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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일(李相日) 감독의 <국보>는 "진짜가 되려는 가짜"의 역설적 진정성을 탐구하는 175분간의 장대한 명상이다. 요시다 슈이치(吉田修一)의 800페이지 대작을 영화적 언어로 재구성하면서, 이상일은 15년간 품어온 "여형(女形)"에 대한 의문을 현대 일본 사회의 혈통주의에 대한 근본적 성찰로 확장시킨다. =
야쿠자의 아들에서 가부키의 국보로 변신하는 기쿠오(吉沢亮)의 여정은 단순한 신분상승의 서사가 아니라, "순수한 일본인이란 무엇인가"라는 포스트콜로니얼 질문을 전통예술의 무대 위에서 펼치는 문화적 알레고리다. 재일조선인 3세인 이상일 자신의 정체성 고민이 기쿠오라는 캐릭터를 통해 투영되면서, 혈통과 재능, 전통과 혁신 사이의 변증법적 긴장이 영화 전체를 관통한다.
영화는 기쿠오의 생부가 야쿠자 항쟁으로 살해당하는 장면에서 시작하지만, 이 폭력의 기원은 곧바로 은폐된다. 하나이 한지로(渡辺謙)에게 인수되는 과정에서, 기쿠오는 "폭력의 아들"에서 "예술의 아들"로 상징적 전환을 경험한다. 하지만 이 전환은 완전하지 않다. 야쿠자의 혈통이라는 원죄는 가부키라는 정화 의식을 통해서도 완전히 소거되지 않는다.
와타나베 겐(渡辺謙)의 한지로는 전통적 일본 아버지상의 이상적 구현이면서, 동시에 그 한계를 드러내는 양가적 존재다. 그의 양자 수용은 자비로운 구원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기쿠오를 영원한 이방인으로 각인시키는 구조적 폭력이기도 하다. "진짜 아들" 슌스케(横浜流星)와의 대비를 통해, 혈통주의 사회에서 양자의 근본적 취약성이 지속적으로 부각된다.
요코하마 류세이가 연기하는 슌스케(俊介)는 기쿠오의 "완벽한 타자"다. 혈통으로는 완벽하지만 재능에서는 부족한 슌스케와, 재능은 뛰어나지만 혈통이 결여된 기쿠오 사이의 대칭구조는 일본 사회의 능력주의와 혈통주의 충돌을 시각화한다.
두 사람의 관계는 카인과 아벨의 현대적 변주이지만, 여기서 "살해"는 물리적이 아니라 상징적이다. 슌스케가 기쿠오의 예술적 성취에 질투를 느끼는 순간들에서, 이상일의 카메라는 미묘한 표정 변화를 포착하면서 혈통 특권의 내적 공허함을 드러낸다. 특권이 재능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잔혹한 진실 앞에서, 슌스케는 자신의 존재론적 기반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이상일이 15년간 품어온 "여형에 대한 의문"은 현대적 젠더 이론과 전통예술의 접점에서 폭발한다. 남성이 여성을 "연기"한다는 가부키의 기본 설정은 젠더가 본질이 아닌 수행이라는 주디스 버틀러의 이론을 350년 먼저 실천한 예술형식이다.
기쿠오가 여형으로 변신하는 장면들에서, 이상일의 미장센은 특별히 정교하다. 분장실의 거울들은 무한 반사를 만들어내면서, "진짜 기쿠오"가 어디에 있는지 구분할 수 없게 만든다. 화장을 하는 과정은 단순한 외적 변화가 아니라 존재론적 변신이며, 카메라는 이 신성한 의식을 종교적 숭고함으로 포착한다.
특히 "아코야(阿古屋)" 시퀀스에서 기쿠오의 몸짓과 목소리가 완전히 여성화되는 순간들은, 젠더라는 사회적 구성물의 인위성과 동시에 그 인위성이 만들어내는 초월적 아름다움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가짜 여성"이 "진짜 여성"보다 더 여성적일 수 있다는 포스트모던적 통찰이 전통예술의 무대 위에서 구현되는 것이다. 혹은 "가짜 일본인"이 "진짜 일본인"보다 더 일본인스러울 수 있다는.
가부키계의 세습제는 일본 사회 전반의 혈통주의를 압축한 메타포다. "살아있는 인간국보"라는 제도 자체가 전통의 보존이라는 명목 하에 사회적 위계를 고착화하는 장치로 기능한다는 비판적 시각이 영화 전반에 스며있다.
기쿠오와 슌스케의 관계는 이런 구조 안에서 필연적으로 비극적이다. 슌스케는 혈통의 무게에 짓눌려 자유롭게 예술을 추구할 수 없고, 기쿠오는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진정한 인정을 받기 어렵다. 두 사람 모두 세습제라는 시스템의 희생자이면서, 동시에 그 시스템을 재생산하는 공모자이기도 하다.
가부키가 대중예술에서 고급예술로 격상되는 역사적 과정은 관객층의 변화와 직결된다. 기쿠오가 처음 무대에 올랐을 때의 서민적 관객들과, "국보"가 된 후의 엘리트 관객들 사이의 차이는 예술의 사회적 기능 변화를 시사한다.
이상일은 관객 반응 장면들을 통해 예술 수용의 정치학을 탐구한다. 기쿠오의 예술이 진정으로 빛나는 순간들은 기성 비평가들의 평가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진정한 예술적 감동과 제도적 인정 사이의 괴리는 현대 예술계 전반의 구조적 모순을 반영한다.
175분이라는 러닝타임 안에 50년의 세월을 담아내는 이상일의 편집 전략은 타르코프스키의 "시간 조각" 이론을 연상시킨다. 시간의 흐름이 선형적이 아니라 나선형으로 구성되면서, 과거와 현재가 상호 참조하는 복합적 구조를 만들어낸다.
특히 기쿠오가 노년에 이르러 젊은 시절을 회상하는 장면들에서, 이상일은 플래시백과 현재 시점을 절묘하게 교차편집한다. 기억이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주관적 재구성이라는 포스트모던적 시간관이 영화 전체의 서사구조를 지배한다.
"소네자키 신쥬(曽根崎心中)"와 "사기무스메(鷺娘)" 같은 고전 연목들이 영화 전반에 걸쳐 반복되지만, 매번 다른 맥락에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같은 연목을 다른 시기에 공연하면서 드러나는 기쿠오의 내적 변화는 예술가의 성숙 과정을 시각화하는 정교한 장치다.
초연에서의 생경함, 전성기의 완숙함, 노년의 달관 등이 같은 연목 안에서 층위를 달리하며 드러나면서, 예술이 단순한 기법이 아니라 인생 전체의 축적임을 웅변한다. 이는 이상일 자신의 필모그래피 - <악인>, <분노>, <국보>로 이어지는 성숙 과정 - 의 메타적 반영이기도 하다.
"국보"라는 칭호는 국가권력이 부여하는 인위적 지위이면서, 동시에 예술가가 평생 추구하는 궁극적 목표이기도 하다. 이 모순적 이중성이 영화 제목이 품고 있는 아이러니의 핵심이다. 진정한 예술은 제도적 승인과 무관하게 존재하지만, 예술가는 사회적 인정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는 현실적 딜레마.
기쿠오가 마침내 "국보"가 되는 순간, 관객이 느끼는 것은 성취감이 아니라 공허함이다. 평생 추구해온 목표를 달성한 후의 허무함은 부르주아 사회의 모든 성공 서사가 공유하는 실존적 한계를 드러낸다. "국보"가 되었지만 진정한 만족을 얻지 못하는 기쿠오의 표정에서, 이상일은 제도적 성공의 본질적 공허함을 포착한다.
영화의 가장 급진적 통찰은 "가짜"가 "진짜"보다 더 진짜일 수 있다는 역설이다. 혈통 없는 기쿠오가 혈통 있는 슌스케보다 더 "가부키적"이 되는 과정은 진정성이라는 개념 자체의 해체를 의미한다.
"임포스터 신드롬"에 시달리던 기쿠오가 마침내 자신의 "가짜성"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오히려 창조적 동력으로 전환시키는 순간들이 영화의 진정한 클라이맥스다. 베니야민의 "아우라" 개념을 뒤집어, 복제가 원본보다 더 강력한 아우라를 발산할 수 있음을 증명한다.
재일조선인 3세인 이상일이 일본 전통예술을 소재로 영화를 만든다는 것 자체가 문화적 월경의 대담한 시도다. 기쿠오의 "혈통 콤플렉스"는 이상일 자신의 정체성 고민과 겹쳐지면서, 순혈주의 일본 사회에서 "진짜 일본인"이 되려는 이방인들의 보편적 경험으로 확장된다.
특히 현재 일본이 외국인 노동자 유입 등으로 다문화 사회로 변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 영화는 "일본적인 것"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제기한다. 전통이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는 재해석과 재창조의 산물이라는 메시지는 다문화 시대 일본 사회에 시의적절한 통찰을 제공한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전통예술이 큰 타격을 받은 현실에서, 이 영화는 전통예술의 사회적 의미를 재고하게 만든다. 가부키라는 "살아있는 전통"이 어떻게 현대 사회에서 생존하고 진화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모든 전통문화가 직면한 공통 과제다.
기쿠오의 예술관 - 전통을 맹목적으로 답습하지 않고 창조적으로 재해석하는 - 은 전통예술의 현대적 생존전략을 시사한다. "국보"가 되기 위해서는 전통을 보존해야 하지만, 진정한 예술가가 되기 위해서는 전통을 넘어서야 한다는 역설적 진리.

<국보>에 대한 예상되는 비판 중 하나는 일본 전통문화를 미화하고 찬양한다는 지적이다. 특히 재일조선인 감독이 일본 전통예술을 숭배하는 듯한 시각을 보인다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작품의 복합적 시각을 간과한 단순한 해석이다. 이상일은 가부키를 단순히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의 권력구조와 사회적 모순을 냉철하게 분석한다. 세습제의 폐해, 혈통주의의 잔혹함, 제도적 권위의 공허함 등이 영화 전반에 걸쳐 비판적으로 다뤄진다.
175분이라는 장대한 러닝타임과 가부키라는 전문적 소재로 인해, 이 영화가 일반 관객을 소외시키는 엘리트 예술이라는 비판도 가능하다.
하지만 일본에서 85억엔의 흥행수입을 기록하고 폭넓은 연령층의 관객을 동원한 현실은 이런 우려를 불식시킨다. 이상일의 연출력은 전문적 소재를 보편적 감동으로 승화시키는 데 있으며, 예술영화와 상업영화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국보>는 일본적 특수성과 인간적 보편성을 절묘하게 결합시킨 이상일의 집대성적 작품이다. 가부키라는 지극히 일본적인 소재를 통해 혈통과 재능, 전통과 혁신, 진정성과 인위성 등 모든 예술가가 직면하는 보편적 딜레마를 탐구한다.
재일조선인 감독이라는 이상일의 정체성은 이 작품에서 약점이 아니라 강점으로 작용한다. 내부자도 외부자도 아닌 경계인의 시선에서, 일본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동시에 그 사회가 품고 있는 예술적 가능성을 균형있게 포착한다.
영화의 마지막, 기쿠오가 무대 위에서 완전한 여형으로 변신하는 순간은 단순한 예술적 성취가 아니다. 그것은 모든 경계 - 남성과 여성, 진짜와 가짜, 일본인과 이방인 - 를 초월한 순수한 예술적 존재로의 승화다. "국보"라는 제도적 칭호를 넘어선, 진정한 의미의 "보물"이 되는 순간이다.
결국 <국보>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이것이다: 진정성이란 주어진 것인가, 아니면 만들어가는 것인가? 이상일의 카메라는 후자에 손을 들어준다. 혈통 없는 자가 혈통 있는 자보다 더 **진정한 예술가가 될 수 있다는 희망적 메시지는, 출신과 배경에 관계없이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가는 모든 이들에게 전하는 이상일의 따뜻한 **연대 의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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