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두 주데(Radu Jude)의 <지구 종말이 오더라도 너무 큰 기대는 말라(Nu Aștepta Prea Mult de la Sfârșitul Lumii)>는 폴란드 시인 스타니스와프 예지 레츠(Stanisław Jerzy Lec)의 격언을 제목으로 차용하면서 종말에 대한 기대마저 배반당하는 포스트아포칼립틱 일상의 시네마적 해부를 시도한다. 주데 자신이 밝혔듯이, 이 제목은 "모순을 제공하는" 이중적 기능을 한다: 종말에 대한 감각과 그에 대한 아이러니 사이의 변증법적 긴장을 통해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품는다.
2023년 로카르노 영화제 특별심사위원상을 수상한 이 작품은 일린카 마놀라체(Ilinca Manolache)가 연기하는 안젤라(Angela)라는 과로에 시달리는 프로덕션 어시스턴트를 중심으로, 현대 루마니아가 서구 자본주의에 흡수되면서 겪는 실존적 모순들을 167분이라는 마라톤적 러닝타임 안에 압축한다. 주데가 "축약(summation)"이라고 표현한 이 영화는 그의 기존 테마들—착취, 편견, 잔혹함—을 새로운 표현 방식으로 재탐구한 집대성적 작품이다.
영화는 안젤라의 욕설로 가득한 알람과 함께 시작되지만, 그녀의 휴대폰 벨소리는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EU 국가—다. 이 음향적 대조는 주데의 아이러니 전략의 첫 번째 신호탄이다. 유럽연합의 이상주의적 가치들이 안젤라의 저급한 일상과 충돌하는 순간,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개인적 현실 사이의 괴리가 음향적으로 시각화된다.
흥미롭게도 이 음향적 대조는 영화 전체를 관통한다. 안젤라가 받는 전화들—상사, 클라이언트, 어머니—마다 서로 다른 톤의 벨소리가 사용되지만, 모든 통화는 결국 스트레스와 피로를 가중시키는 결과로 귀결된다. "환희"를 약속하는 유럽적 이상이 현실에서는 노동 착취의 신호음이 되는 아이러니의 완성이다.
침실 장면의 미장센도 의도적 모순을 드러낸다. 헨리 필딩의 <톰 존스>와 프루스트의 작품들이 침대 옆에 놓여 있지만, 안젤라는 그런 고급 문학을 읽을 여유도 시간도 없다. 교양과 현실 사이의 간극이 소품 배치를 통해 시각적으로 구현되는 것이다.
주데의 가장 천재적 전략은 현재의 안젤라를 흑백으로, 1981년 의 장면들을 컬러로 대비시키는 시각적 구조다. 이는 단순한 시대적 대조를 넘어서 매체와 현실의 관계에 대한 메타 비판이다. "컬러풀한" 과거와 "무색의" 현재라는 역설적 설정을 통해, 사회주의 시대의 "유기적 삶"이 자본주의 시대의 "정글 같은 문명"보다 더 생동감 있었다는 도발적 주장을 시각적으로 전개한다.
안젤라가 TikTok 영상을 촬영할 때만 컬러가 등장한다는 디테일은 미디어의 허구성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이다. "진짜" 삶은 흑백이지만, "가짜" 페르소나는 화려한 컬러로 포장된다.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 이론이 TikTok 필터를 통해 구현되는 순간이다.
안젤라가 남성 인플루언서 "보비타(Bobita)"로 변신하는 TikTok 시퀀스들은 현대적 젠더 퍼포먼스의 가장 급진적 사례 중 하나다. 보비타의 대사들—앤드류 테이트를 패러디한 극우 남성주의 수사들—을 여성이 연기한다는 설정은 젠더 본질주의에 대한 해체적 비판이다.
중요한 것은 안젤라가 남성성을 "연기"할 때 가장 자유롭다는 역설이다. 여성으로서는 착취당하고 무시당하지만, 가짜 남성으로서는 수천 명의 팔로워를 얻고 영향력을 행사한다. "남성성"이 학습 가능한 연기 기법에 불과함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런 연기를 통해서만 사회적 권력에 접근할 수 있는 여성의 딜레마를 보여준다. 이는 가부장제 하에서 여성이 권력을 획득하는 유일한 방법이 남성성의 모방이라는 냉소적 통찰을 담고 있다.
흑백의 "진짜" 안젤라에서 컬러의 "가짜" 보비타로 전환될 때, 단순한 성별 변화를 넘어서 전체 현실의 질감이 바뀐다. 거친 디지털 필터의 인공적 광택은 소셜미디어가 제공하는 하이퍼리얼한 환상을 구현한다.
보비타의 TikTok을 보는 안젤라를 우리가 보는 삼중 구조는 장 보드리야르의 하이퍼리얼리티를 시각적으로 구현한다. 원본 없는 복사본들의 무한 증식 속에서, "진짜" 안젤라는 어디에 존재하는가? TikTok 필터로 변조된 이미지, 1981년 영화의 아카이브 푸티지, 현재 영화의 흑백 카메라 등 무수한 매개 층위들 사이에서 주체는 해체되고 재구성된다.
부자우(Buzău) 가는 길의 십자가 몽타주 장면은 <지구 종말이 오더라도 너무 큰 기대는 말라>의 감정적 절정이다. 안젤라가 "사고로 죽은 사람들의 십자가가 킬로미터보다 많다"고 설명한 후, 영화는 4분간 완전한 침묵 속에서 도로변 추모비들을 보여준다.
이 장면의 천재성은 속도의 정치학에 있다. 안젤라가 하루 종일 부스러기 같은 업무들 사이를 광속으로 이동하는 영화 속에서, 갑자기 시간이 정지한다. 죽음이라는 절대적 정적이 자본주의적 가속을 일시 중단시키는 순간이다. 폴 비릴리오의 속도학(dromology)이 로드무비의 문법을 통해 구현되는 것이다.
각각의 십자가들—돌로 만든 것, 금속제, 사진이 붙은 것, 꽃으로 장식된 것—은 개별적 비극들의 집합이지만, 동시에 시스템적 폭력의 증거들이기도 하다. 개인의 죽음이 사회적 죽음의 알레고리가 되는 순간이다.
이 장면의 힘은 대조법에 있다. 영화 전체가 안젠라의 광적인 에너지와 끊임없는 대화/욕설로 가득했다면, 갑자기 절대적 정적이 삽입된다. 삶의 소음과 죽음의 침묵 사이의 극적 대비가 관객에게 충격을 준다.
십자가라는 종교적 상징이 세속적 재난의 기념비가 되는 현실도 의미심장하다. 기독교적 구원의 약속이 자본주의적 착취의 현실 앞에서 무력해지는 순간을 시각적으로 구현한다.
작업장 안전 비디오를 위한 캐스팅 과정에서, 오비디우라는 장애인 노동자가 갑자기 회사의 책임을 폭로하는 장면은 영화의 정치적 핵심이다. "연출된 안전 캠페인" 중간에 터져나오는 진실한 목소리는 허위 의식을 찢고 현실이 분출하는 순간이다.
주데가 실제 장애인들을 캐스팅한 결정은 단순한 현실성 추구를 넘어선 윤리적 선택이다. "재현"이 아닌 "현존"을 통해, 자본에 의해 소비되고 폐기되는 몸들의 직접적 증언을 가능하게 한다. 이는 아르토의 잔혹극장 이론과 연결되는 신체적 진실성의 추구다.
니나 호스(Nina Hoss)가 연기하는 오스트리아 기업 임원 도리스 괴테는 "매력적 파시즘"의 현대적 화신이다. 작업장 안전 비디오를 위한 캐스팅 과정에서 가장 잔혹한 순간은 오스트리아 기업 임원 도리스 괴테가 장애인 노동자의 "외모"를 평가하는 장면이다. "너무 슬퍼 보인다"는 그녀의 코멘트는 인간의 고통을 마케팅 전략에 종속시키는 자본주의의 잔혹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안젤라가 회의실에서 핑거푸드에 침을 뱉는 행동은 직접적 반항이 불가능한 상황에서의 미시적 저항이다. "더러운" 신체가 "깨끗한" 자본을 오염시키는 순간은 하급 문화가 상급 문화를 전복하는 순간이라는 것.
1981년작 의 컬러 푸티지들이 현재의 흑백 영상과 교차편집되는 구조는 단순한 시대 비교를 넘어선 역사적 변증법을 구성한다. 사회주의 시대의 안젤라(도리나 라사르 Dorina Lazar 연기)가 "가부장제 사회에서 착취당하는 과로한 택시 기사"였다면, 현재의 안젤라는 "오스트리아 기업에 착취당하는 과로한 운전기사"다.
주데의 노스탤지어는 비판적이다. 사회주의를 미화하지 않으면서도, 자본주의가 약속한 "사회적 평등"이 얼마나 허구적인지 폭로한다. "유기적 삶"과 "정글 문명" 사이의 대비는 진보에 대한 신화를 해체하는 도구로 작동한다.
안젤라가 1981년 영화의 촬영 장소들을 재방문하는 설정은 공간이 정치적으로 구성된다는 앙리 르페브르의 공간 이론을 구현한다. 같은 물리적 장소가 다른 사회적 맥락에서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갖게 되는 과정을 시각적으로 추적한다.
부쿠레슈티의 도시 공간이 사회주의적 집단성에서 자본주의적 개별성으로 전환되는 과정은 건축물과 교통 체계의 변화를 통해 감지된다. 집단 교통에서 개인 자동차로, 공공 공간에서 사적 영역으로의 이행이 도시의 피부에 새겨진 흔적들로 드러난다.
주데가 1981년 영화의 푸티지를 재사용하는 방식은 아카이브의 정치성에 대한 메타 비판이다. 누가 과거의 이미지를 소유하고 재편집할 권리를 갖는가? 사회주의 시대의 국가 영화가 자본주의 시대의 독립 영화에 의해 "재활용"되는 과정은 문화적 소유권의 복잡성을 드러낸다.
하지만 주데의 전략은 단순한 전유가 아니라 비판적 대화다. 과거의 영상을 현재의 맥락에 배치함으로써, 두 시대 모두의 한계와 가능성을 동시에 검토한다. 이는 고다르의 <영화사>에서 시도된 영화적 고고학의 동유럽적 변주다.
독일 감독 우베 볼이 "버그킬러 영화"를 촬영하는 장면에서 카메오로 등장하는 설정은 영화산업의 상업적 논리에 대한 신랄한 풍자다. "세계 최악의 감독"으로 악명높은 볼의 존재는 "좋은 영화"와 "나쁜 영화"의 구분 자체가 시장 논리에 종속된다는 씁쓸한 현실을 환기한다.
안젤라와 볼의 만남에서, 진정한 예술가와 상업적 해커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둘 다 시스템의 일부이며, 둘 다 생존을 위해 타협해야 하는 처지다. 이는 아도르노의 문화산업 비판을 동시대적으로 업데이트한 통찰이다.
볼이 촬영하는 "B급 호러 영화"와 안젤라가 경험하는 "현실"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순간들이 중요하다. 둘 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우스꽝스럽지만" 동시에 "끔찍하게 진실"하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주데가 볼과의 만남을 설정한 것은 자기반영적 유머의 차원을 넘어선다. "진지한 예술영화" 감독인 주데 자신도 결국 "영화 시장"이라는 상업적 구조 안에서 작동해야 하는 딜레마를 인정하는 솔직함이다.
<지구 종말이 오더라도 너무 큰 기대는 말라>가 2023년에 제작되어 전 세계적 주목을 받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EU 확장 이후 20년이 지난 현시점에서, "유럽 통합"의 약속들이 얼마나 허구적이었는지 검증할 시점이 도래했기 때문이다. 루마니아가 여전히 솅겐 조약에서 배제되어 있다는 현실은 이 영화의 정치적 맥락을 제공한다.
"환희의 송가"가 벨소리로 울릴 때마다, 유럽적 이상과 루마니아적 현실 사이의 괴리가 음향적으로 강조된다. EU는 안젤라에게 "환희"가 아니라 추가적 착취의 구조일 뿐이다. 서유럽 자본이 동유럽 노동력을 소비하는 신식민주의적 관계가 "유럽 통합"이라는 이름 아래 은폐되는 것이다.
안젤라의 "제로 아워 계약" 상황은 플랫폼 자본주의 시대의 전형적 착취 구조다. "자유로운 개인사업자"라는 명목 하에, 실제로는 전통적 고용보다 더 가혹한 통제를 받는다. TikTok, 우버, 딜리버루 등으로 대표되는 긱 이코노미의 "자유"는 사실상 24시간 대기 상태의 극한 노동이다.
휴대폰이 목줄 역할을 하는 현실—상사의 전화에 즉시 응답해야 하고, SNS에서 페르소나를 유지해야 하며, GPS로 위치가 추적되는—은 감시 자본주의의 일상적 구현이다. 미셸 푸코의 판옵티콘이 휴대폰이라는 자발적 감시 장치를 통해 완성되는 것이다.
영화 제작 당시 우크라이나 전쟁이 진행 중이었다는 역사적 맥락은 "지구 종말"이라는 모티프에 구체적 현실성을 부여한다. "종말에 대한 감각"이 추상적 은유가 아니라 일상적 불안이 된 시대에서, 안젤라의 스트레스는 개인적 문제를 넘어선 집단적 트라우마의 증상이다.
동유럽이라는 지정학적 위치—서유럽과 러시아 사이의 완충지대—에서 느끼는 실존적 불안은 안젤라의 광적인 에너지 음료 섭취와 욕설 연발로 신체화된다. 역사적 트라우마가 개인의 몸에 각인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지구 종말이 오더라도 너무 큰 기대는 말라>에 대한 가장 예상되는 비판은 "지나친 비관주의"일 것이다. 167분 동안 거의 모든 등장인물이 착취당하거나 타락하며, 시스템적 대안은 제시되지 않는다는 지적이 가능하다.
하지만 주데의 "염세주의"는 절망과 구별되어야 한다. 마크 피셔의 "자본주의 리얼리즘" 비판—"세상의 종말은 상상할 수 있지만 자본주의의 종말은 상상할 수 없다"—을 영화적으로 구현하면서, 동시에 그 "불가능성" 자체를 문제화한다. 비관주의가 현실 인식의 첫 단계라는 관점이다.
더 중요한 것은 안젤라의 "저항"이 미시적 차원에서 지속된다는 점이다. 핑거푸드에 침 뱉기, TikTok에서의 캐릭터 놀이, 동료들과의 연대 등은 "큰 서사"는 아니지만 일상적 저항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국제 영화제에서의 성공이 "서구 관객을 위한 동유럽 엑조티시즘"이라는 비판도 제기될 수 있다. 루마니아의 "후진성"을 과장해서 서구의 우월감을 확인해주는 영화라는 해석이다.
하지만 이는 주데의 전략을 오해한 비판이다. 영화는 루마니아만의 문제가 아니라 글로벌 자본주의의 보편적 문제를 다룬다. 안젤라의 상황은 한국의 택배 기사, 미국의 우버 드라이버, 영국의 제로 아워 계약직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주변부"의 경험을 통해 "중심부"의 모순을 폭로하는 전략일 것이다.
<지구 종말이 오더라도 너무 큰 기대는 말라>는 종말론적 불안과 일상적 연속성 사이의 변증법을 탐구하는 21세기적 걸작이다. "지속가능한 세계 종말"이라는 헝가리의 한 비평은 이 영화의 핵심을 정확히 포착한다. 세계는 매일 끝나지만, 매일 계속된다.
주데의 천재성은 절망과 희망 사이의 이분법을 거부하는 데 있다. 안젤라는 착취당하지만 저항하고, 분노하지만 웃으며, 절망하지만 계속 살아간다. 이런 "희망 없는 희망"이야말로 포스트아포칼립틱 시대의 진정한 윤리학일지 모른다.
167분이라는 마라톤적 러닝타임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자본주의적 일상의 지루함과 반복성을 관객도 직접 체험하게 만드는 "잔혹한" 전략이다. 영화를 보는 것 자체가 안젤라의 하루를 살아내는 체험이 되는 것이다.
마지막에, 우리는 스타니스와프 예지 레츠의 격언으로 돌아간다: "지구 종말이 오더라도 너무 큰 기대는 말라." 이는 체념의 메시지가 아니라 각성의 메시지다. 종말에 의존하지 말고, 현재를 바꿔나가라는 역설적 희망의 선언이다. 주데의 카메라는 절망을 비추지만, 그 시선 자체가 희망의 행위다. 왜냐하면 보는 것이야말로 저항의 첫 걸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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