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동(李滄東)의 2018년작 『버닝』은, 역설적이게도 '평범한' 인물들을 통해 '비범한' 사회적 진실을 폭로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단편 「헛간 태우기」(1983)와 윌리엄 포크너(William Faulkner)의 「헛간 태우기」(1939)라는 두 겹의 문학적 레이어를 거쳐 도달한 이 영화는, 단순한 각색을 넘어선 일종의 '문화적 번역' 혹은 '계급적 재해석'의 성격을 갖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제목 '버닝'이 품고 있는 삼중적 함의는 이미 작품의 복합성을 예고한다고 여겨진다. 물리적 연소로서의 '태움', 정신적·감정적 격정으로서의 '불타오름', 그리고 사회적 분노로서의 '소각'이 동시에 작동하는 구조 말이다. 이창동이 무라카미의 "미니멀리스틱한 스토리텔링과 미스터리한 요소들"에 매력을 느꼈다고 밝힌 바와 같이, 이는 기존 텍스트의 '여백'을 영화적 매체로 채워나가는 창조적 확장의 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영화는 128초간 지속되는 롱테이크로 시작된다. 트럭 뒤쪽이 프레임 대부분을 차지하는 구도에서, 연기가 서서히 피어오르고 종수(유아인)가 프레임에 진입하는 이 장면은 단순한 일상적 묘사를 넘어선 미학적 선언처럼 느껴진다. 다르덴 형제(Dardenne Brothers)의 사회적 리얼리즘을 연상시키는 이 촬영 기법은, 동시에 이창동 특유의 '작가적 권위'를 과시하는 장치이기도 할 것이다.
특히 주목할 만한 건 종수가 담배를 피우며 쉬는 모습으로 영화가 시작된다는 점이다. '연소'라는 모티프가 영화 전체를 관통한다고 볼 때, 이 첫 번째 불꽃은 일종의 '전조'적 기능을 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동시에 이 연기는 곧 사라질 것이고, 종수 자신도 결국 더 큰 불길에 휩싸이게 될 운명을 암시하는 아이러니컬한 설정이기도 할 것이다.
종수가 추첨에서 당첨된 "촌스러운 플라스틱 시계"를 해미(전종서)에게 건네주는 행위는, 표면적으로는 선의의 제스처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계급적 격차를 상징하는 오브제이기도 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플라스틱이라는 소재 자체가 '가짜' 혹은 '대용품'의 의미를 갖는다는 점에서, 종수가 해미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애초에 '진짜'가 아닌 '모조품'뿐이었을지도 모른다.
분홍색 또한 흥미로운 선택이다. 전통적으로 여성성을 상징하는 색이면서도, 동시에 '유치함' 혹은 '비현실성'을 암시하는 색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해미가 이 시계를 끝까지 차고 다닌다는 설정은, 그녀에게는 그것이 '진짜 선물'로 받아들여졌음을 의미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해미의 고양이 '보일'(Boil)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적 메타포 중 하나다. 종수는 고양이를 한 번도 보지 못하지만, 화장실의 배설물을 통해 그 존재를 추정한다는 설정은 명백히 슈뢰딩거의 고양이 사고실험을 연상시킨다. 관찰되지 않은 상태에서 존재와 부재가 동시에 중첩되는 양자역학적 상황 말이다.
'보일'이라는 이름도 의미심장하다. 한국어로 '보이다'의 미래시제의 관형적 형태로 보이면서도, 그 이름 자체로도 완성되지 않음 혹은 완성되지 못함을, 또한 보일 그 '무엇'이 빠져있다는 점에서의 미스터리함을 자아낸다. 영어로 '끓다' 혹은 '종기'를 뜻하는 이 단어는, 표면 아래에서 끓어오르는 무언가—분노든, 욕망이든, 불안이든—를 암시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해미가 사라진 후 고양이 역시 흔적을 감춰버린다는 설정은, 둘의 운명이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음을 시사하는 복선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해미가 나이로비 공항에서 "3일간 발이 묶였다"는 에피소드는 단순한 여행 중 해프닝을 넘어선 상징적 차원을 갖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공항이라는 '비장소'(non-place)에서의 표류는 마르크 오제(Marc Augé)가 말한 '초현대성'의 조건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익명성과 과도성이 지배하는 공간에서, 개인의 정체성은 일시적으로 해체되거나 재구성될 수 있는 것이다.
벤(스티븐 연)과의 만남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을 것 같다. "위기 상황에서 유대감을 형성했다"는 설정은, 트라우마가 만들어내는 인공적 친밀감의 성격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는 해미에게는 '구원'의 체험이었을 수도 있다—물론 그 구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별개의 문제이겠지만.
파주 농장에서 벌어지는 대마초 흡입 장면은 영화의 핵심적 전환점 중 하나다. 해미가 상의를 벗고 춤추는 모습은 표면적으로는 자유로운 해방감의 표현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남성적 시선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순간이기도 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벤이 이를 지켜보는 시선에는 일종의 '소유욕'이 내재되어 있다고 여겨진다.
흥미롭게도 이 장면에서 해미는 "허기의 춤"을 춘다고 말한다. 이는 단순한 배고픔이 아닌 실존적 결핍에 대한 은유일 수도 있을 것이다. 가난한 자의 굶주림을 부유한 자들 앞에서 '춤'으로 형상화한다는 설정은, 계급적 격차를 미학화하는 폭력성을 내포한다고 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벤이 "2개월마다 폐온실을 태우는 취미"를 갖고 있다고 고백하는 순간은 영화 전체의 복기점이 된다. 특히 그가 "가까이 있어서 보지 못할 수도 있다"고 말하는 대목은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리적으로는 종수가 온실 화재를 놓칠 가능성을 뜻하지만, 메타포적으로는 종수가 해미와 벤, 그리고 자신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음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취미"라는 표현 자체도 중요하다. 벤에게 온실 태우기는 일종의 '놀이'이지만, 그 온실들은 누군가에게는 생계의 터전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계급적 무감각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유층이 보여주는 전형적 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해미가 있었을 아파트가 "부자연스럽게 깨끗하다"는 묘사는 단순한 정리정돈을 넘어선 지우기 작업의 흔적으로 읽힐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고양이의 모든 흔적이 사라졌다는 설정은, 해미의 존재 자체가 의도적으로 '소거'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는 종수의 망상적 해석일 수도 있다는 양가성을 유지한다.
여행 가방이 그대로 남아있다는 디테일은 특히 불길하다. 여행을 위해 준비된 물건들이 주인 없이 남겨진 상황은, 일종의 '중단된 서사'를 암시하기 때문이다. 이는 해미라는 인물이 자신의 이야기를 끝까지 서술할 기회를 박탈당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종수가 벤의 강남 아파트를 감시하고 뒤따라다니는 행위는 표면적으로는 해미에 대한 걱정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동시에 이는 계급적 열등감이 만들어낸 강박적 행동일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이 접근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한 무력감이 감시와 추적이라는 형태로 발현되는 것이다.
특히 종수가 벤의 포르셰를 발견하고 레스토랑에 들어가 대면하는 장면은 흥미롭다. 벤이 새로운 여성과 함께 있는 모습을 목격한 종수의 반응은, 해미에 대한 순수한 걱정보다는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는 확신에 더 가까울 수도 있을 것이다.
종수가 벤을 칼로 찌르고 시체와 함께 차를 태우는 결말 시퀀스는 365초에 걸친 장대한 롱테이크로 처리된다. 이러한 촬영 기법은 관객으로 하여금 종수의 행동을 '실시간'으로 체험하게 만드는 효과를 갖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 모든 것이 종수의 소설 쓰기 과정에서 벌어지는 상상일 가능성도 열어둔다는 점에서, 이창동 특유의 서사적 교활함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종수가 옷을 벗고 나체가 되는 디테일은 특히 의미심장하다. 이는 문명적 질서의 포기이자 원시적 상태로의 회귀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법적 정의가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서, 개인이 취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으로서의 '원시적 복수' 말이다.
트럭에서 바라본 타오르는 자동차가 점점 멀어져가는 마지막 93초의 쇼트는 영화 전체의 정서적 완결을 제공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불꽃이 서서히 사라져가는 모습은 분노와 복수심의 소진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새로운 시작의 가능성을 암시하는 양가적 이미지이기도 하다.
흥미롭게도 이 장면에서 종수의 표정은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이는 관객으로 하여금 그의 내적 상태를 스스로 해석하게 만드는 성격을 갖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그는 만족감을 느끼고 있을까, 아니면 공허함에 사로잡혀 있을까?
벤이 "요즘엔 일과 놀이의 구별이 없다"고 말하는 대사는 신자유주의 시대 계급구조의 핵심을 찌르는 통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본가에게는 모든 것이 '놀이'가 될 수 있지만, 노동자에게는 생존 자체가 '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존재론적 격차'는 단순한 경제적 불평등을 넘어선 세계관의 근본적 차이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창동의 이런 계급적 진단이 자칫 너무 도식적이고 예측 가능할 위험성도 없지 않다. 부유한 악역과 가난한 피해자라는 이분법적 구도가 현실의 복잡성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감독이 추구하는 것은 아마도 사회학적 정확성이 아닌 감정적 진실성일 것이다.
결국 『버닝』은 이창동이라는 작가가 문학에서 영화로, 정치에서 예술로 건너온 여정의 집대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무라카미의 미니멀리즘과 포크너의 남부 고딕을 거쳐 도달한 이 한국적 신화는, 결국 우리 시대의 가장 보편적 정서—소외와 분노, 그리고 그 너머의 허무—를 포착해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해미는 정말 사라진 것일까, 아니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종수가—그리고 우리가—그녀의 부재를 통해 무엇을 보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불타지 않는 것들의 목록에는, 결국 기억과 후회, 그리고 다시 시작할 용기가 남아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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