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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파르 파나히(Jafar Panahi)의 <그저 사고였을 뿐>은 제목부터가 이란 이슬람 공화국 체제가 강요해온 역사적 망각의 수사학을 전복시킨다. '그저 사고였을 뿐'이라는 말은 국가 폭력을 우연과 불가피성의 영역으로 축소시키려는 권력의 언어이지만, 파나히는 이를 빼앗아 그 안에 숨겨진 잔혹한 의도성을 폭로하는 도구로 재전유한다. 2025년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베를린 금곰상, 베니스 금사자상에 이어 3관왕을 달성한 네 번째 감독이 된 그는, 이 작품을 통해 단순히 정치적 증언을 넘어 감각의 정치학과 기억의 윤리학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제기한다.[1][2][3]
영화는 한밤중 에그발(Eghbal, 에브라힘 아지지 Ebrahim Azizi 연기)이 만삭의 아내와 어린 딸을 태우고 운전하다 개를 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아내가 "신의 뜻"이라고 말하자, 딸은 즉각적으로 반박한다: "당신이 조심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신은 아무 상관이 없어요". 이 한 문장은 영화 전체의 철학적 토대를 구축한다 - 파나히가 인터뷰에서 밝혔듯, 딸은 "어둠의 심장에서 나온 새로운 세대"를 상징하며, 가족의 이데올로기적 핵심을 몇 마디 말로 타격한다.[2][3][4]
이 대사는 앨베르 카뮈(Albert Camus)의 『페스트』에서 파늘루 신부와 리외 의사 사이의 신학적 논쟁을 연상시킨다. 신의 섭리로 모든 것을 정당화하려는 종교적 결정론과,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는 실존적 윤리 사이의 갈등이다. 파나히는 이 대립을 2022년 마흐사 아미니(Mahsa Amini) 사망 이후 촉발된 '여성, 생명, 자유(Woman, Life, Freedom)' 운동의 맥락으로 치환한다. 이슬람 공화국이 신의 이름으로 여성의 몸을 통제하고 히잡을 강요해온 신정(神政) 체제에 대한 직접적 도전이 바로 이 어린 딸의 입을 통해 선언되는 것이다.[3]
에그발의 차가 고장 나 정비소에 들어섰을 때, 정비공 바히드(Vahid, 바히드 모바세리 Vahid Mobasseri 연기)는 그의 의족이 내는 특유의 삐걱거리는 소리를 듣고 과거 자신을 고문한 정보관이라 확신한다. 하지만 투옥 당시 눈을 가린 채로만 심문을 받았기에, 그는 고문자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오직 청각적 기억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5][2]
이 설정은 미셸 시옹(Michel Chion)이 제시한 '아쿠스메트르(acousmêtre)' 개념을 전복시킨다. 시옹의 이론에서 아쿠스메트르는 소리는 들리지만 화면에 보이지 않는 존재로, 전지전능한 권력을 암시한다. 하지만 <그저 사고였을 뿐>에서는 반대로, 목소리와 얼굴이 아닌 '의족 소리'만이 권력의 표지가 된다. 프랑스어 교육 자료에서 지적되듯, 수감자들은 이 소리의 주인공을 "l'éclopé(절름발이)" 또는 "la guibole(다리)"라고 불렀다 - 인간이 아닌 신체 부위로 환원된 고문자의 이미지.[6]
파나히는 인터뷰에서 이 청각적 트라우마에 대해 언급했다: "모든 수감자들은 소리에 대한 강박을 갖게 되고, 심문관의 목소리에 사로잡힌다". 영화는 이를 극대화하여, 마지막 시퀀스 전체를 의족 소리 하나로 구축한다. 이는 로베르 브레송(Robert Bresson)이 『시네마토그래프에 관한 단상』에서 말한 "귀는 눈보다 더 창조적이다"라는 명제의 가장 정치적인 구현이다.[4][6]
영화의 핵심적 아이러니는 피해자들 모두가 안대를 쓴 채 고문당했기에 누구도 에그발의 정체를 확신할 수 없다는 점이다. 바히드는 다른 전직 수감자들 - 서점주인 살라르(Salar), 웨딩 포토그래퍼 시바(Shiva), 신부 골리(Goli), 신랑 알리(Ali), 분노한 노동자 하미드(Hamid) - 을 차례로 모아 확인을 요청하지만, 모두가 불확실성 속에서 망설인다.[2][5]
이 안대 모티프는 정의의 여신 유스티티아(Justitia)의 눈가리개를 연상시키지만, 그 의미는 정반대로 작동한다. 유스티티아의 눈가리개가 공정한 판단을 상징한다면, 여기서 안대는 진실에 대한 접근 자체를 차단하는 국가 폭력의 도구다. 플라톤의 동굴 비유가 지식의 가능성을 제시했다면, 파나히의 안대는 지식의 불가능성, 그럼에도 판단을 내려야 하는 윤리적 딜레마를 제기한다.[7]
특히 시바가 웨딩 포토그래퍼라는 설정은 의미심장하다. 그녀의 직업은 행복한 순간을 '보고' '기록하는' 것이지만, 정작 자신의 트라우마의 순간은 보지 못했다. 이는 메타영화적 차원에서 파나히 자신의 상황을 반영한다 - 그는 이란 사회를 기록하는 영화감독이지만, 15년간 자신의 영화가 상영되는 것을 관객과 함께 '보지' 못했다.[4]
영화의 상당 부분이 밴 안에서 진행되는 것은 단순한 제작상의 편의가 아니다. 파나히는 이를 인정하면서도 "지하 영화를 만들 때 차는 최소한의 안전을 제공한다. 정보기관으로부터 숨기가 더 쉽다"고 말했다. 하지만 동시에 이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Abbas Kiarostami) 이래 이란 영화의 전통적 모티프이기도 하다.[4]
밴은 '이동하는 감옥'이자 '재판정'이며 '고해실'이다. 좁은 공간에 갇힌 인물들은 각자의 고문 경험을 상세히 털어놓는데, 이 증언들은 영화 내 관객(서로)과 영화 밖 관객(우리)에게 동시에 전달된다.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의 『출구 없음(Huis Clos)』이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명제를 밀폐된 방에서 구현했다면, 파나히의 밴은 "국가는 지옥이다"라는 명제를 이동하는 공간에서 전개한다.[7]
특히 신부 골리가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로 밴을 주유소까지 밀어야 하는 장면은 , 코엔 형제(Coen Brothers)의 블랙 코미디를 연상시키면서도 이란적 특수성을 담는다. 결혼이라는 인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이 복수극과 겹쳐지는 아이러니, 그리고 신부라는 순결과 희망의 상징이 살인 공모자로 전락하는 과정은 국가 폭력이 시민의 도덕적 나침반을 어떻게 교란시키는지 보여준다.[8]
영화의 결정적 전환점은 복수의 여정이 '부수적 피해(collateral damage)'의 가능성과 마주하는 순간이다. 에그발에게는 임신한 아내와 어린 딸이 있으며, 그는 계속해서 자신이 잘못 잡혔다고 주장한다. 갑자기 피해자들은 자신들도 무고한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윤리적 딜레마에 직면한다.[9][7]
영화는 질문한다: "불의가 당신 존재의 조건이라면, 당신이 겪은 고통의 결과로 선택한 추가적 불의에 대해 개인으로서 얼마나 책임을 져야 하는가? 계산법이 있는가, 아니면 선을 그을 수 있는가? 아니면 권위주의 체제와 그들이 가하는 폭력이 도덕적 카오스를 만들어, 억압에 대한 투쟁에서 거의 모든 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7]
이는 프란츠 파농(Frantz Fanon)의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에서 제기된 반식민주의 폭력의 윤리학과 맞닿아 있다. 파농은 피억압자의 폭력을 해방의 필수 조건으로 보았지만, 파나히는 그 폭력이 또 다른 희생자를 만들 때의 딜레마를 정면으로 다룬다. 이는 21세기 중동 정치에서 반복되는 질문이기도 하다 - 팔레스타인, 시리아, 예멘에서 저항과 테러의 경계는 어디인가?
<그저 사고였을 뿐>은 파나히의 영화 중 여성들이 히잡을 쓰지 않은 채 등장하는 첫 작품이다. 이는 단순한 미학적 선택이 아니라 정치적 성명이다. 2022년 마흐사 아미니가 히잡을 제대로 착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도덕 경찰에 체포되어 사망한 후, 이란 전역에서 여성들이 공공장소에서 히잡을 벗는 시위가 확산되었다. 파나히는 이 운동을 "혁명"으로 규정하며, "이제 이란은 마흐사 아미니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선언했다.[3][4]
시바와 골리의 캐릭터는 이 맥락에서 읽혀야 한다. 시바는 타인의 행복을 기록하는 사진작가로, 자신의 트라우마를 객관화하고 거리를 두려는 시도를 상징한다. 골리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신부로, 과거와의 단절을 욕망한다. 하지만 둘 다 복수극에 연루되면서, 과거는 결코 쉽게 떠나보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파나히가 골리 역의 하디스 팍바텐(Hadis Pakbaten)을 캐스팅한 방식도 시사적이다. 그는 연극 공연에서 그녀가 "연기하지 않고" 단순히 텍스트를 낭독하는 모습을 보고 선택했다고 말한다: "그녀가 연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택했다. 만약 연기했다면 절대 선택하지 않았을 것". 이는 브레송의 '모델' 이론 - 연기가 아닌 '존재'를 추구하는 - 을 상기시키면서도, 동시에 파나히가 추구하는 네오리얼리즘의 핵심을 드러낸다.[3]
영화의 가장 급진적인 측면 중 하나는 에그발의 시점을 상당 부분 제공한다는 점이다. 그는 관 같은 공간에 갇혀 있고 , 자신의 무고함을 주장하며, 가족을 걱정한다. 관객은 점차 그에게 공감하기 시작하고, 납치범들의 행동에 불편함을 느낀다. 이는 전통적인 피해자-가해자 이분법을 교란시키는 전략이다.[9]
에드가 앨런 포(Edgar Allan Poe)의 『조숙한 매장(The Premature Burial)』이나 『검은 고양이』에서 생매장의 공포가 다뤄진다면, 여기서는 그 공포가 정치적 차원을 획득한다. 에그발이 정말로 고문자인가, 아니면 무고한 민간인인가의 문제는 끝까지 확실히 해결되지 않는다. 프랑스어 교육 자료가 지적하듯,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는 "두 가지, 혹은 세 가지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6]
영화는 거의 실시간으로 진행되는 듯한 긴박감을 유지한다. 이는 알프레드 히치콕(Alfred Hitchcock)의 『로프』나 프레드 진네만(Fred Zinnemann)의 『하이 눈』처럼 시간의 압박을 활용하여 서스펜스를 구축하는 전통을 따른다. 하지만 파나히의 실시간은 단순한 스릴러 장치가 아니라, 도덕적 결정이 이뤄지는 과정 자체를 해부하는 도구다.[10]
밴 안에서 벌어지는 격렬한 토론들은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의 '의사소통 행위 이론'의 극단적 시험대다. 이성적 대화를 통한 합의가 가능한가?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개인들이 집단적 정의에 도달할 수 있는가? 아니면 감정과 복수심이 이성을 압도하는가? 영화는 이 과정을 거의 다큐멘터리적 사실성으로 포착한다.
영화에서 가장 블랙 코미디적인 순간 중 하나는 경찰들이 휴대용 카드 리더기로 뇌물을 받는 장면이다. 현금이 없는 사람들도 편리하게 뇌물을 낼 수 있도록 디지털 결제 시스템을 도입한 것이다. 이는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악의 평범성' 개념을 2025년의 디지털 시대의 촌극으로 업데이트한다.[8]
부패가 너무나 일상화되어 기술적으로 '효율화'되는 상황은, 이란 이슬람 공화국이 표방하는 도덕적 순수성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파나히는 인터뷰에서 현재의 이란 정권을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경제적으로, 환경적으로 모든 관점에서 붕괴했다"고 진단하며, "오직 피상적이고 공허한 구조만이 돈과 폭력을 통해 국가를 지배하고 있다"고 말했다.[3]
촬영감독 아민 자파리(Amin Jafari)의 카메라 워크는 밴의 창문을 '프레임 내 프레임(frame-within-a-frame)'으로 활용한다. 밖의 테헤란 풍경은 창문을 통해 단편적으로만 보이며, 이는 수감자들의 제한된 세계관을 시각화한다. 존 포드(John Ford)의 『수색자』 마지막 장면에서 문틀이 문명과 야생의 경계를 표시했다면, 파나히의 밴 창문은 자유와 감금의 경계를 표시한다.[3]
특히 밴이 테헤란 거리를 지나갈 때, 창밖으로 히잡을 쓰지 않은 여성들이 보인다. 이는 영화 내부의 정치적 긴장과 외부의 사회적 변화를 대비시키는 장치다. Woman, Life, Freedom 운동 이후, 이란 사회는 근본적으로 변화했고, 파나히는 이를 배경으로 자연스럽게 포착한다.
파나히의 이전 영화들 -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2011), 『택시』(2015), 『3개의 얼굴』(2018), 『곰은 없다』(2022) - 은 모두 감독 자신이 등장하여 영화 만들기의 제약과 씨름하는 메타영화적 구조였다. 하지만 <그저 사고였을 뿐>에서 그는 화면에 등장하지 않는다.[4][3]
파나히는 이에 대해 "금지령이 해제되자마자 나는 어떤 감독의 상황으로 돌아갔다. 나 자신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 내가 감옥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작품을 헌정할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이는 자기반영적 시네마에서 타자 지향적 시네마로의 전환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감독의 직접적 부재가 오히려 그의 경험을 더 보편화시킨다. 바히드를 비롯한 모든 캐릭터는 파나히의 분신이자 동시에 수많은 이란 시민들의 대리인이다.[4]
영화는 "섬뜩한 소리와 한 남자의 고정된 이미지"로 끝난다. 의족 소리가 다시 들리는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관객의 해석에 맡겨진다. 이는 알랭 로브그리예(Alain Robbe-Grillet)의 누보로망이나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Michelangelo Antonioni)의 모호한 결말을 연상시키지만, 여기서는 정치적 긴급성이 더해진다.[6][9]
만약 에그발이 정말 고문자였고 그들이 그를 죽였다면, 정의가 실현된 것인가?
만약 그가 무고했다면, 피해자들은 국가와 똑같은 가해자가 된 것인가?
아니면 셋째 가능성 - 그를 살려주었지만 트라우마는 계속된다는 의미인가?
파나히는 이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다.
칸 영화제 심사위원장 쥘리에트 비노슈(Juliette Binoche)는 황금종려상 시상식에서 말했다: "예술은 '도발적'이며 '어둠을 용서와 새로운 생명으로 변화시키는 힘'을 가진다". 하지만 <그저 사고였을 뿐>은 그렇게 단순한 카타르시스를 거부한다. 파나히가 칸에서 한 수상 소감이 이를 증명한다: "오늘 나는 여기서 이 기쁨을 받지만... 이란에는 여전히 위대한 감독들과 배우들이 있는데, 그들은 Woman Life Freedom 운동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일을 금지당하고 있다. 내가 어떻게 기뻐할 수 있겠는가?"[11][3]
영화가 제기하는 질문들 - 정의와 복수의 경계, 피해자가 가해자가 될 가능성, 불확실성 속에서의 도덕적 판단 - 은 이란만의 문제가 아니다. 국가 폭력을 경험한 모든 사회, 식민주의와 독재의 유산을 안고 사는 모든 공동체가 직면하는 보편적 딜레마다.
한국의 5·18, 제주 4·3, 라틴아메리카의 군사독재, 남아프리카의 아파르트헤이트 이후 - 모든 '이행기 정의(transitional justice)'의 현장에서 같은 질문이 울려 퍼진다.
파나히는 "용기"라는 말에 불편함을 표한다. "나는 단지 내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진정으로 용감한 사람들은 감옥에 있거나 거리에서 싸우는 사람들이다". 이 겸손함이야말로 <그저 사고였을 뿐>의 윤리적 힘을 구성한다. 영화는 영웅을 만들지 않는다. 대신 평범한 사람들이 비범한 상황에서 어떻게 도덕적 선택을 하는지, 그리고 그 선택이 어떻게 또 다른 윤리적 문제를 낳는지를 섬세하게 추적한다. 바로 그 추적의 과정 자체가, '그저 사고'로 치부될 수 없는 역사의 무게를 증언하는 행위가 된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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