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리 압바시(Ali Abbasi)의 <어프렌티스>는 리처드 닉슨의 "나는 도둑이 아니다"라는 악명높은 선언으로 막을 올린다. 이 메타 텍스트적 서막은 단순한 시대적 배경 설정을 넘어서, 미국 정치사에서 공개적 거짓말이 제도화되는 분수령을 시각적으로 선포한다. 닉슨의 텔레비전 고백—그 자체로 거짓인—은 곧 등장할 도널드 트럼프와 로이 콘(Roy Cohn)의 "진실 부정하기", "절대 패배 인정하지 않기", "역공하기"라는 삼위일체 교리의 역사적 전사(前史)가 된다.
이란-덴마크 출신 감독이 미국적 괴물의 기원을 탐구한다는 것 자체가 의미심장한 외부자적 시선이다. 압바시는 인터뷰에서 "미국인들은 이런 영화를 만들 용기가 없다"고 냉소적으로 진단했는데, 이는 제국의 내부에서는 불가능한 성찰이 주변부의 시선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포스트콜로니얼한 통찰을 보여준다. <국경(Border)>, <홀리 스파이더(Holy Spider)>에서 인간의 어두운 면을 탐구해온 그의 필모그래피는 트럼프라는 "괴물"을 다루기 위한 완벽한 예행연습이었다.
제레미 스트롱이 연기하는 로이 콘의 첫 등장 장면은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메피스토펠레스가 파우스트 앞에 나타나는 순간의 현대적 번역이다. VIP룸의 어둠 속에서 젊은 트럼프를 응시하는 콘의 시선은 포식자가 먹이를 품평하는 냉혹한 계산을 담고 있다. 여기서 조명의 활용이 탁월한데, 콘은 항상 역광 속에 실루엣으로 등장하거나 측면 조명으로 반쪽 얼굴만 드러나는 키아로스쿠로 기법으로 촬영된다.
"공산주의자들이 나치보다 더 나쁘다"는 콘의 대사는 매카시즘의 광기를 일인칭으로 증언하는 동시에, 이분법적 사고가 어떻게 복잡한 현실을 단순화시키는지를 보여준다. 콘이 로젠버그 부부 처형을 자랑스럽게 회고하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그의 얼굴에 클로즈업되면서 미세한 표정 변화를 포착한다. 자부심과 죄책감이 동시에 스쳐가는 복합적 감정이 스트롱의 연기를 통해 섬세하게 드러난다.
압바시의 천재성은 콘을 단순한 악역으로 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홀로코스트 생존자 가정 출신의 유대인 변호사가 반공 히스테리에 편승해서 권력을 쟁취하는 자기모순적 상황은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테제를 시네마적으로 구현한다. 콘은 악마가 아니라 시스템이 만들어낸 괴물이며, 그 괴물성은 개인적 트라우마와 역사적 조건의 복합적 산물이다.
세바스티안 스탠이 연기하는 초기 트럼프는 무능력과 야망이 기묘하게 공존하는 공허한 캐릭터다. 첫 데이트 장면에서 상대 여성이 화장실을 핑계로 도망치는 설정은 코미디적 요소지만, 동시에 트럼프의 근본적 매력 없음을 시각화한다. 그가 권력자들의 이름을 줄줄이 외우는 모습은 진정한 권력이 아닌 권력에 대한 동경을 드러낸다.
의상 디자인에서도 계급적 열망이 시각화된다. 트럼프의 정장은 값비싸 보이지만 미묘하게 어색하다. 재단이 완벽하지 않고 액세서리들이 과도해서, 중산층이 상류층을 흉내내려는 어설픔이 의복을 통해 드러난다. 반면 콘의 의상은 절제되고 품격 있어서, 진짜 권력과 가짜 권력 사이의 차이를 시각적으로 대비시킨다.
트럼프가 아버지 프레드와의 관계에서 보이는 오이디푸스적 갈등도 중요한 심리적 동기다. 프로이트적 관점에서 보면, 트럼프의 무한한 자기 확장 욕구는 아버지를 넘어서려는 보상적 메커니즘이다. 트럼프 타워라는 거대한 팰릭 심볼을 통해 남근적 불안을 건축적으로 해소하려는 시도로 해석할 수 있다.
촬영감독 카스퍼 투센(Kasper Tuxen)의 비주얼 전략은 시대적 변화를 색채와 조명의 대비로 구현한다. 1970년대 장면들은 필름 느와르적 음모의 미학으로, 1980년대 장면들은 네오 플라스틱적 과시의 미학으로 촬영된다. 이는 단순한 시대적 고증을 넘어서 권력의 성격 변화를 시각화한다.
초기 뉴욕의 어둠침침한 클럽들과 우드 패널 사무실들은 권력이 은밀하게 거래되던 시대를 반영한다. 조명은 저조도이고 그림자가 많아서, 음모론적 분위기를 조성한다. 반면 1980년대 트럼프의 성공 시기는 파스텔 톤의 화려한 볼룸과 형광등으로 번쩍이는 카지노로 시각화된다. 권력이 공개적으로 과시되는 레이건 시대의 "탐욕은 선하다" 철학이 미장센에 반영된 것이다.
카메라 워크도 시대에 따라 차별화된다. 1970년대에는 핸드헬드 카메라의 불안정한 움직임이 음모의 긴장감을 증폭시키고, 1980년대에는 안정된 트래킹 샷과 화려한 크레인 워크가 성공의 도취감을 표현한다. 이런 기법적 변화는 트럼프 개인의 변화와도 대응된다: 불안한 도전자에서 자신만만한 성공자로의 심리적 전환이 카메라 언어를 통해 시각화되는 것이다.
로이 콘의 파티 장면에서 앤디 워홀이 카메오로 등장하는 것은 단순한 시대적 장식이 아니다. 1970년대 뉴욕의 예술계와 정치계의 혼재는 권력과 문화가 상호침투하던 시대의 상징이다. 워홀의 팩토리와 스튜디오 54로 대표되는 카운터컬처가 기성 권력과 복잡하게 결합하는 순간들이 시각적으로 포착된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젊은 트럼프가 이런 트랜스그레시브한 환경에서 극도로 불편해한다는 것이다. 압바시의 지적처럼, 트럼프는 근본적으로 "프루드(prude)"이며, 성적 해방이나 예술적 실험에 거부반응을 보인다. 스튜디오 54에서 모든 사람이 마약을 하고 섹스를 할 때, 그는 벽에 기댄 채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한다. 이는 트럼프의 보수적 본성과 권력에 대한 야망 사이의 모순을 드러낸다.
사운드 디자인도 이 장면에서 중요하다. 디스코 음악의 반복적 비트는 쾌락의 기계적 순환을 상징하지만, 트럼프 주변에서는 음량이 낮아지고 왜곡된다. 그의 심리적 거리감이 청각적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트럼프와 콘의 관계 변화는 공간적 위치의 미묘한 조작을 통해 시각화된다. 초기에는 콘이 상석에 앉고 트럼프가 옆자리에 앉는 수직적 관계였다면, 중기에는 나란히 앉는 수평적 관계로, 후기에는 트럼프가 상석을 차지하고 콘이 주변부로 밀려나는 역전 구조가 시각적으로 구현된다.
특히 콘이 AIDS 진단을 받고 몸이 쇠약해지는 시퀀스에서, 신체적 쇠퇴가 정치적 몰락과 동기화된다는 점이 잔혹하다. 마르고 창백해진 콘과 점점 살이 찌고 있는 트럼프의 신체적 대비는 권력 이동의 물리적 증거가 된다. 세포 수준에서의 변화가 권력 관계의 변화를 은유하는 생물학적 리얼리즘이다.
콘이 트럼프에게 버림받는 최종 장면에서, 카메라는 콘의 주관적 시점을 채택한다. 트럼프가 멀어지는 모습을 콘의 눈으로 바라보는 시점 쇼트는 배신의 고통을 관객이 직접 체험하게 만든다. 이는 공감의 윤리학을 시네마적으로 구현한 압바시의 휴머니즘이다.
마리아 바칼로바(Maria Bakalova)가 연기하는 이바나는 단순한 보조 캐릭터가 아니라 트럼프의 인간성을 시험하는 리트머스 페이퍼다. 트럼프와 이바나의 초기 로맨스는 진정한 사랑의 가능성을 암시하지만, 점차 소유욕과 통제욕으로 변질되는 과정이 세밀하게 추적된다.
가정폭력 장면—특히 강간 시퀀스—은 논란의 핵심이지만, 압바시는 이를 선정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카메라는 폭력의 순간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고, 이바나의 얼굴과 트럼프의 뒷모습을 교대로 클로즈업한다. 폭력보다는 폭력의 결과—깨진 신뢰와 파괴된 관계—에 초점을 맞춘 윤리적 연출이다.
이바나와 콘 사이의 미묘한 연대감도 흥미롭다. 두 사람 모두 트럼프에게 이용당하고 버려지는 운명을 공유하면서, 피해자들 간의 은밀한 공감이 형성된다. 이는 권력자 주변의 인물들이 어떻게 소비되고 폐기되는지를 보여주는 권력의 생태학이다.
트럼프의 약물 남용과 성형수술 중독은 자연적 자아를 인공적 자아로 대체하는 과정을 시각화한다. 암페타민을 복용하는 장면에서 클로즈업되는 트럼프의 눈동자는 인공적으로 확장된 동공을 보여주며, 이는 약물이 만들어내는 가짜 자신감의 물리적 증거가 된다.
머리카락 이식 수술 장면은 신체 개조를 통한 정체성 조작의 극한을 보여준다. 거울 앞에서 새로운 헤어라인을 확인하는 트럼프의 만족스러운 표정은 진정한 자아와 구축된 자아 사이의 경계가 완전히 소거된 순간을 의미한다.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 이론으로 해석하면, 이제 "진짜" 트럼프는 존재하지 않고 오직 "만들어진" 트럼프만이 실재한다.
약물의 효과가 떨어지는 장면들에서 트럼프의 불안감이 극대화되는 것도 중요하다. 인공적 자신감이 사라진 순간의 공허함과 두려움이 세바스티안 스탠의 연기를 통해 생생하게 전달된다. 이는 현대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는 자기 이미지 조작의 극단적 사례로도 읽힌다.
영화 후반부에서 트럼프가 기자에게 던지는 "만약 사업이 망하면 대통령이라도 해야겠다"는 농담은 예언적 아이러니의 극치다. 이 대사가 2024년 현재의 관객들에게 주는 소름끼치는 기시감은 역사적 아이러니의 시네마적 구현이다.
여기서 압바시의 연출력이 빛을 발한다. 이 대사를 전달할 때 트럼프의 표정은 완전히 진지하다. 농담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진심이라는 이중성이 스탠의 미묘한 연기를 통해 표현된다. 웃음과 섬뜩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복합적 감정을 관객에게 선사한다.
카메라는 이 순간 트럼프의 얼굴을 정면에서 롱테이크로 응시한다. 편집 없는 지속 시간을 통해 대사의 무게를 관객이 충분히 소화할 시간을 제공하는 동시에, 미래에 대한 불길한 예감을 증폭시킨다.
전화기의 진화 과정도 정교한 구조적 패턴을 보인다. 초기 검은색 회전식 전화기는 진정한 대화의 도구였지만, 중기 푸시 버튼 전화기를 거쳐 후기 휴대폰에 이르면서 소통 도구가 조작 도구로 변질된다.
결정적 장면은 콘이 병상에서 트럼프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전화 통화다. 여기서 카메라는 전화선을 따라 패닝하면서 물리적 연결을 강조하지만, 통화 내용은 정신적 단절을 드러낸다. 기술적 연결과 감정적 차단의 아이러니가 시각화되는 순간이다.
전화기의 색깔 변화도 의미심장하다. 검은색(진실) → 베이지색(중립) → 금색(허영)으로의 변화는 도덕적 타락의 색채학이다. 마지막 트럼프 타워 사무실의 금도금 전화기는 미다스의 저주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소품이다.
<어프렌티스>의 숨겨진 구조적 원리 중 하나는 음식과 먹기를 둘러싼 강박적 디테일들이다. 트럼프의 음식 섭취 방식이 영화 진행과 함께 점진적으로 변화하는 패턴을 추적하면, 성격 변화의 무의식적 지표들을 발견할 수 있다.
초기 르 클럽 장면에서 트럼프는 스테이크를 정중하게 포크와 나이프로 썰어서 먹는다. 문명적 식사법이다. 중기 콘의 집 파티에서는 핑거푸드를 손으로 집어먹기 시작한다. 후기 트럼프 타워에서는 햄버거를 두 손으로 잡고 게걸스럽게 먹는다. 문명에서 야만으로의 퇴화 과정이 식사법을 통해 시각화되는 것이다.
더 은밀한 패턴은 씹는 소리의 변화다. 초기에는 거의 들리지 않던 저작 소리가 후기에는 노골적으로 증폭된다. 트럼프가 사탕을 빨아먹는 "빨기 소리"가 아기가 젖꼭지를 빠는 소리와 유사하게 사운드 디자인되었다고 한다. 성인이 유아기로 퇴행하는 구강기적 고착의 음향적 표현이다.
트럼프의 약물 사용 패턴도 정교한 시각적 진행을 보인다. 처음에는 의사가 처방한 하얀 알약을 물과 함께 복용한다. 점차 알약의 개수가 증가하고, 물 없이 건삼키기 시작한다. 마지막에는 정체불명의 가루를 코로 흡입한다.
약물 용기의 변화도 흥미롭다. 처음의 갈색 처방전 병에서 투명한 플라스틱 용기로, 마지막에는 금속 케이스로 변화한다. 의료용에서 오락용으로, 치료에서 중독으로의 전이가 용기의 재질 변화를 통해 암시된다.
복용 장소의 변화도 의미심장하다. 처음에는 침실의 사적 공간에서, 점차 화장실, 사무실, 공공장소로 확장되면서 은밀한 행위가 일상화되고 공개화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르 레용 베르>의 분석에 따르면, 압바시는 색채 팔레트의 점진적 변화를 통해 캐릭터의 내적 변화를 시각화한다. 1970년대 장면들은 갈색, 베이지, 회색 등 중성적 색조가 지배하고, 1980년대로 갈수록 금색, 빨간색, 검은색 등 극단적 색조가 등장한다.
트럼프의 의상 변화도 이를 반영한다. 초기의 갈색 정장에서 중기의 네이비 정장을 거쳐 후기의 검은 정장으로 변화하면서, 색채의 어두워짐이 도덕성의 어두워짐과 동기화된다.
가장 극적인 색채 변화는 트럼프의 피부색 변화다. 초기의 자연스러운 피부색에서 점차 인공적 태닝으로 변화하는 과정이 메이크업을 통해 섬세하게 구현된다. 자연성에서 인공성으로, 진정성에서 연출성으로의 전환이 피부색 변화로 시각화되는 것이다.
후반부 트럼프 카지노 장면에서 네온사인의 과도한 사용은 1980년대 미국의 과시 문화를 극대화한 시각적 표현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네온사인의 깜박임 패턴이다.
불규칙한 깜박임은 불안정성을 암시하고, 과도한 밝기는 내적 공허감을 보상하려는 심리적 메커니즘을 시각화한다. 특히 "TRUMP" 글자의 네온사인이 고장나서 "RUMP"만 깜박이는 디테일은 허영의 허무함을 은유하는 절묘한 시각적 농담이다.
<어프렌티스>는 전통적 바이오픽의 관습을 의도적으로 해체한다. 선형적 서사와 인과관계에 의존하는 할리우드식 전기영화와는 달리, 압바시는 시공간적 참조점들을 의도적으로 흔들어놓는다. 신화, 사실, 픽션, 소문, 가십들이 뒤섞인 콜라주를 통해 트럼프라는 문화적 신화 자체를 문제화한다.
크라카우어의 사진 이론을 인용하면, 영화와 사진은 대상의 본질 포착에 실패하고 쉽게 조작될 수 있는 매체다. 압바시는 이런 매체의 한계를 전략적으로 활용하여 의미 생산 과정에 개입한다. 역사적 사실과 영화적 재현 사이의 괴리를 적극적으로 드러내면서, 진실이란 것이 얼마나 쉽게 조작되는지를 보여준다.
이는 트럼프 시대의 "대안적 사실(alternative facts)" 담론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진실의 가변성과 부정 가능성이 현재 정치 생태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비판적 인식이 영화의 형식을 통해 구현되는 것이다.
압바시가 가장 중요하게 던지는 질문은 "왜 우리는 트럼프에게 매혹되는가?"다. 영화를 보는 동안 관객들은 트럼프의 성공 과정에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약자가 강자를 이기고, 아웃사이더가 기성 질서에 도전하며, 꿈을 현실로 만들어가는 과정이 뇌리에 박힌 아메리칸 드림의 클리셰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관객들은 이런 매혹을 느끼는 자신에게 죄책감을 갖게 된다.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알고 있는 인물에게 끌리는 자신을 발견하는 불편함이다. 이는 압바시가 의도한 윤리적 딜레마로, 선악의 이분법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복잡한 인간성의 문제를 제기한다.
"이것은 트럼프 영화가 아니라 변신 영화다"라는 압바시의 발언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개인의 타락보다는 타락을 가능하게 하는 시스템에 초점을 맞춘 구조적 비판이다.
<어프렌티스>가 2024년에 제작되어 전 세계적으로 논란을 일으킨 것은 우연이 아니다. 트럼프의 재선 이후 더욱 시급해진 질문들—어떻게 이런 인물이 권력을 가질 수 있었는가, 무엇이 그를 가능하게 했는가—에 대한 역사적 답변을 제시하려는 시도다.
로이 콘의 삼원칙—공격하라, 부인하라, 절대 사과하지 마라—이 현재 정치 담론의 지배적 문법이 되었다는 현실이 이 영화의 현재성을 증명한다. 1970년대에 형성된 이 전략이 50년 후 글로벌 정치의 표준이 되었다는 것은 역사적 아이러니의 극치다.
소셜 미디어 시대의 정보 조작과 여론 조작 기법들도 콘의 전략의 디지털 진화 버전으로 볼 수 있다. "가짜 뉴스" 담론이나 "대안적 사실" 개념은 모두 콘이 트럼프에게 가르친 진실 부정 전략의 현대적 응용이다.
<어프렌티스>의 국제적 반향은 트럼프 현상이 단순히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인식을 반영한다. 유럽, 아시아, 남미 등 전 세계적으로 유사한 포퓰리스트 정치인들이 등장하고 있으며, 그들 대부분이 콘-트럼프 방식의 전략을 차용하고 있다.
압바시가 이란 출신이라는 사실도 의미심장하다. 권위주의 체제를 직접 경험한 감독의 시선에서 미국의 민주주의 위기를 바라보는 것은 서구 중심주의적 관점을 넘어선 보편적 통찰을 제공한다. 민주주의와 권위주의의 경계가 생각보다 모호하다는 불편한 진실을 외부자의 시선으로 폭로하는 것이다.
가장 많이 제기되는 비판은 영화가 트럼프를 지나치게 인간화했다는 것이다. "급진적 인본주의적 접근"을 표방한 압바시의 연출이 결과적으로 트럼프에게 변명의 여지를 제공했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이는 "인간화"의 의미를 오해한 비판이다. 압바시가 추구한 인간화는 동정이나 용서가 아니라 이해다. 괴물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이해해야만 미래에 유사한 괴물의 출현을 예방할 수 있다는 예방적 인식론이다. 악을 악마화하는 것은 쉽지만 문제 해결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더 근본적으로, 완전한 악이나 완전한 선은 예술적으로도 비현실적이다. 셰익스피어의 이아고나 도스토예프스키의 라스콜니코프가 위대한 캐릭터인 이유는 그들의 악행을 정당화해서가 아니라 악의 복잡성을 탐구했기 때문이다.
보수적 관점에서는 영화가 좌편향적이라는 비판을 제기할 수 있다. 특히 민주당 지지자들이 좋아할 만한 반트럼프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압바시의 접근법은 당파적 비판과는 차원이 다르다. 영화는 트럼프 개인보다는 그를 만들어낸 시스템 전체를 문제로 삼는다. 로이 콘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보수-진보를 막론하고 권력 엘리트들이 어떻게 부패하는지를 보여준다. 매카시즘의 광기나 레이건 시대의 신자유주의적 탐욕은 역사적 사실이지 정치적 해석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영화가 미국적 가치에 대한 근본적 성찰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아메리칸 드림의 어두운 면을 탐구하는 것이 반미가 아니라 오히려 더 나은 미국을 위한 자기 성찰이 될 수 있다.
<어프렌티스>는 단순한 트럼프 전기영화가 아니라 현대 문명에 대한 우화다. 개인의 타락을 통해 시대의 타락을 진단하고, 특수한 사례를 통해 보편적 문제를 제기하는 알레고리의 걸작이다.
알리 압바시의 예술적 성취는 도덕적 판단을 유보하면서도 윤리적 성찰을 유도하는 미묘한 균형감에 있다. 관객들로 하여금 쉬운 답 대신 어려운 질문들을 마주하게 만드는 용기 있는 영화다.
메타시네마적 차원에서 보면, 이 영화는 영화라는 매체가 현실을 재현하는 동시에 현실을 구성한다는 이중성을 자각적으로 활용한다. 트럼프라는 미디어가 만들어낸 캐릭터를 다시 미디어로 재현하는 순환적 구조 속에서, 진실과 허상의 경계는 더욱 모호해진다.
결국 <어프렌티스>가 제기하는 핵심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제자이고, 동시에 누군가의 스승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가르침을 받고 있으며, 어떤 가르침을 전하고 있는가? 로이 콘이 트럼프에게 가르친 파괴적 지혜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에게 전수되고 있다면, 우리는 그 연쇄 고리를 어떻게 끊을 것인가?
압바시의 카메라는 과거를 응시하지만, 그 응시는 현재를 향한 날카로운 성찰이다. 1970년대의 괴물이 2020년대의 현실이 되었듯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들도 미래의 괴물들을 잉태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 괴물들의 얼굴 중 하나는 분명 우리 자신의 얼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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