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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게이 로즈니차(Sergei Loznitsa)의 2025년작 『두 검사』(Два прокурора, Two Prosecutors)는, 역설적이게도 가장 '희망적'인 인물을 통해 가장 '절망적'인 체제의 본질을 폭로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게오르기 데미도프(Georgy Demidov)의 미발표 중편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이 영화는, 14년간 굴라그에 수감되었던 작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쓰여진 텍스트를 영화적으로 번역하는 작업이다. 흥미롭게도 데미도프의 원고는 1980년 KGB에 의해 압수되었다가 1988년에야 그의 딸의 청원으로 반환되었고, 2009년에야 비로소 출간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이 이야기 자체가 소비에트적 억압의 살아있는 증언임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1937년 스탈린 숙청의 절정기라는 시공간적 좌표를 명확히 제시하면서 시작된다. 감옥 내부의 거대한 철문이 열리는 오프닝 쇼트는, 단순한 공간적 진입이 아닌 '지옥의 문'으로의 하강을 암시하는 메타포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는 아마도 로댕의 조각 『지옥의 문』이나 단테의 『신곡』 지옥편의 유명한 문구 "이곳에 들어서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영화의 첫 번째 장면에서 보여지는, 늙은 죄수가 스탈린에게 보낸 탄원서들을 불 속에 던지는 행위는 단순한 문서 폐기를 넘어선 상징적 차원을 갖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편지들은 "공산당원들이 스탈린에게 보낸" 것들로, 반복적이고 절망적인 내용들로 가득하다. 그중에서도 피로 쓰여진 한 통의 편지가 우연히(혹은 필연적으로) 소각을 피하게 되는 순간은, 발터 벤야민이 말한 '역사의 천사'적 시선을 연상시킨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피로 쓰인 편지의 물질성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고 여겨진다. 잉크나 연필 대신 자신의 피를 사용한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살과 피'를 바쳐 쓴 절망적 증언이기 때문이다. 이는 아마도 중세 수도원의 일루미네이티드 매뉴스크립트나, 더 나아가 기독교의 순교 전통과도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젊은 검사 알렉산드르 코르네프(Aleksandr Kuznetsov)는 "권투선수 같은 얼굴과 꿰뚫어보는 듯한 회의적 시선"을 가진 인물로 묘사된다. 이러한 외적 묘사는 우연이 아닐 텐데, 그의 물리적 강인함과 정신적 순수함 사이의 아이러니를 강조하기 때문이다. 새로 임명된 젊은 검사로서 그가 보여주는 원칙주의는, 체제에 대한 맹신이 아닌 법과 정의에 대한 순수한 신념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코르네프라는 인명도 흥미롭다. 러시아어로 '뿌리'를 뜻하는 '코렌(корень)'에서 파생된 성씨로, 그가 체제의 '뿌리'를 파헤치려는 인물임을 암시하는 작명일 수도 있을 것이다. 동시에 그 자신이 결국 '뿌리 뽑힐' 운명임을 예고하는 아이러니컬한 명명이기도 할 것이다.
감옥에서 만나게 되는 전직 검사 스테프냐크(Aleksandr Filippenko)는 "한때 코르네프의 법과대학 축하연에서 '위대한 볼셰비키 진리'에 대해 연설했던 존경받는 지식인"이었다. 이러한 설정은 소비에트 체제가 자신의 가장 충실한 지지자들을 어떻게 삼켜버리는지를 보여주는 완벽한 알레고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스테프냐크가 보여주는 "끔찍한 상처들"과 그의 증언은, 단순히 개인적 고통을 넘어선 체제적 폭력의 물리적 증거다. 그가 NKVD의 잔혹행위를 "소비에트 사회를 약화시키려는 사보타주꾼들의 작업"이라고 해석하는 순간은, 피해자조차 가해 체제의 논리에 포섭되어버린 비극적 상황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로즈니차의 카메라는 코르네프가 "연속적인 딱딱한 의자들에 앉아 기다리는" 모습을 집요하게 포착한다. 이러한 시각적 반복은 단순한 시간 지연이 아닌, 관료주의적 시간의 본질을 드러내는 장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카프카의 『성』에서 K가 경험하는 무한 연기와 지연의 악순환과 매우 유사한 구조를 보인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감옥 관리들의 "짜증스러운 회피와 지연 전술"은, 악의가 아닌 시스템 자체의 관성으로 작동한다는 점에서 더욱 무서울 수도 있다. 이들은 적극적으로 진실을 은폐하려 하지 않는다. 그저 '절차'를 따를 뿐이고, 그 절차 자체가 진실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구조로 설계되어 있을 뿐이다.
코르네프가 모스크바로 향하는 기차 여행 중에 듣게 되는 참전용사(역시 Filippenko가 1인 2역)의 이야기는 "레닌과의 만남에 대한 서사"로, "plus ça change(변하는 것이 많을수록 똑같은 상태가 된다)"식의 경고가 되어야 할 우화라고 평가된다. 이는 아마도 소비에트 체제의 본질이 스탈린 시대에 갑자기 변질된 것이 아니라, 이미 레닌 시대부터 내재되어 있었음을 시사하는 설정일 것이다.
이러한 액자식 서사 구조는 단순한 시간 때우기가 아닌, 역사의 순환적 반복성을 보여주는 장치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과거의 이야기가 현재의 예언이 되고, 현재의 체험이 미래의 경고가 되는 구조 말이다.
모스크바의 당사 건물은 "병적인 녹색 패널링과 소극적-공격적 레닌주의 도상학"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공간적 묘사는 단순한 배경이 아닌, 그 자체로 하나의 '캐릭터'로 기능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색채 심리학적으로 볼 때 녹색은 안정감을 주는 색이지만, '병적인' 녹색은 오히려 불안감과 메스꺼움을 유발한다.
특히 "끝없어 보이는 계단 꼭대기"에 있는 비시닌스키의 사무실로 향하는 코르네프의 여정은, 바벨탑 신화나 단테의 연옥편을 연상시키는 수직적 상승 구조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 상승은 구원이 아닌 더 깊은 파멸로 향하는 역설적 하강이기도 하다.
실존 인물인 안드레이 비시닌스키(Anatoly Beliy)는 "1930년대 쇼 트라이얼의 주요 설계자이자 스탈린의 검찰총장"으로, 그의 이름만 들어도 코르네프의 운명이 결정되었음을 관객은 알 수 있다. 이는 그리스 비극의 코러스적 기능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역사를 아는 관객은 주인공보다 먼저 파국을 예견하게 되는 것이다.
비시닌스키가 "표현 없는" 인물로 묘사되는 점은 특히 흥미롭다. 악의 평범성, 혹은 진부함(banality of evil)에 대한 한나 아렌트의 분석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거대한 악은 광기어린 열정이 아니라 무표정한 관료적 효율성을 통해 실현되기 때문이다.
영화가 리가의 폐감옥에서 촬영되었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발트 3국은 소비에트 치하와 독립, 그리고 다시 점령과 해방을 겪은 지역으로, 20세기 전체주의의 상흔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실제 감옥에서 촬영함으로써 로즈니차는 일종의 '장소 특정적(site-specific)' 영화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벽의 칙칙한 녹색과 침묵의 무게"가 만들어내는 "밀실공포증"은, 단순한 미술 디자인을 넘어선 공간의 기억을 활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과거의 고통이 스며든 물리적 공간이 현재의 서사에 역사적 무게감을 부여하는 것이다.
촬영감독 올레그 무투(Oleg Mutu)의 "완성된 구도들"은 로즈니차 특유의 정적 카메라 워크와 결합되어 독특한 시각적 리듬을 만들어낸다. "대화 중심적 장면들이 실시간으로 전개"되는 방식은, 관객으로 하여금 코르네프와 동일한 시간적 경험을 하게 만드는 효과를 갖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결코 열리지 않는 문들과 전략적 무관심 이상은 드러내지 않는 얼굴들"에 머무르는 카메라의 시선은, 관음증적 쾌락을 거부하는 윤리적 태도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는 아마도 로베르 브레송의 '시네마토그라프' 이론이나 타르코프스키의 '조각된 시간' 미학과도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로즈니차 자신이 밝힌 "이것은 역사적 영화가 아니다. 이것은 지금에 관한, 우리의 현실에 관한 영화다"라는 발언은 이 작품의 핵심적 의도를 보여준다. 1937년의 이야기가 2025년의 현실과 어떻게 공명하는지, 그리고 전체주의적 메커니즘이 어떻게 형태를 바꿔가며 반복되는지를 탐구하는 것이 진정한 목적이라는 것이다.
특히 "제도들의 침식, 시민적 용기의 취약성, 그리고 현대 권위주의 체제들에서 발견되는 지속적인 공포 메커니즘"에 대한 탐구라는 관점에서, 이 영화는 단순한 역사적 고발을 넘어선 동시대적 진단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게오르기 데미도프의 원작이 40년 동안 침묵을 강요당했다가 작가 사후에야 출간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소비에트적 억압의 지속성을 보여준다. 로즈니차의 영화화 작업은 단순한 각색이 아닌, 억압당한 목소리에 대한 일종의 '문학적 정의' 실현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데미도프가 굴라그를 "오븐 없는 아우슈비츠"라고 표현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홀로코스트와 소비에트 테러 사이의 구조적 유사성을 지적하면서도, 동시에 그 차이점을 명확히 하는 비교이기 때문이다.
냉소적으로 보자면, 로즈니차의 이런 '현재적 해석'이 자칫 역사적 특수성을 희석시킬 위험성도 없지 않다. 1937년의 스탈린주의 테러와 21세기의 다양한 권위주의 체제들 사이에는 분명 질적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감독이 추구하는 것은 아마도 표면적 유사성이 아닌, 권력이 개인을 파괴하는 메커니즘의 구조적 연속성일 것이다.
결국 『두 검사』는 로즈니차라는 작가가 다큐멘터리에서 극영화로 돌아오면서 도달한 성숙의 결실일 수도 있을 것이다. "정치적 영화 제작자로서는 가장 미묘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분명히 가장 강력한" 작가 중 하나라는 평가는, 그의 직접적 메시지 전달 방식에 대한 비판과 동시에 그 효과에 대한 인정이기도 하다.
코르네프의 이상주의가 비시닌스키의 냉소주의와 만나는 순간, 관객은 선의가 어떻게 시스템의 일부가 되어버리는지를 목격하게 된다. 이는 아마도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질문 중 하나일 것이다—과연 시스템 내부에서의 개혁은 가능한가, 아니면 모든 선의는 결국 체제 유지에 기여하게 되는가?
피로 쓰인 그 편지는 결국 읽혀졌지만, 읽혀짐으로써 오히려 더 큰 파괴를 불러왔다. 이것이야말로 로즈니차가 포착한 전체주의의 가장 교활한 메커니즘일 수도 있을 것이다—희망 자체를 무기로 사용하는 시스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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