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짐 자무쉬(Jim Jarmusch)의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는 제목이 이미 구문론적 해체다. 관사도 없고, 쉼표도 없으며, 위계도 없는 이 네 단어의 나열은 가족이라는 구조 자체가 얼마나 임의적이고 우연적인지를 선언한다. 2025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며 자무쉬는 "오 젠장(Oh shit)"이라는 특유의 무심한 감탄사로 받았고, "우리는 서로 경쟁하지 않지만, 이 상을 진심으로 감사한다"고 말하며 자신의 "조용한 영화(quiet film)"를 인정해준 베니스에 감사를 표했다. 하지만 이 '조용함'이야말로 가장 시끄러운 것이다 - 침묵 속에서 울려 퍼지는 말해지지 않은 것들, 해소되지 않은 긴장들, 그리고 결코 치유되지 않을 상처들의 앙상블.[1][2][3]
영화는 세 개의 독립된 에피소드로 구성된다: 미국 북동부 어딘가의 '파더(Father)', 아일랜드 더블린의 '마더(Mother)', 프랑스 파리의 '시스터 브라더(Sister Brother)'. 이 지리적 분산은 단순한 배경의 다양성이 아니라 소외의 보편성을 증명하는 지도다. 세 대륙, 세 언어권, 세 문화에서도 가족의 불편함은 동일한 침묵의 문법으로 작동한다.[4][5]
자무쉬는 인터뷰에서 밝힌다: "파리에서 학생 시절 시네마테크에 살다시피 하며 드레이어(Carl Dreyer), 나루세(Mikio Naruse), 브레송(Robert Bresson), 오즈(Yasujiro Ozu)를 발견했다. 그들은 할리우드와 다른 리듬을 사용했다". 이 네 감독 - 덴마크, 일본, 프랑스, 일본 - 의 다국적 계보가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의 초국가적 구조를 예비한다. 오즈의 일본식 가족 멜로드라마가 미국 뉴저지의 눈 덮인 시골로 이식되는 순간, 보편성과 특수성의 변증법이 시작된다.[2]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톰 웨이츠(Tom Waits)는 은둔한 아버지를 연기한다. 아들 제프(Jeff, 아담 드라이버 Adam Driver 연기)와 딸 에밀리(Emily, 메이임 비알릭 Mayim Bialik 연기)가 눈 덮인 길을 운전해 그를 방문한다. 자무쉬는 웨이츠와 1985년 장 미셸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의 파티에서 처음 만났고, 앤디 워홀(Andy Warhol)도 그 자리에 있었다. "우리는 밤새 댄스테리아(Danceteria) 같은 여러 장소를 돌아다녔고, 그 이후로 친구다. 지금까지 다섯 편의 영화를 함께 했다".[6][7][1]
웨이츠의 목소리 자체가 하나의 악기이며, 그의 존재는 미국 언더그라운드 문화의 활보하는 기념비다. 하지만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에서 그는 놀랍게도 조용하다. 아버지는 말을 아끼고, 자식들 역시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모른다. 드라이버가 가져온 "비싼 식료품 박스"는 언어의 대체물이자 죄책감의 물질화다. 에밀리는 "아버지가 어떻게 사회보장 없이 생존할 만큼의 돈을 가졌는지 모른다"고 의아해하지만, 제프는 비밀리에 아버지를 지원하는 것으로 보인다.[1]
이 에피소드는 레이먼드 카버(Raymond Carver)의 미니멀리즘 소설들을 연상시킨다. 말해지지 않은 것이 말해진 것보다 무겁고, 침묵의 무게가 대화의 경박함을 압도한다. 촬영감독 프레더릭 엘메스(Frederick Elmes)는 데이비드 린치(David Lynch)의 <블루 벨벳>(1986), <와일드 앳 하트>(1990)를 촬영한 거장이다. 그의 카메라는 뉴저지의 겨울 풍경을 거의 초현실적인 고요함으로 포착한다. 눈은 소리를 흡수하고, 백색은 모든 색을 무효화시킨다.[8]
두 번째 에피소드는 아일랜드 더블린을 배경으로 한다. 딸 릴리스(Lilith, 비키 크립스 Vicky Krieps 연기)와 팀(Tim, 케이트 블란쳇 Cate Blanchett 연기)이 어머니(샬롯 램플링 Charlotte Rampling 연기)를 방문한다. 램플링의 얼굴 자체가 유럽 아트하우스 시네마의 역사다 - 루키노 비스콘티(Luchino Visconti)의 <지옥에 떨어진 자들>(1969), 릴리아나 카바니(Liliana Cavani)의 <나이트 포터>(1974), 프랑수아 오종(François Ozon)의 <스위밍 풀>(2003).[5]
페이스트 매거진(Paste Magazine)의 평론은 지적한다: "블란쳇이 욕실 거울 앞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눈까지 닿지 않는 가벼운 미소를 연습하는 무언의 쇼트; 램플링이 딸들이 떠나가는 것을 지켜보며 읽을 수 없는 표정을 짓는 순간 - 카메라가 그 위에 머문다". 이 응시의 정치학은 자크 라캉(Jacques Lacan)의 이론을 체화한다. 어머니는 딸들을 보지만, 동시에 그들을 '보지 않는다'. 그녀의 시선은 투과하지만 도달하지 않는다.[9]
요릭 르 소(Yorick Le Saux)는 이 에피소드를 촬영했을 것이다. 그는 클레어 드니(Claire Denis)의 <하이 라이프>(2018)와 비 홀로(Mia Hansen-Løve)의 작품들을 담당한 프랑스 촬영감독이다. 더블린의 빛은 뉴저지와 다르다 - 더 회색이고, 더 습하며, 더 서정적이다. 아일랜드의 날씨는 감정을 배반하지 않는다; 항상 애매하고, 항상 변덕스럽다.[8]
자무쉬는 인터뷰에서 자신이 "직관적이지 분석적이지 않다"고 말한다. "아이디어를 1~2년 동안 가지고 다니다가 대본을 아주 빠르게 쓴다. 이 아이디어는 몇 달 동안 내게 있었고, 그 후 대본을 아주 빠르게 썼다". 이 직관성이야말로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의 반(反)서사적 리듬을 만든다. 플롯은 축적되지 않고, 캐릭터는 성장하지 않으며, 갈등은 해소되지 않는다. 대신 순간들이 병치되고, 침묵들이 공명하며, 부재들이 현존한다.[2]
세 번째 에피소드는 파리를 배경으로 쌍둥이 남매 빌리(Billy, 루카 사바트 Luka Sabbat 연기)와 스카이(Skye, 인디아 무어 Indya Moore 연기)가 등장한다. 그들의 부모는 아조레스(Azores)에서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고, 남매는 비어있는 부모의 아파트로 돌아와 오래된 사진, 그림, 아버지의 롤렉스, 여러 개의 가짜 신분증, 가짜 결혼증명서를 발견한다.[1]
자무쉬는 이 에피소드의 기원을 설명한다: "내 어머니와 그녀의 남동생이 쌍둥이였고 꽤 텔레파시적이었다. 맹세컨대, 우리 집에서 전화가 울리면 어머니가 '밥이야'라고 말했고 - 정말로 밥이었다. 혹은 '오늘 밥이 몸이 안 좋을 것 같아'라고 말하고 그에게 전화를 걸면, '오, 독감에 걸렸어, 느꼈어.' 어린 시절 이런 것들을 관찰하며 나는 '이게 정확히 어떻게 작동하는 거지?!'라고 궁금해했다".[2]
쌍둥이의 텔레파시는 가족 유대의 이상적 형태이자 동시에 가장 섬뜩한 형태다. 그것은 개인성의 소멸을 암시한다 - 나와 타자의 경계가 흐려지고, 자아가 복수화된다. 심리학자 카를 융(Carl Jung)의 '집단무의식' 개념이나, 들뢰즈-가타리(Deleuze-Guattari)의 '신체 없는 기관'이 떠오른다. 빌리와 스카이는 두 개의 분리된 존재인가, 아니면 하나의 분할된 존재인가?
바라이어티(Variety)는 지적한다: "무어와 사바트는 크립스와 블란쳇, 그리고 드라이버와 비알릭의 것에 필적하는 매혹적인 남매 케미스트리를 공유한다". 세 쌍의 형제자매가 각각 다른 나라에서 다른 부모 상황을 겪지만, 그들의 관계 역학은 기묘하게 동형적(isomorphic)이다. 이는 구조주의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의 통찰을 상기시킨다 - 친족 구조는 표면적으로 다양해 보이지만, 심층적으로는 보편적 패턴을 따른다.[8]
페이스트 매거진은 비판적으로 관찰한다: "각 세트피스에는 건배가 있고, 물이 있으며, 스케이트보드가 있고, 롤렉스가 있다. 반복이 음조나 감정적 등록이 이야기들 사이에서 더 극적으로 변화했다면 누적적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하지만 대신 그것은 마비되는 동일성을 생산한다. 모티프들은 서로를 조명하지 않는다; 단지 재등장할 뿐이다, 스케치 쇼의 반복 개그처럼".[9]
하지만 이 비판은 자무쉬의 의도를 오독하는 것일 수 있다. 반복은 변주를 위한 기반이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가 신화 분석에서 보여주듯, 동일한 모티프가 다른 맥락에서 재등장할 때 그 의미는 변형된다. 롤렉스 시계를 예로 들어보자.
자무쉬는 가짜 롤렉스의 기원을 설명한다: "중앙아프리카공화국에 살았던 친구가 있는데, 음악학자다. 그는 바야카 피그미족(Bayaka pygmies)과 함께 살며 수년간 그들의 음악을 녹음했고, 뉴욕 카날 스트리트에서 가짜 롤렉스를 사서 통과해야 하는 아프리카 관리들에게 뇌물로 사용했다. 그 시점에 나는 가짜 롤렉스에 꽤 집착하게 되었다".[2]
가짜 롤렉스는 자본주의의 시뮬라크르다. 그것은 부의 기표이지만 실제 가치는 없고, 권력의 상징이지만 실제 권력은 부여하지 않는다.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의 시뮬라시옹 이론이 여기서 작동한다 - 가짜가 진짜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와 가짜의 구분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세 에피소드에서 롤렉스가 등장할 때마다,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애매하게 남는다. 그리고 그 애매함이야말로 핵심이다.
세 에피소드 모두에 등장하는 공통 요소는 "밥이 당신의 삼촌(Bob's your uncle)"이라는 영국식 표현이다. 이 관용구는 "그렇게 하면 끝이야" 혹은 "그러면 해결돼"라는 의미지만, 자무쉬의 개인사에서 문자 그대로의 진실이기도 하다. "내 삼촌 이름이 밥이었다. 내 아버지 이름도 밥이었다. 사촌들과 함께 있을 때 항상 '밥 삼촌 어디 있어?'라고 물으면 '네 밥 삼촌? 내 밥 삼촌?' 나중에 영국에 가면 계속 '밥이 네 삼촌이야!(Bob's your uncle!)'라는 말을 듣고 '네, 맞아요. 어떻게 알았어요?'라고 했다".[2]
이 언어 유희는 우연과 운명, 관용과 문자성 사이의 경계를 흐린다.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의 '언어 게임' 개념이 떠오른다 - 같은 표현이 다른 맥락에서 다른 의미를 획득한다. 자무쉬에게 "Bob's your uncle"는 동시에 사실이면서 은유이고, 개인적이면서 보편적이다.
바라이어티는 관찰한다: "세 개의 세그먼트 각각에는 자동차 안에서 벌어지는 장면들이 포함되며, 이는 그의 택시 테마 영화 <나이트 온 어스>(1991)를 상기시킨다". <나이트 온 어스>는 로스앤젤레스, 뉴욕, 파리, 로마, 헬싱키의 택시 안에서 벌어지는 다섯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옴니버스 영화였다.[10][8]
자동차는 자무쉬 시네마의 정서적 용기다. 그것은 이동의 공간이자 정체의 공간이며, 도주의 수단이자 감금의 장소다. 운전석과 조수석의 관계는 불가피한 근접성을 강요한다 - 당신은 옆 사람을 보지 않고도 그들의 존재를 느낀다. 이는 가족 관계의 완벽한 은유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드 세르토(Michel de Certeau)는 『일상생활의 실천』에서 걷기를 도시 공간을 전유하는 전술로 분석했다. 자무쉬에게 운전은 관계 공간을 전유하는 전술이다. 대화는 목적지로 향하지만, 도착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불편함의 시작이다.
자무쉬의 <커피와 담배>(2003)는 11개의 흑백 짧은 에피소드로 구성되었고, 각각의 등장인물들이 커피와 담배를 매개로 대화를 나눴다.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에서 바라이어티는 지적한다: "인물들이 뜨거운 음료를 즐기는 순간들이 있으며, 컵과 잔들이 테이블 위에 예술적으로 배열된 오버헤드 샷은 그의 이전 작품 <커피와 담배>를 메아리친다".[10][8]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담배의 부재다. 2003년의 자무쉬는 여전히 담배를 낭만화할 수 있었지만, 2025년의 자무쉬는 그럴 수 없다. 시대가 변했고, 담배는 더 이상 쿨하지 않으며, 단지 병인적일 뿐이다. 커피는 남지만 담배는 사라진다 - 이는 세대 간 단절의 물질적 표지이기도 하다.
편집자 아폰소 곤살베스(Affonso Gonçalves)는 <캐롤>(2015), <문라이트>(2016), <퍼스트 맨>(2018)을 작업한 거장이다. 바라이어티는 평가한다: "영리한 편집은 심지어 침묵들에도 코믹한 리듬을 부여하며, 마치 그가 위트로 가득 찬 대화의 뉘앙스를 능숙하게 탐색하는 것처럼".[8]
침묵을 편집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모순적 개념처럼 보인다. 침묵은 소리의 부재이고, 편집은 커트의 예술이다. 하지만 곤살베스는 침묵에도 리듬이 있다는 것을 안다. 어떤 침묵은 짧고 날카롭고, 어떤 침묵은 길고 무겁다. 어떤 침묵은 기대를 만들고, 어떤 침묵은 기대를 배반한다.
존 케이지(John Cage)의 <4'33">(1952)이 떠오른다. 이 작곡은 연주자가 악기를 전혀 연주하지 않는 4분 33초로 구성된다. 하지만 그것은 침묵이 아니다 - 청중의 숨소리, 의자의 삐걱거림, 밖의 소음이 모두 음악이 된다. 자무쉬의 침묵도 비어있지 않다 - 말하지 않는 것들의 웅성거림으로 가득하다.
자무쉬는 인터뷰에서 로버트 미첨(Robert Mitchum)과의 일화를 들려준다: "유명인들과 작업하거나 함께 있는 것에 대해 결코 위축되지 않았다. 단 한 번의 예외: 로버트 미첨. <데드 맨>(1995)을 촬영할 때 카메라가 돌아가면 나는 서 있으면서 '저건 내가 연출하고 있는 로버트 미첨이야!'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관대했고 매우 재밌었다. '오늘 기분이 어떠세요, 미첨 씨?' '더 나빠졌어!!!'"[2]
미첨은 필름 누아르의 살아있는 전설이었다 - <케이프 피어>(1962), <밤의 사냥꾼>(1955). 그가 <데드 맨>에서 연기한 것은 그의 마지막 주요 역할 중 하나였다 (1997년 사망). 자무쉬가 그를 두려워했다는 고백은 드물다. 자무쉬는 일반적으로 불가촉의 쿨함을 유지하지만, 미첨 앞에서는 팬보이가 되었다.
<데드 맨>은 조니 뎁(Johnny Depp)이 연기한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라는 이름의 회계사가 미국 서부를 떠도는 존재론적 웨스턴이었다. 그 영화의 흑백 시네마토그래피는 로비 뮐러(Robby Müller)가 담당했다.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는 컬러지만, 그 색채 팔레트는 놀랍도록 억제되어 있다 - 거의 흑백에 가까운 채도.[10]
샬롯 램플링이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의 어머니 역을 맡았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녀의 가장 유명한 역할 중 하나는 릴리아나 카바니의 <나이트 포터>(1974)에서 전 나치 장교(더크 보가드 Dirk Bogarde)와 사도마조히즘적 관계를 맺는 홀로코스트 생존자였다. 그 영화는 논란을 일으켰지만, 램플링의 존재 자체가 도발이었다 - 취약함과 강인함, 희생자성과 공모를 동시에 체현하는.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의 어머니 캐릭터는 <나이트 포터>의 루시아(Lucia)만큼 극단적이지 않지만, 램플링의 얼굴은 여전히 과거를 소환한다. 배우의 필모그래피는 그들의 현재 역할에 유령처럼 출몰한다. 우리는 단순히 캐릭터를 보는 것이 아니라 배우의 축적된 역사를 본다.
프랑스 비평가 세르주 다네(Serge Daney)는 "배우의 얼굴은 영화사의 기억 장소(lieu de mémoire)"라고 말했다. 램플링의 얼굴은 1960년대 스윙잉 런던에서 2020년대 노년기까지의 유럽 영화사를 압축한다. 그녀가 화면에 등장할 때, 60년의 시네마가 함께 등장한다.
케이트 블란쳇(Cate Blanchett)은 현대 영화에서 가장 카멜레온적인 배우 중 한 명이다 - 엘리자베스 1세(<엘리자베스>, 1998), 밥 딜런(<아임 낫 데어>, 2007), 캐롤 에어드(<캐롤>, 2015).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에서 그녀는 팀(Tim)이라는 딸을 연기한다 - 전통적으로 남성 이름인 이것이 우연일 리 없다.
자무쉬는 젠더 규범에 관심이 없다. 그의 영화들 - <데드 맨>, <고스트 독>(1999), <온리 러버스 레프트 얼라이브>(2013) - 은 모두 사회적 범주를 초월하는 인물들을 다룬다. 블란쳇의 팀은 명시적으로 퀴어로 코딩되지 않지만, 그녀의 존재 자체가 이성애규범적 가족 구조를 교란시킨다.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의 젠더 수행성(gender performativity) 이론이 여기서 작동한다. 팀이라는 이름, 블란쳇의 앤드로지니(androgyny), 그리고 그녀가 어머니 및 자매와 맺는 관계는 모두 가족이 얼마나 젠더화된 역할의 집합인지를 폭로한다.
비키 크립스(Vicky Krieps)는 폴 토마스 앤더슨(Paul Thomas Anderson)의 <팬텀 스레드>(2017)에서 다니엘 데이 루이스(Daniel Day-Lewis)와 대결하며 국제적으로 주목받았다. 그 영화에서 그녀는 강박적인 패션 디자이너를 통제하려는 뮤즈/연인을 연기했다.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에서 그녀는 릴리스(Lilith) - 유대 신화에서 아담의 첫 번째 아내로, 복종을 거부하고 에덴을 떠난 - 를 연기한다.
릴리스라는 이름의 선택은 우연이 아니다. 페미니스트 신화학에서 릴리스는 가부장제에 저항하는 원형이다. 크립스의 릴리스가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보여주는 조심스러운 거리두기는 이러한 신화적 계보를 반영한다. 그녀는 딸이기를 거부하지 않지만, 그 역할의 조건을 재협상하려 한다.
인디아 무어(Indya Moore)는 TV 시리즈 <포즈>(2018-2021)에서 트랜스 여성 캐릭터를 연기하며 명성을 얻었다. 그들은 논바이너리(non-binary)를 정체화한다.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에서 무어의 캐스팅은 자무쉬의 포용적 비전을 보여준다 - 가족이라는 구조가 얼마나 다양한 정체성을 포괄할 수 있는지.
무어와 루카 사바트(Luka Sabbat)의 쌍둥이 관계는 특히 흥미롭다. 그들은 생물학적으로 남매지만, 젠더 정체성의 스펙트럼을 가로지른다. 쌍둥이의 텔레파시는 여기서 퀴어적 친밀성의 모델이 된다 - 혈연을 넘어서는 선택된 가족(chosen family)의 가능성.
자무쉬는 오하이오 주 아쿠론(Akron)에서 성장했다. "아쿠론에서 나는 괴물 영화들을 봤다. 내 어머니는 아이들을 갖기 전에 아쿠론 비컨 저널(Akron Beacon Journal)의 영화 평론가였지만, 1940~50년대 할리우드 영화들에 더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결정적 전환은 파리 유학이었다. "파리에서 나는 세계 각지의 영화들을 봤고, 이 조용한 스타일을 반영하는 영화들을 발견했다 - 오즈, 브레송, 칼 드레이어".[7]
이 문화적 여정 자체가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의 구조를 예비한다. 미국에서 태어나 유럽에서 교육받은 감독이 미국-아일랜드-프랑스를 넘나드는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자무쉬의 트랜스내셔널리즘은 단순한 지리적 다양성이 아니다. 그것은 시네마 자체가 초국가적 언어라는 믿음이다.
흥미롭게도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는 장 뤽 고다르(Jean-Luc Godard)의 부재를 소환한다. 고다르는 2022년 9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자무쉬는 고다르의 영향을 공개적으로 인정해왔다 - <스트레인저 댄 파라다이스>(1984)의 긴 테이크와 데드팬 유머는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1960)를 경유한다.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의 파리 에피소드는 암묵적으로 누벨바그의 도시를 소환한다. 하지만 2025년의 파리는 1960년의 파리가 아니다. 도시는 변했고, 영화는 변했으며, 가족도 변했다. 하지만 자무쉬가 포착하는 것은 바로 그 변화 속의 불변 - 인간 관계의 근본적 어려움.
자무쉬가 가장 자주 언급하는 영향 중 하나는 오즈 야스지로(Ozu Yasujiro)다. 오즈의 <동경 이야기>(1953)는 노부부가 자식들을 방문하지만 환영받지 못하는 이야기다.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는 그 구조를 반전시킨다 - 성인 자식들이 노부모를 방문하지만 역시 불편함만 남는다.[2]
오즈의 '필로우 샷(pillow shot)' - 인물이 없는 정물 같은 인서트 - 는 자무쉬에게도 나타난다. 바라이어티가 언급한 "컵과 잔들이 테이블 위에 예술적으로 배열된 오버헤드 샷" 이 바로 그것이다. 이 쇼트들은 내러티브를 중단시키고, 관객에게 숨 쉴 공간을 제공하며, 동시에 사물들의 세계가 인간의 드라마와 무관하게 존재함을 상기시킨다.[8]
로베르 브레송(Robert Bresson)은 배우를 '모델'이라 부르며, 연기가 아닌 '존재'를 추구했다. 그의 저서 『시네마토그래프에 관한 단상』은 영화 제작의 금욕적 윤리학을 제시한다. 자무쉬는 인터뷰에서 브레송을 명시적으로 언급한다.[7]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의 배우들 - 특히 덜 알려진 인디아 무어와 루카 사바트 - 은 연기를 최소화한다. 그들의 제스처는 경제적이고, 대사는 단조롭며, 표정은 억제된다. 이는 할리우드의 과잉 감정 표현과 대척점에 있다. 브레송이 말했듯, "연기를 통해 감정을 표현하지 마라. 그저 있어라(Be)."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Carl Theodor Dreyer)는 덴마크 감독으로, 그의 영화들 - 특히 <오르데아>(1955) - 은 영적 초월의 가능성을 탐구한다. <오르데아>의 마지막 장면에서 죽은 여성이 기적적으로 부활한다. 이는 문자 그대로의 기적이지만, 동시에 믿음 자체의 물질화다.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에는 명시적인 종교적 요소가 없다. 하지만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것은 부재 속의 현존에 대한 믿음이다. 죽은 부모(파리 에피소드), 부재하는 어머니(뉴저지 에피소드), 소외된 관계들 - 이 모든 것이 보이지 않지만 강력하게 작용한다. 드레이어가 신의 부재 속에서 신을 찾았다면, 자무쉬는 가족의 해체 속에서 가족을 찾는다.
황금사자상 수상 소감에서 자무쉬는 아키라 구로사와(Akira Kurosawa)를 인용했다: "그는 아카데미 평생 공로상을 받았을 때 여전히 영화를 만드는 방법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했고, 나도 그 감정을 공유한다. 끊임없이 배우고 있다".[3]
이 겸손함은 진정한 거장의 표지다. 구로사와는 <라쇼몬>(1951)으로 베니스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았다 - 그로부터 74년 후 자무쉬가 같은 상을 받는다. 두 감독 모두 동서양 영화 전통을 융합했고, 두 감독 모두 인간 조건의 보편성을 추구했다.
자무쉬는 "우리 감독들은 서로 경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는 단순한 겸양이 아니라 예술에 대한 근본적 이해다. 영화들은 서로 대화하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공동의 시네마 유산을 구축한다.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는 그 대화의 최신 발화다.[3]
결국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가 증명하는 것은 가족이라는 제도의 불가피성과 불가능성이다. 우리는 가족을 선택하지 않지만, 가족은 우리를 형성한다. 우리는 부모를 이해하려 하지만, 결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형제자매와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멀다. 자무쉬의 카메라는 이 역설을 판단하지 않고 단지 관찰한다. 그리고 그 관찰의 정직함이야말로, 2025년 베니스가 인정한 시네마의 윤리학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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