이 경험한 강제적 격리는 파나히의 가택연금 상황과 구조적으로 유사했다. 제한된 공간에서의 창작 활동, 화상 회의를 통한 소통, 일상의 영화화 등이 보편적 경험이 되면서, 이 영화의 예언적 성격이 부각되었다.
"집콕" 문화와 홈 스튜디오 제작이 일상화된 현실에서, 파나히의 아파트 영화는 제약을 창의성으로 전환하는 모범 사례가 되었다. 할리우드의 대규모 제작이 중단된 상황에서, 개인적 공간에서의 소규모 제작이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에 대한 예상되는 비판은 예술작품이 아닌 정치적 선전물이라는 지적이다. 감독의 개인적 처지를 부각시켜 서구 관객의 동정심을 유발하려는 계산된 시도라는 비판도 가능하다.
하지만 이런 비판은 예술과 정치의 이분법적 사고에 기반한다. 파나히는 자신의 상황을 직접적으로 고발하지 않고, 영화 제작의 본질에 대한 성찰을 통해 간접적으로 문제를 제기한다. 이는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처럼 정치적 억압을 우화적으로 다루는 동유럽 문학의 전통과 연결된다.
더 중요한 것은 영화가 "이란 정부 비판"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술가와 권력 사이의 보편적 관계, 창작의 본질적 의미, 표현의 자유의 가치 등 초월적 주제들을 다루면서 특수한 정치적 상황을 인간적 보편성으로 승화시킨다.
또 다른 비판은 일반 관객을 고려하지 않은 엘리트 예술가의 자기만족적 실험이라는 지적이다. 메타영화적 기법과 철학적 성찰이 과도해서 대중적 접근성을 저해한다는 비판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진정한 혁신은 복잡한 이론을 단순한 형식으로 구현했다는 점이다. 76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 최소한의 기술적 장치, 일상적 소재 등을 활용해서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보편적 경험을 만들어낸다.
"영화를 말로 설명할 수 있다면 왜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고도로 이론적이지만, 셀로테이프로 바닥에 경계선을 그리는 행위는 극도로 구체적이고 직관적이다. 추상과 구상, 이론과 실천을 절묘하게 결합시키는 대중적 접근성을 확보한다.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는 "영화가 아닌 것"을 통해 "진정한 영화"의 본질을 탐구한 메타시네마의 걸작이다. 자파르 파나히와 모즈타바 미르타마스브는 모든 제약을 창작의 동력으로 전환시키면서, 예술의 불굴성과 인간 정신의 자유로움을 증명해냈다.
마그리트적 부정에서 시작된 이 영화는 궁극적으로 긍정에 도달한다.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라고 선언하면서 동시에 "그렇다면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실천적으로 제시한다. 영화는 거대한 제작비나 화려한 기술이 아니라, 인간의 경험을 타인과 공유하려는 근본적 욕망에서 출발한다는 진리를 발견한다.
테헤란 아파트라는 감옥 같은 공간에서 탄생한 이 작품은 역설적으로 가장 자유로운 영화 중 하나가 되었다. 물리적 제약이 정신적 해방을 가능하게 하고, 표현의 금지가 새로운 표현 방식을 창조해내는 변증법적 과정을 보여준다. 파나히의 카메라는 감시의 도구가 아니라 해방의 수단이 되고, 가택연금은 감옥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는 출발점이 된다.
2025년 현재, 표현의 자유가 새로운 도전에 직면한 시대에 이 영화는 더욱 절실한 메시지를 전한다. 진정한 예술은 어떤 억압도 완전히 봉쇄할 수 없으며, 창작의 욕구는 가장 불가능해 보이는 조건에서도 길을 찾아낸다는 희망적 증언이다. 케이크 속에 숨겨진 USB처럼, 자유의 씨앗은 가장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발아한다. 그리고 그 씨앗은 결코 썩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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