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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링클레이터(Richard Linklater)의 <누벨바그>는 제목부터가 이중적 선언이다. 이는 1950년대 말 프랑스 영화계를 뒤흔든 '새로운 물결'을 지칭하는 동시에, 2025년 현재 인디영화의 원조가 그 원류로 회귀하는 메타적 제스처를 의미한다.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되어 기립박수를 받았던 이 작품은, 장 뤽 고다르(Jean-Luc Godard)가 À bout de souffle(네 멋대로 해라, 1960)를 촬영하던 1959년의 파리로 관객을 데려간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시대극이 아니라, 링클레이터가 자신의 영화적 DNA를 역추적하며 발견하는 기원의 신화이자, 동시에 그 신화가 얼마나 즉흥적이고 불완전했는지를 폭로하는 이중적 작업이다.[1][2][3]
기욤 마르벡(Guillaume Marbeck)이 연기하는 고다르는 아이러니하게도 '비어 있는' 인물이다. 가디언지가 지적하듯, 링클레이터의 고다르는 "수수께끼 같고 일관되게 침착하다". 그는 프랑수아 트뤼포(François Truffaut)가 Les Quatre Cents Coups(400번의 구타, 1959)로 칸에서 성공한 것에 대한 경쟁적 좌절감을 느끼지만, 그 감정조차도 표면 아래로 가라앉는다.[4][1]
이는 의도된 전략일 것이다. 링클레이터가 인터뷰에서 밝혔듯, 그는 "고다르와 그의 동시대인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신선한 관점에서 그들을 조망하려 했다". 마르벡을 캐스팅한 방식 자체가 이를 증명한다 - 그는 "이 대담하고, 고뇌하며, 연약하면서도 오만한 젊은 영화감독을 구현할 수 있는" 상대적 무명 배우를 찾았다. 이는 로베르 브레송(Robert Bresson)의 '모델' 이론을 떠올리게 한다. 브레송은 직업 배우 대신 비전문가를 선호했는데, 그들의 '비어 있음'이 오히려 캐릭터를 채울 수 있다고 믿었다.[5]
조이 도이치(Zoey Deutch)가 연기하는 장 세버그(Jean Seberg)는 "유창한 프랑스어를 오하이오 억양으로" 구사한다. 이 언어적 이중성은 세버그 자신의 실존적 위치를 압축한다. 그녀는 오토 프레밍어(Otto Preminger)의 Saint Joan(잔 다르크, 1957)으로 할리우드에서 참혹한 실패를 경험한 후 파리에 도착했고, À bout de souffle를 통해 재탄생한다.[6][4]
촬영감독 라울 쿠타르(Raoul Coutard, 마티외 팽시나 Matthieu Penchinat 연기)와 고다르가 "서로 으르렁댔다"는 일화는 영화에서도 재현될 것이다. 세버그는 마지막 장면을 감정적 격앙 상태로 연기하고 싶었지만, 고다르는 완전히 차갑고 냉정하기를 원했다. 결국 그는 양보했지만, 더빙 과정에서 세버그는 고다르가 옳았음을 깨닫고 매우 저조한 톤으로 대사를 녹음했는데, 이는 화면의 표정과 항상 일치하지 않는다. 이 불일치야말로 누벨바그의 미학적 핵심이다 - 완벽함을 거부하고 불완전성을 수용하는 것.[6]
링클레이터는 <누벨바그>를 35mm 흑백 필름으로 촬영했다. 그는 단호하게 말한다: "이 영화의 모든 쇼트는 1959년부터 1962년 또는 1963년 사이에 들어맞지 않는 것이 없다". 이는 단순한 복고 취향이 아니라 영화사적 고고학이다. 촬영감독 다비드 샹빌(David Chambille)과 함께 그는 "음악과 함께 진정한 외관과 느낌을 포착했으며, 항상 존재하는 담배를 포함하여 그 시대에 대한 경의"를 표현했다.[7][8]
하지만 이 물질성에 대한 집착은 역설적이다. 고다르는 당시 일포드 HPS 필름(Ilford HPS film)을 사용했는데, 이는 영화 촬영용이 아닌 스틸 사진용 35mm 필름이었다. 쿠타르는 18미터 길이의 HPS 필름을 구입해 이어 붙여 120미터 롤을 만들었고, 필름을 400 ASA에서 800 ASA로 푸시했다. 즉, À bout de souffle의 혁명성은 적절한 장비의 사용이 아니라 부적절한 도구의 전유에 있었다. 링클레이터는 이 정신을 재현하면서도, 동시에 2025년의 기술로 1959년의 '가난'을 시뮬레이션하는 특권적 위치에 있다.[9]
에클레르 카메플렉스(Eclair Cameflex) 카메라는 À bout de souffle 촬영의 핵심 도구였다. 하지만 이 카메라는 "시끄러웠고 사운드를 동기화할 수 없어서 거의 전체 영화를 후시 녹음으로 더빙해야 했다". 고다르는 촬영 중 배우들에게 대사를 외쳐주었고, 그들은 그것을 따라 했다 - 일반적으로 고다르가 방금 쓴 것이라 배우들은 대사를 사전에 본 적이 없었다.[9]
이 즉흥성은 링클레이터의 <슬래커>(1991)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그는 인터뷰에서 인정한다: "슬래커는 더 조잡했고 나는 증명되지 않았었다. 나는 À bout de souffle가 프랑스 영화 산업 내에서 만들어진 것을 존경했다. 저예산 프랑스 영화였지만 그에게는 프로듀서가 있었다". 반면 미국 인디들은 종종 감독 없이 진행되며, "그 초기 영화들은 신용카드로 자금을 조달했다".[8]
촬영은 1959년 8월 17일 시작되었다. 고다르는 호텔 드 쉬에드(Hôtel de Suède) 근처의 카페 노트르담(Café Notre Dame)에서 크루를 만나 "아이디어가 떨어질 때까지 두 시간 동안 촬영했다". 쿠타르는 "영화가 사실상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만들어졌으며, 고다르는 다른 누구도 들여다볼 수 없는 연습장에 대사를 썼다"고 진술했다.[9]
링클레이터는 이 에피소드를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 그는 "나는 1959년에 카메라를 들고 그 시대, 사람들, 분위기를 재현하고 싶었다. 나는 누벨바그 군중과 어울리고 싶었다"고 말한다. 이는 세앙스(séance, 강령회)의 메타포를 불러온다. 그는 인터뷰에서 직접적으로 사용한다: "그것은 세앙스 같았다. 그들 모두가 돌아왔다. 나는 영매였고 그들은 돌아와서 빛나게 행복했다".[5][8]
링클레이터는 파리의 원래 촬영지로 돌아갔지만, "모든 것이 변화했다"고 인정한다. "샹젤리제는 거리 안의 넓은 보도로 변모했다. 하지만 개선문에서 불바르 그랑 아르메(Boulevard Grand Armée)로 180도 돌리면 여전히 원래의 매력을 유지한다". 그들은 그곳으로 돌아가 각도를 반전시켜 개선문을 배경에 배치했다.[8]
이는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의 시뮬라크르 이론을 실천하는 것이다. 원본(1959년의 파리)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그 부재를 통해 더 강력한 '진정성의 효과'를 생산한다. 링클레이터가 만드는 것은 복제가 아니라 복제의 복제, 즉 원본 없는 시뮬라크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포스트모던 시네마의 본질이다.
오브리 뒬랭(Aubry Dullin)이 연기하는 장 폴 벨몽도(Jean-Paul Belmondo)는 영화의 신체적 중심이다. 역사적 벨몽도는 À bout de souffle에서 미셸 푸아카르(Michel Poiccard)를 연기하며 즉각적으로 아이콘이 되었다. 그의 엄지손가락으로 입술을 문지르는 제스처, 담배를 피우는 방식, 선글라스를 쓴 모습 - 이 모든 것이 1960년대 남성성의 원형이 되었다.[1]
링클레이터는 뒬랭을 캐스팅하면서 "그들의 실제 인물들을 닮은 배우들이 필요했고 상대적으로 무명이어야 했다. 고다르와 그의 동시대인들을 경험하는 진정성을 보장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한다. 이는 메타캐스팅의 역설이다 - 진정성을 위해 '가짜'를 필요로 하는 것. 유명 배우를 캐스팅하면 관객은 배우를 보지만, 무명 배우를 쓰면 캐릭터를 본다는 논리다.[5]
아드리앵 루야르(Adrien Rouyard)가 연기하는 트뤼포는 영화에서 고다르의 그림자이자 경쟁자로 기능한다. 1959년 트뤼포는 이미 Les Quatre Cents Coups로 칸에서 감독상을 수상했다. 고다르는 여전히 첫 장편을 준비 중이었고, 파티와 촬영장에 들어가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4]
이 경쟁 관계는 해럴드 블룸(Harold Bloom)의 '영향의 불안(anxiety of influence)' 이론을 연상시킨다. 고다르와 트뤼포는 둘 다 Cahiers du Cinéma(카이에 뒤 시네마) 출신 비평가였지만, 트뤼포가 먼저 감독으로 성공했다. 고다르의 À bout de souffle는 이러한 불안에 대한 공격적 응답이었고, 결과적으로 더 혁명적인 작품이 되었다.
브뤼노 드레퓌르스트(Bruno Dreyfürst)가 연기하는 프로듀서 조르주 드 보레가르(Georges de Beauregard)는 영화의 코믹 릴리프이면서 동시에 가장 비극적인 인물이다. 역사적으로 드 보레가르는 고다르와 재정 분쟁으로 "파리 카페에서 코믹한 물리적 몸싸움"까지 벌였다.[4]
이 에피소드는 예술과 자본의 영원한 긴장을 상징한다. 고다르는 예술적 자유를 원했고, 드 보레가르는 투자 회수를 원했다. 결국 À bout de souffle는 상업적으로도 성공했지만, 그것은 고다르의 의도가 아니었다. 링클레이터는 2025년의 인터뷰에서 냉소적으로 말한다: "돈이 널려 있지 않으면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Unless It's Got Money All Over It, Nobody Gives a S—)".[3]
쿠타르는 전쟁을 취재하던 사진기자 출신이었고, 이는 그를 "고다르의 비전통적인 영화 제작 스타일에 적합한 선택"으로 만들었다. 그는 추가 조명 없이 핸드헬드 카메라로 전체 영화를 촬영하는 것에 익숙했다. 고다르는 자신의 영화를 "거의 다큐멘터리처럼" 보았다.[6][4][9]
이는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영향이다. 로베르토 로셀리니(Roberto Rossellini)의 Roma città aperta(무방비 도시, 1945)는 전쟁 직후 실제 로마 거리에서 촬영되었다. 쿠타르의 카메라는 이 전통을 파리로 가져왔고, 동시에 더 기동성 있고 공격적이 되었다. 카메라는 더 이상 관찰자가 아니라 참여자였다.
클레리(Clery)가 연기하는 고다르의 첫 조감독 피에르 리시앙(Pierre Rissient)은 역사적으로 프랑스 영화계의 중요한 연결고리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관객은 그의 이름을 모른다. 이는 영화 제작의 구조적 위계를 드러낸다 - 감독은 신화화되지만, 조감독은 보이지 않는다.[4]
링클레이터 자신도 Dazed and Confused(1993) 촬영 당시 비슷한 경험을 했다고 고백한다: "600만 달러 예산의 스튜디오 지원을 받는 더 큰 영화였다. 그리고 기술적으로는 내 세 번째 장편이고 아마도 내가 만들고 편집한 23번째 영화였지만, 그들은 여전히 나를 처음 하는 사람처럼 대했다". 이 투쟁은 모든 젊은 감독이 겪는 통과의례다.[10]
À bout de souffle의 가장 유명한 혁신은 점프컷(jump cut)이다. 전통적 영화 문법에서 금기시되던 이 기법 - 동일한 쇼트 내에서 시간을 불연속적으로 압축하는 - 을 고다르는 의도적으로 사용했다. 이는 영화적 시간의 자연주의를 파괴하고, 영화가 '만들어진 것'임을 관객에게 상기시킨다.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Sergei Eisenstein)의 몽타주 이론이 쇼트 간의 충돌을 통해 의미를 생산했다면, 고다르의 점프컷은 단일 쇼트 내부에서 균열을 만든다. 이는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의 소격효과(Verfremdungseffekt)를 영화적으로 구현한 것이다. 링클레이터는 <누벨바그>에서 이 점프컷을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 아니면 점프컷을 재현하는 것 자체가 모순인가?
링클레이터와 샹빌은 "항상 존재하는 담배를 포함하여" 시대를 재현했다. 1959년의 파리에서 담배는 단순한 소품이 아니라 실존적 태도의 표현이었다.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와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가 카페 드 플로르(Café de Flore)에서 담배를 피우며 철학을 논했듯, 누벨바그 감독들도 담배를 피우며 영화를 사유했다.[7]
벨몽도가 À bout de souffle에서 담배를 피우는 방식은 험프리 보가트(Humphrey Bogart)에 대한 오마주이면서 동시에 패러디였다. 미셸 푸아카르는 보가트를 숭배하지만, 그 자신은 2류 범죄자에 불과하다. 이 간극이 영화의 아이러니를 구성한다.
선글라스는 누벨바그 아이코노그래피의 핵심이다. 그것은 할리우드 필름 누아르의 쿨함을 차용하지만, 동시에 프랑스적 지성주의와 결합된다. 고다르 자신도 항상 선글라스를 썼고, 이는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자크 라캉(Jacques Lacan)의 응시(gaze) 이론에서, 선글라스는 타자의 응시를 차단하는 장치다. 고다르는 세상을 보지만, 세상은 고다르의 눈을 보지 못한다. 이 비대칭성이 권력 관계를 구성한다. 링클레이터의 영화에서 마르벡이 선글라스를 쓴 채 등장하는 장면들은 이러한 권력의 재현일 것이다.
영화에서 명시적으로 다뤄지지 않을 수도 있지만, 누벨바그의 탄생에서 앙리 랑글루아(Henri Langlois)와 시네마테크 프랑세즈(Cinémathèque Française)의 역할은 결정적이었다. 고다르, 트뤼포, 에릭 로메르(Éric Rohmer), 자크 리베트(Jacques Rivette) - 이들 모두는 시네마테크에서 고전 영화들을 탐식하며 영화 교육을 받았다.
링클레이터 자신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그는 오스틴(Austin)에서 비디오 가게를 운영하며 영화를 공부했다. 이는 정규 영화 학교가 아닌 '자가 교육'의 전통이다. 랑글루아가 없었다면 누벨바그도 없었을 것이고, 비디오 가게가 없었다면 링클레이터도 없었을 것이다. <누벨바그>는 이러한 비공식적 시네필리아의 계보를 기록하는 작업이기도 하다.[11]
칸 프리미어에서 "가장 큰 반역자" 쿠엔틴 타란티노(Quentin Tarantino)가 맨 앞에 서서 박수를 주도했다. 링클레이터는 다음날 인터뷰에서 말한다: "나는 타란티노를 30년 정도 알고 지냈다. 그는 내 가장 오래된 영화 친구 중 하나여서 그가 거기 있었던 것이 멋졌다".[3]
이 순간은 1990년대 인디 혁명의 상징적 재회였다. <슬래커>, Reservoir Dogs(저수지의 개들, 1992), 케빈 스미스(Kevin Smith)의 Clerks(점원들, 1994) - 이 영화들은 모두 누벨바그 정신의 미국적 부활이었다. 하지만 링클레이터는 씁쓸하게 덧붙인다: "그 인디 혁명은 사라졌다. 돈이 없으면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3]
링클레이터는 Boyhood(보이후드, 2014)로 12년에 걸쳐 한 소년의 성장을 실시간으로 기록했다. 이 프로젝트는 누벨바그의 시간성과는 다른 차원이지만, '과정으로서의 영화'라는 점에서 연결된다. 고다르가 즉흥적으로 영화를 만들었다면, 링클레이터는 계획적으로 시간을 축적했다.[12]
<누벨바그>는 어떤 의미에서 링클레이터의 영화 인생 전체를 12년이 아닌 순간적으로 압축한 작품이다. 그는 말한다: "이 영화를 만들면서 나는 28세, 29세로 첫 영화를 만들 때의 기분이었다. 초보자의 마음(beginner's mind)을 가졌다". 하지만 동시에 "수십 년의 경험과 자신감이라는 기반 위에 앉아 있었다".[10]
링클레이터는 <누벨바그>를 "느슨한 3부작"의 일부로 언급한다. Me and Orson Welles(나와 오슨 웰스, 2008)는 젊은 오슨 웰스를 다뤘고, <누벨바그>는 젊은 고다르를, 그리고 현재 개봉 중인 Blue Moon(블루 문, 2025)은 "경력의 끝"을 다룬다. 이는 예술가의 생애주기를 추적하는 메타 프로젝트다.[10]
웰스와 고다르 - 둘 다 "20세기의 중요한 예술가, 아이콘이자 혁신가"였다. 하지만 웰스는 할리우드 시스템과의 투쟁에서 결국 패배했고, 고다르는 시스템 바깥에서 독립성을 유지했다. 링클레이터 자신은 이 둘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다 - 가끔 스튜디오 영화(School of Rock, 2003)를 만들면서도 인디 정신을 유지하려 애쓴다.[10]
링클레이터는 인터뷰에서 비평가의 역할을 옹호한다: "비평가의 역할은 모든 예술에서 정말 중요하다. 역사를 알고 개념적으로 당신이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이는 고다르와 트뤼포가 감독이 되기 전 비평가였던 것을 상기시킨다.[10]
고다르는 Cahiers du Cinéma에 기고하며 알프레드 히치콕(Alfred Hitchcock)을 옹호했고, 할리우드의 B급 장르 영화들을 재평가했다. 이러한 비평 활동이 그의 영화 문법을 형성했다. À bout de souffle 자체가 갱스터 영화에 대한 비평적 에세이다.
링클레이터는 공식적인 비평가는 아니었지만, 비디오 가게를 운영하며 영화를 큐레이션했다. 이는 다른 형태의 비평 실천이다. <누벨바그>는 그의 가장 명시적인 '비평 영화'이며, 동시에 가장 개인적인 고백이기도 하다.
링클레이터는 칸에서의 기립박수에 대해 냉소적이다: "요즘에는 기립박수의 인플레이션이 있다. 그래서 받느냐 안 받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오래 계속되느냐가 문제다". 이는 페스티벌 문화의 공허함을 지적하는 것이다. 기립박수는 예술적 가치의 척도가 아니라 사회적 의례가 되었다.[10]
하지만 동시에 링클레이터는 인정한다: "상을 받으면 영화가 주요 배급사를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예술과 시장의 관계는 1959년이나 2025년이나 변하지 않았다. 고다르는 À bout de souffle로 상업적 성공을 거뒀지만, 그것은 의도하지 않았다. 링클레이터는 상업적 성공을 원하지만, 예술적 순수성을 잃고 싶지 않다. 이 긴장이 <누벨바그>의 중심에 있다.[8]
링클레이터는 프랑스 프로듀서 로랑 페탱(Laurent Pétin)에게 직접 접근했다: "당신은 이것을 사랑하거나 싫어할 것이다". 페탱은 긍정적으로 반응했고: "아니요, 우리는 당신의 비전을 이해합니다!" 하지만 캐스팅에 대해서는 충돌이 있었다. "그들은 몇몇 이름을 제안했지만 나는 '아니요, 무명으로 갑니다'라고 고집했다".[8]
이는 제작의 정치학을 드러낸다. 프로듀서는 유명 배우를 원하고(마케팅 가치), 감독은 무명을 원한다(진정성). 결국 링클레이터가 이겼지만, 그것은 그가 이미 명성을 쌓았기 때문이다. 젊은 고다르는 이런 협상력이 없었고, 드 보레가르와의 갈등이 그 결과였다.
<누벨바그>는 영화에 관한 영화(À bout de souffle)를 만드는 과정에 관한 영화다. 이는 3중의 재귀성을 만든다. 관객은 링클레이터가 고다르가 영화를 만드는 것을 재현하는 것을 본다. 각 층위는 이전 층위를 액자화하면서 동시에 의문시한다.
앙드레 지드(André Gide)의 mise en abyme(액자 속의 액자) 개념이 문학에서 구현되었다면, <누벨바그>는 영화사적 mise en abyme다. 거울이 거울을 비추듯, 영화가 영화를 비춘다. 하지만 각 반사에서 무언가가 변형되고, 왜곡되며, 새로운 의미가 생성된다.
링클레이터가 "이 영화의 모든 쇼트는 1959년부터 1962년 사이에 들어맞는다"고 주장할 때, 그는 시간을 접으려 한다. 1959년과 2025년을 동시에 존재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이는 불가능한 시도지만, 그 불가능성 자체가 영화의 아름다움을 구성한다. 시간은 접히지 않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계속해서 접으려 시도한다. 영화의 본질이 바로 이 불가능한 욕망 - 과거를 현재로, 죽은 자를 살아있게, 부재를 현존으로 - 에 있기 때문이다.[8]
Reference 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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