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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르고스 란티모스(Yorgos Lanthimos)의 2025년작 『부고니아』(Bugonia)는, 역설적이게도 가장 '현실적'인 캐릭터들을 통해 그의 가장 비현실적인 세계관을 완성시키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2003년 장준환 감독의 『지구를 지켜라!』를 원안으로 삼으면서도, 란티모스는 한국적 B급 정서를 21세기 미국적 고딕으로 치환하는 대담한 문화적 번역을 시도한다. 이는 단순한 리메이크를 넘어선, 일종의 '문명 간 정신분석학적 해석'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영화의 제목 '부고니아'(Bugonia)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유래한 용어로, 죽은 황소의 시체에서 벌떼를 생성하는 의식을 가리킨다. 베르길리우스의 『농사시』(Georgics) 제4권에 등장하는 이 신화적 재생 의례는, 죽음을 통한 생명 창조라는 원초적 모순을 내포한다. 란티모스가 이 고전적 메타포를 차용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인데, 그의 세계에서 인간은 언제나 '죽은 황소'이자 동시에 '새로 태어날 벌떼'의 잠재성을 품고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테디(제시 플레몬스, Jesse Plemons)와 도니(에이든 델비스, Aiden Delbis)가 초라한 목조 주택에서 훈련하는 장면과 미셸(엠마 스톤, Emma Stone)이 모더니스트 건축물에서 운동하는 장면을 교차편집하며 시작된다. 이러한 몽타주 기법은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의 변증법적 편집 이론을 연상시키는데, 두 공간의 대조를 통해 계급적 격차와 동시에 기묘한 유사성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테디와 도니의 '화학적 거세'와 미셸의 비타민 섭취가 병치되는 순간은 특히 인상적이다. 전자는 자발적 자기 파괴를 통한 '정신적 정화'를, 후자는 자본주의적 자기계발을 상징하는데, 이 둘이 본질적으로 '몸의 통제'라는 공통분모를 갖는다는 점에서 란티모스의 신랄한 통찰이 엿보인다고 여겨진다.
테디와 도니가 착용한 더러워진 은색 트레이닝복은 다층적 상징성을 갖는다. 1970년대 SF 영화의 미래적 의상을 패러디하면서도, 동시에 '가난한 자들의 우주복'이라는 아이러니를 창출한다. 이는 아마도 히치하이커를 위한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의 안내서』의 무해한 외계인 의상이나,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우주복을 염두에 둔 의도적 오마주일 수도 있을 것이다.
란티모스가 미셸을 심문할 때 사용하는 촬영 기법은 주목할 만하다. 테디는 낮은 앵글로, 미셸은 높은 앵글로 포착되는데, 이는 권력 관계의 전통적 시각언어를 교묘히 전복시킬 수도 있다. 특히 대머리가 된 미셸의 모습이 칼 테오도르 드라이어(Carl Theodor Dreyer)의 『잔 다르크의 수난』에서 르네 잔 팔코네티(Renée Jeanne Falconetti)를 연상시킨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이러한 시각적 인용은 단순한 미학적 오마주를 넘어선 존재론적 질문을 제기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누가 진정한 '순교자'인가? 음모론에 사로잡힌 변두리 양봉업자인가, 아니면 거대 제약회사의 CEO인가? 란티모스는 이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변을 회피하면서, 오히려 관객으로 하여금 '악'의 정의에 대해 성찰하게 만든다.
영화는 다음 월식까지 3일이라는 시한부 구조를 채택한다. 각 날이 하나의 막을 구성하면서, 지구가 점점 평평해지는 카운트다운 카드가 삽입되는데, 이는 현대의 평면지구설 음모론을 비꼬는 동시에 세계의 점진적 붕괴를 암시하는 메타포로 읽힐 수 있을 것 같다.
달의 위상에 따른 시간 설정은 고전 비극의 '24시간 단일성'을 연상시키면서도, 동시에 루나틱(lunatic)이라는 어원적 연관성을 통해 광기의 주기성을 암시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는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이나 『오셀로』에서 달이 갖는 변화무쌍한 상징성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테디가 벌을 기르는 설정은 단순한 직업적 배경을 넘어선 철학적 알레고리다. 벌은 지구의 '위대한 수분매개자'로서 생태계의 균형을 유지하는 핵심적 존재이지만, 동시에 완전한 집단주의 사회를 구현하는 곤충이기도 하다. 테디가 벌의 '조화롭고 완벽하게 균형 잡힌 사회'를 숭배한다는 설정은, 개인주의적 음모론자가 역설적으로 집단주의적 이상을 꿈꾸는 모순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는 아마도 모리스 마테를링크(Maurice Maeterlinck)의 『벌의 생활』이나 칼 폰 프리쉬(Karl von Frisch)의 벌 춤 연구를 염두에 둔 설정일지도 모르겠다. 벌의 의사소통 체계가 인간의 언어보다 오히려 더 정확하고 효율적이라는 과학적 사실은, 인간 문명에 대한 근본적 회의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미셸의 제약회사가 생산하는 화학물질로 인해 벌들이 집단 폐사한다는 설정은 실제 현실과 맞닿아 있다. 네오니코티노이드계 살충제가 꿀벌 집단폐사증후군(CCD, Colony Collapse Disorder)의 주요 원인 중 하나라는 과학적 사실을 고려할 때, 이는 SF적 상상력이 아닌 다큐멘터리적 현실 고발에 가까울 수도 있을 것이다.
미셸을 '안드로메다 종족'으로 의심하는 테디의 망상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증폭된 사회적 불신과 소외감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당신은 일종의 반향실(echo chamber) 안에 있어요"라는 미셸의 대사는 단순히 테디를 향한 것이 아니라, 그녀 자신의 기업적 엘리트 세계에도 동등하게 적용되는 자기반영적 진단이다.
란티모스의 세계에서는 "본질적으로 모든 사람이 안드로메다인"이라는 관점이 관철된다. 이들은 자신만의 내적 언어를 구사하며, 마땅히 해야 할 행동을 거의 하지 않는다. 이러한 보편적 외계성은 알베르 카뮈의 부조리 철학이나 장-폴 사르트르의 타자 이론을 연상시키는 실존주의적 통찰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미셸이 구사하는 '기업체 언어'(corporate-speak)는 테디에게 외계적으로 느껴질 뿐만 아니라 관객에게도 일종의 언어적 소외를 유발한다. 이는 조지 오웰의 『1984』에서 등장하는 '신어'(Newspeak)의 현대적 변주이면서, 동시에 위르겐 하버마스가 비판한 '시스템에 의한 생활세계의 식민화' 현상을 구현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장준환의 원작 『지구를 지켜라!』가 IMF 외환위기 이후 한국 사회의 불안을 B급 SF로 포장했다면, 란티모스는 이를 트럼프 시대 이후 미국의 사회적 분열과 음모론 확산이라는 맥락으로 재배치한다. 이는 단순한 문화적 이식이 아닌, 두 사회가 공유하는 '신자유주의적 불안'의 보편성을 드러내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흥미롭게도 윌 트레이시(Will Tracy)의 각본은 원작의 플롯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석세션』(Succession)과 『더 메뉴』(The Menu)에서 보여준 기업 문화에 대한 신랄한 시선을 가미한다. 이는 아마도 아리 에스터(Ari Aster)가 프로듀서로 참여한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인데, 그의 『에딩턴』(Eddington)이 팬데믹 음모론을 정면으로 다룬 것처럼 말이다.
로비 라이언(Robbie Ryan)의 35mm 촬영은 디지털의 차가운 완벽함을 거부하고 아날로그적 따뜻함을 복원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거친 입자감과 의도적으로 '더럽히는' 미학은 테디와 도니의 계층적 위치를 시각적으로 구현하면서도, 동시에 1970년대 음모론 스릴러의 장르적 관습을 소환한다.
이는 아마도 앨런 J. 파큘라(Alan J. Pakula)의 『대통령의 음모』(All the President's Men)나 시드니 폴락(Sydney Pollack)의 『콘도르』(Three Days of the Condor) 같은 고전적 음모론 영화들에 대한 의식적 오마주일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란티모스는 이러한 장르적 기대를 충족시키는 대신 교묘히 전복시키는 방향을 택한다.
"'외계인이 우리 종족의 썩은 내를 심판한다'는 영화가 그리스 영화감독에 의해, 미국을 배경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이는 고전 그리스 비극의 전통 - 즉 인간의 오만(hubris)이 불러오는 파멸을 외부자의 시선으로 관찰한다는 - 을 현대적으로 계승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란티모스가 제시하는 진단은 냉혹하다. "어떤 힘도 인간의 이기심만큼 파괴적이지 않으며, 우리가 그 자아중심성을 버릴 수 없다면, 아마도 우리는 종족으로서 단순히 소멸할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부고니아' 의례가 암시하듯, 이 영화는 완전한 절망보다는 '죽음을 통한 재생'의 가능성을 열어둔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테디의 광기와 미셸의 냉소 사이 어딘가에서, 새로운 형태의 소통과 이해가 싹틀 수도 있을 테니까 말이다. 다만 그 '벌떼'가 과연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을지는 여전히 의문이지만.
결국 부고니아는 란티모스가 도달한 성숙의 정점일 수 있다. 초기작의 실험적 도발성과 최근작의 대중적 접근성을 절묘하게 결합하면서도, 어느 쪽에도 완전히 기대지 않는 균형감각을 보여주기 때문. 이는 '현대적 고전'의 조건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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