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의 <어쩔 수가 없다>는 제목부터가 역설의 완벽한 구현체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극단적인 선택을 감행하는 만수(이병헌)의 서사가, 현대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개인이 마주하는 딜레마의 본질을 예리하게 드러낸다. 도널드 웨스트레이크(Donald E. Westlake)의 소설 『액스(The Axe)』를 각색한 이 작품은, 원작의 미니멀하고 차가운 서사를 박찬욱 특유의 맥시멀하고 뜨거운 연출로 탈바꿈시켰다.
주인공의 이름 '만수(萬壽)'는 문자 그대로 '만 가지 장수'를 의미하지만, 동시에 '만족(滿足)'의 동음이의어로도 해석될 수 있다. 혹은 영화에 나오듯 '유지보수만 수차례' 한 존재라는 점을 나타내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모든 것을 다 가진 듯, 다 이룬 듯 보이지만 실상은 허상에 불과한 현대 중산층의 존재론적 불안을 함축한다.
그의 집 마당에 배치된 두 마리의 개 '시투(Si-Two)', '리투(Ri-Two)'는 아들 '시원', 딸 '리원'의 보완재로 가족들에게서 인식되는데, 여섯 가족의 완전함을 위한 인위적 보완물의 성격을 갖는다. 식구를 줄인다는 미리가 시투와 리투를 친가로 보내는 과정 또한 가족단위에서 벌어지는 '정리'와 병치된다. 그 과정에서 식구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나머지 셋(만수, 시원, 리원)이 긴장하는 장면은 그 상황에서 미리만이 시투와 리투를 가족으로 실상 여겼음을, 동시에 비용으로 여기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손예진이 연기한 아내 미리의 이름 역시 흥미로운 기호학적 차원을 갖는다. '미리'는 시간적 선취를 의미하는데, 이는 그녀가 남편의 행동을 예견하고 심지어 조력하거나 묵인하는 캐릭터로 발전하는 서사적 복선이 된다.
손예진의 미리는 단순한 희생자나 방관자가 아니라 남편의 선택에 능동적으로 개입하는 존재다. 그녀의 캐릭터 아크는 초기의 순진한 주부에서 점차 현실적 공모자로 발전하는데, 이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이 생존을 위해 선택하는 전략적 적응을 보여준다. 특히 후반부에서 그녀가 보여주는 행동들은 전통적인 여성성의 고정관념을 교란시킨다.
박찬욱은 세 번의 살인 시도를 혼합된 장르적 코드로 변주시킨다. 슬랩스틱 코미디, 서스펜스 스릴러, 액션 영화의 문법을 혼종시켜낸다. 이러한 장르적 진화는 만수의 심리적 변화와 대응된다.
특히 각 타겟이 제지업계 전문가라는 설정은 자본주의적 경쟁구조의 근본적 모순을 드러낸다. 동일한 전문성을 가진 중산층 남성들이 서로를 제거해야 하는 상황은, 마르크스가 지적한 '프롤레타리아의 내부 분열'을 중산층 계급 차원으로 확장한 것이다.
박찬욱이 구축한 서사 구조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형태를 바꾼다. 전반부의 어수룩한 슬랩스틱 코미디는 루니 튠즈 카툰이나 코엔 형제의 <애리조나 유괴사건>을 연상시키는데, 이는 단순한 오마주를 넘어서 장르적 관습에 대한 메타적 성찰이다. 만수가 첫 번째 표적을 제거하려다 허둥지둥하는 장면들은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에서 공장 시스템에 소외된 노동자의 몸짓을 차용하면서도, 동시에 그 코미디적 몸짓 안에 현대적 절망을 내재화시킨다.
감독은 "웃길수록 연민이 더 커지고 비극성이 더 잘 드러난다"고 말했는데 , 이는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의 소외효과와 궤를 같이한다. 관객이 만수의 행동에 거리감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공감하게 만드는 이 이중성은, 현대 자본주의 체제가 개인에게 강요하는 모순적 상황의 은유일 것이다.
김우형의 촬영은 자연의 강렬한 밝기와 갈등과 폭력의 어두운 갈색 인테리어를 대비시켜 계급적 현실을 시각화한다. 전반부에서 사용된 밝은 조명과 표현적 색채는 만수 가족의 중산층적 환상을 구현하는 반면, 후반부의 어둡고 음침한 톤은 그들의 몰락과 도덕적 타락을 암시한다. 이러한 조명의 변화는 단순한 분위기 연출을 넘어,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 개인이 경험하는 정신적 지형의 변화를 물질적으로 구현한다.
특히 범모(이성민)의 오디오룸에서 벌어지는 시퀀스는 박찬욱 미장센의 정수를 보여준다. 클래식 음악이 최대 볼륨으로 울려 퍼지는 가운데 벌어지는 생존을 위한 격투는, 문명의 정점에서 벌어지는 원시적 폭력의 아이러니를 극대화한다. 음악으로 인해 대사가 거의 들리지 않는 상황은 의도적인 감각적 혼란을 통해 현대인의 소통 불가능성을 시각화한다.
만수가 '범모', '시조', '선출' 순서로 살인을 저지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범모(凡模)는 '평범한 모범'을, 시조(始祖)는 '시작하는 조상' 혹은 사라진 예술의 한 형태인 '고시조(古時調)'를, 선출(選出)은 제로섬 게임에서 '뽑힘'을 떠올리게 한다. 이는 만수가 마치 평범한 모범을 '죽인 것'에서 시작해서 조상적 위치 혹은 지난 예술의 형태를 '살해함'을 거쳐 최종적으로 선택받는 존재(그를 죽이고)가 자신이 되는 과정을 상징한다.
또한 각 살인마다 만수가 "손에 할 말들을 빨간 펜으로 적어두는 행위"를 반복하는 것은, 면접과 살인이 완전히 치환되었음을 보여준다. 빨간 펜은 피를 연상시키는 색깔이면서 동시에 면접자들의 이력서에 대한 교정과 평가의 도구로 그려진다. 만수는 자신의 경쟁자들을 '채점'하고 '교정'하며, 궁극적으로 '삭제'한다.
만수의 살인이 면접과 겹쳐지는 순간들은 현대 자본주의의 가장 냉혹한 진실을 드러낸다. 면접이라는 것이 결국 타인을 제거하고 자신만이 살아남는 과정임을 박찬욱은 문자 그대로 구현해낸다. 시조(차승원)와의 만남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과정들은 사실상 가장 잔혹한 형태의 '면접'이다 - 사실상 동일한 두 명(아반떼, 딸 등의 병치구성)이 한 명만 살아남는. 이는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개념을 현대적 고용 시장으로 치환한 것이다.
특히 주목할 것은 만수가 각각의 타겟을 만날 때마다 보여주는 연기적 태도의 변화다. 처음에는 서툴고 어색했던 그의 '연기'가 점차 정교해지면서, 결국 그는 완벽한 면접자가 되어간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요구되는 '가면 쓰기'의 극단적 버전일 것이다.
영화에서 뱀은 다층적 상징체계를 구축한다. 범모의 집에 등장하는 뱀은 우선 아라(염혜란)의 외도(남자 등의 문신)를 상징하는 존재로 기능한다. 그녀의 유혹과 배신, 그리고 기존 정체성에서 벗어나 배우가 되려는 욕망은 뱀의 탈피와 대응된다. 하지만 동시에 뱀은 만수의 남성성과도 연결된다 - 그의 억압된 성적 욕망과 폭력적 충동이 뱀처럼 꿈틀거린다. 범모의 살인을 두 사람의 두 발의 총알로 이뤄낸 뒤, 오솔길과 차도로 이어지는 뱀의 형상을 한 길을 따라 이뤄지는 그 총격과 추격 시퀀스에서도 '뱀'은 시각적으로 소환된다.
성경적 맥락에서 뱀은 지식의 나무 앞에서 하와를 유혹한 존재다. 만수가 마주하는 각각의 상황들은 모두 일종의 '선악과'를 앞에 두고 벌이는 선택이다. 특히 고추(성기)로서의 뱀의 상징성은 남성 중심적 가부장제의 위기와 직결된다. 만수의 실직과 오진호의 등장, 범모의 실직과 외연남의 등장은 곧 '거세 불안'으로 이어지고, 만수의 살인 행위는 이러한 불안에 대한 과잉 보상 메커니즘으로 작동해버린다.
돼지는 이 영화에서 죽음과 매장, 그리고 순환의 상징이다. 만수의 아버지가 키우던 돼지들의 떼죽음은 한국 근현대사의 축소판이다 - 산업화 과정에서 희생된 수많은 개별자들의 운명을 압축한다. 만수 아버지의 돼지 농장이 있던 자리가 현재 만수가 사는 중산층 노동자들이 살아가는 빌라단지 지역이 되었다는 설정은, 돼지가 묻힌 자리에 사과나무가 자라나고, 피살된 자들의 자리에 사과나무가 자라나고, 아이폰이라는 '비싸게 팔리는 것들'의 자리에 사과나무가 자라나는 것과 대응된다. 과거의 희생이 현재의 토대가 되는 순환의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시원이가 훔친 아이폰을 부모가 묻는 행위 역시 돼지 매장의 연장선상에 있다. 가족을 복원하려는 뒤틀린 욕망의 산물(아이폰)을 땅에 묻는 것은 물질 문명에 대한 상징적 거부이면서, 동시에 가족 내 위계질서의 복원 의식이다. 만수가 시조를 죽인 곳을 두고 미리가 시원에게 "돼지를 토막내 묻었다"고 말하는 장면은, '실직된 인간'을 '병걸린 돼지'의 층위로 격하시키는 자본주의의 비인간화 과정이 가족 단위의 미시적 단위에서 조차 재현되고 있음을 폭로한다.
만수의 분재 취미는 그의 인생관을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메타포다. 분재는 자연을 인위적으로 조작하여 미니어처로 만드는 행위인데, 이는 만수가 자신의 삶과 가족을 대하는 방식과 정확히 일치한다. "모든 게 계획대로" 되어온 그의 삶은 사실상 하나의 거대한 분재 작품이었다.
시조를 죽일 때 만수가 기계적으로 "톱으로 썰지 못하고" 결국 "분재하듯" 죽이는 장면은, 그의 강박적 통제 욕망이 살인에까지 미치는 순간을 보여준다. 이는 쿠엔틴 타란티노(Quentin Tarantino)의 <킬 빌>에서 보여지는 일본식 검술의 정교함과 대비되는, 아마추어적이지만 집착적인 폭력의 형태다. 분재가 나무의 자연스러운 성장을 억제하고 왜곡시키듯, 만수는 타인의 생명을 자신의 미학적 기준에 맞춰 '정리'한다.
영화에서 나무는 생명력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죽음의 은유로 기능한다. 범모를 상징하는 배나무가 "병들어 죽어가고 있는" 모습은 희망과 사랑을 잃은 그의 내적 상태를 시각화한다. 배나무가 사랑과 희망을 상징한다는 전통적 해석을 따르면, 범모의 삶에서 이미 모든 의미가 고갈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만수가 시체들을 묻은 땅에 과실수를 심는 행위는 가장 섬뜩한 순환 구조를 만들어낸다. 미리가 아들에게 "그 나무 아래엔 돼지가 묻혀 있어서 나무가 그 양분을 먹고 무럭무럭 자랄 것"이라고 말하는 장면은 , 현대 문명 자체가 누군가의 희생 위에 뿌리내린 것임을 암시한다. 이는 엘리아데(Mircea Eliade)의 '신화의 영원회귀' 개념을 현대적으로 변주한 것이리라.
사과나무의 벗겨진 껍질 이미지는 더욱 복합적이다. 사과는 선악과의 원형이면서 동시에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을 떠올리게도 한다. 사과 껍질이 뱀의 허물처럼 벗겨진 인서트 컷은 그 안에 또다른 폭력을 낳게될 사과의 씨앗이 있음을, 문명이 몰멸하는 때, 원시 상태로 우리가 회귀하게 될 것임을 예고하듯 한다.
박희순(선출)을 죽이는 방식은 이 영화에서 가장 정교하게 계산된 살인이다. 만수가 그를 "나무를 심듯 파묻은 채" 돼지고기 프레스햄과 술을 강제로 먹여 죽이는 장면은 여러 층위의 의미를 담고 있다. 우선 이는 만수가 수년 전 죽을 뻔했던 "술로 인한 질식사"를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 - 만수는 결국 자신의 죽음을 재현하는 셈이다.
프레스햄을 사용하는 것은 돼지 이미지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산업적으로 압축된 고기를 강제로 먹이는 행위는 현대 자본주의의 대량생산 시스템을 인간에게 역적용시키는 잔혹한 아이러니다. 마치 공장식 축산업에서 돼지들이 사료를 강제로 먹듯, 선출은 자신과 같은 처지의 동물성 먹이를 강요받는다.
"나무를 심듯" 선출을 묻는다는 이미지는 장례 의식의 전복이다. 전통적으로 나무 심기는 생명의 시작을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죽음의 은폐 수단이 된다.
만수의 몸은 신자유주의가 개인에게 각인하는 폭력의 현장이다. 그의 어색하고 자신감 없는 몸짓은 현대 직장인의 신체화된 불안을 구현한다. '골치아픈' 상태에서 치과 치료를 미루는 설정은 단순한 캐릭터 디테일을 넘어, 마침내 모든 살인을 마치는 상황에서 그 '골치 아팠던 상황'을 정리하는 것으로, 그리고 자신의 피를 흘리고 머금고 삼키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네 시퀀스들은 영화의 시간성과 공간성을 재구성하는 핵심 장치다. 리원이와 아빠의 "고백 아닌 고백" 장면에서 시작해서, 시원이가 부모의 온실 장면을 떠올리는 악몽 시퀀스, 그리고 미리가 홀로 진자운동을 하는 순간까지 - 이는 가족 구성원 각자가 진실과 거짓, 죄책감과 해방감 사이를 오가는 심리적 진자운동을 시각화한다.
마지막에 "아무도 그 자리에 앉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도 그네가 계속 진자운동을 벌이는 장면은, 라캉(Jacques Lacan)의 '주체의 부재' 개념을 연상시킨다. 모든 가족이 그 그네에 앉아있지 않을 때, 만수의 아버지라는 유령이 그 진자운동을 지속시키는 것처럼 그려지는 그 장면은 가부장제의 상징적 질서가 물리적 존재를 넘어서 작동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선출의 집에서 살해 현장을 빠져나가며 TV에 틀어놓은 "불멍"과 시원이가 넷플릭스를 볼 때 나타나는 불의 이미지는 현대인의 원시적 욕망을 보여준다. 불멍(불을 바라보며 멍하니 있는 것)은 유행하는 '힐링' 콘텐츠지만, 동시에 가장 원시적인 인간의 행위이기도 하다. 불을 '보는 것'과, 영화를 우리가 '보는 것'과도 연결지을 수 있을 것이다.
프로메테우스 신화에서 불은 신들로부터 훔쳐온 문명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불은 오히려 문명에서 벗어나 원시로 돌아가려는 욕망을 대변한다. 넷플릭스라는 최첨단 스트리밍 플랫폼에서 시원이가 불을 바라보는 행위는, 기술 문명 속에서도 인간이 여전히 원시적 본능을 갈구한다는 역설을 암시한다.
만수가 선출을 살인한 현장에 불멍 클래식 영상을 틀어놓는 것도 범죄의 흔적을 지우는 동시에, 폭력의 원시적 본성을 관음하는 의식을 재현한다. 시대가 달라졌어도, 그 '본다'는 의식이 관객석에서도 메타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감독은 폭로한다. 물론 불은 정화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파괴의 도구다 - 만수의 이중적 심리 상태를 은유하는 오브제로도 작동한다.
영화의 마지막에 리원이 "비에 젖은 흙발로 계단을 계급을 올라 시투와 리투, 그리고 미리에게 연주를 들려주는" 장면은 이 영화의 가장 아름답고도 섬뜩한 순간 중 하나다. 비는 전통적으로 정화의 상징이지만, 여기서는 오히려 죄악의 흔적을 묻혀내는 역할을 한다. 흙발은 대지와의 연결, 즉 아버지(혹은 아버지들)가 묻어놓은 시체들과의 물리적 접촉을 의미한다.
계단을 오르는 행위는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Sergei Eisenstein)의 <전함 포템킨> 오데사 계단 시퀀스와 비교하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바로 그 집단적 비극이 개인적 상승과 겹쳐서 그려진다. 리원의 첼로 연주는 '단위가 다른' 부르주아 문화의 정점이면서, 동시에 그 문화가 피와 죽음 위에 구축되었음을 보여주는 아이러니한 순간이다.
"비로소" 연주를 들려준다는 것은 '자폐된' 그녀가 마침내 '독립된' 예술가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 예술적 완성은 아버지의 범죄와 가족의 침묵이라는 토대 위에서만 가능했다는 것. 이는 테오도르 아도르노(Theodor Adorno)가 지적한 "아우슈비츠 이후의 시"와 같은 윤리적 딜레마를 제기한다.
박찬욱은 <어쩔 수가 없다>에서 사운드 디자인을 통해 계급 의식을 구현한다. 범모의 오디오룸에서 최대 볼륨으로 울려 퍼지는 클래식 음악은 부르주아적 교양과 원시적 폭력의 대비를 극대화한다. 음악으로 인해 대사가 들리지 않는 상황은 의도적인 소통 불가능성을 연출한다.
리원의 첼로 연주는 이러한 음향적 위계질서의 정점에 위치한다. 첼로의 깊고 풍부한 음색은 가족의 비밀을 감싸는 아름다운 베일 역할을 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 선율은 땅 아래 묻힌 시체들의 신음을 덮어버리는 기능도 함께 할 것이다.
만수 가족이 마침내 도달한 것은 완벽한 중산층적 정적, 혹은 '복원'이다. 모든 소음(경쟁자들)이 제거된 후에야 그들의 음악이 순수하게 울려 퍼질 수 있다. 이는 부르주아 예술, 그리고 그것을 향유하는 것에 대한 본질적 폭력성에 대한 박찬욱의 신랄한 고발이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 <어쩔 수가 없다>가 갖는 의미는 단순한 블랙 코미디를 넘어선다. 이는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 개인이 마주하는 실존적 위기의 가장 극단적 형태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러한 위기가 어떻게 가족이라는 최소 공동체를 통해 은폐되고 정당화되는지를 예리하게 해부한다. 박찬욱의 카메라는 우리 모두가 어느 정도는 만수일 수 있음을, 그리고 그것이 정말로 "어쩔 수 없는" 일일 수도 있음을 차갑게 인정한다.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클래식 음악, 특히 격투 장면에서 폭발적으로 울려 퍼지는 오케스트라 선율은 부르주아 문화에 대한 신랄한 패러디다. 모차르트의 숭고한 선율이 원시적 폭력과 병치되는 순간, 서구 문명의 이중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는 스탠리 큐브릭의 <시계태엽 오렌지>에서 베토벤 9번 교향곡과 폭력이 결합되는 방식을 연상시키지만, 박찬욱은 여기에 한국적 현실의 특수성을 덧입힌다.
영화가 '태양'으로 시작해서 '태양'제지에서의 해고로 이어지는 구조는 단순한 순환이 아닌 나선형 몰락의 서사다. 태양은 전통적으로 생명과 희망의 상징이지만, 여기서는 차가운 자본의 논리로 전락한다. 선출의 머리 위로 '고추' 화분을 떨어뜨리려던 시도가 실패하는 것은, 남성성(고추)과 태양(원시적 생명력)이 더 이상 직접적인 힘을 발휘하는 것이 좌절되고 있는 전환점에 다다랐음을 보여준다.
특히 빛바랜 '태양' 컴퓨터크리닝 간판을 뒤로 한 채 마누라와 다투는 선출의 모습과 어설프게 살인을 시도하려는 만수의 모습을 그린 시퀀스는, 과거의 영광(태양)이 현재의 초라한 현실(컴퓨터 세탁)로 전락한 상황을 압축한다.
만수가 태양제지, 파피루스, 그리고 레드페퍼라는 가상의 업체를 경유해 결국 '문'제지 혹은 '문제지'에 '면접'(이라쓰고 살인이라 읽을 것이다)을 통해 입사하게 되는 과정은, 고대 이집트의 파피루스(문명의 시작)에서 현대의 디지털 시대(문제지/問題紙)까지의 문명사적 궤적을 압축하려는 감독의 야망을 드러낸다.
만수가 마지막에 홀로 남은 공장에서 "여전히 예전과 같이 그곳을 두들기는" 모습은 시지프스 신화의 현대적 변주다. AI와 로봇이 대체한 노동 현장에서 인간은 더 이상 생산적 주체가 아닌 잉여적 존재가 된다. "소등"된 공장의 이미지는 단순한 조명의 문제가 아니라 그동안을 구가해온 산업 문명 자체의 종료를 의미한다.
제지 운반 기계와 뒤틀린 동선 속에 역행하고 롤을 두드리는 기계가 있음에도 만수가 수작업을 고집하는 것은, 기계 문명에 대한 최후의 인간적 저항이다. 이는 존 헨리(John Henry) 전설 - 기계와 경쟁한 철도 노동자의 이야기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만수의 저항은 영웅적이지 않고 오히려 비극적으로 무의미하다.
일부 관객들이 제기하는 "개연성 논란"과 "1점 테러"는 실제로 작품의 복잡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지적 한계를 드러낸다. 이들의 반응은 정규분포의 평균 이하에 위치한 "감정적 뇌동"의 결과물임이 아닌가 익숙한 의심이 들게 한다. 특히 "고등학교 때 주워들은" 문학적 지식의 수준에 머무른 영화 이해로는 박찬욱의 다층적 서사 구조를 파악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더불어 "골방 인플루언서"들이 이러한 멍청함을 증폭시키는 현상은 현대 미디어 생태계의 고질적 문제처럼 되었다. 유튜브나 틱톡의 알고리즘은 깊이 있는 분석보다는 즉각적이고 감정적인 반응을 선호하기 때문에, 진정한 영화적 성취가 왜곡되어 전달될 수 밖에 없다.
박찬욱은 <어쩔 수가 없다>를 통해 자신의 필모그래피뿐만 아니라 한국 영화사 전체에 대한 메타적 성찰을 시도한다. <오발탄>의 치통과 권총 모티브를 차용하면서도 , 1960년대의 절대적 빈곤과 2025년의 상대적 박탈감을 대비시킨다. 현대의 중산층이 느끼는 위기감은 과거의 물질적 곤궁과는 다른 차원의 실존적 불안이다.
공장의 "어둠"은 단순한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문학적, 영화적 전통 안에서 읽혀야 한다.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에서 프리츠 랑(Fritz Lang)의 <메트로폴리스>에 이르는 산업 영화의 계보 안에서, 박찬욱은 인공지능 시대의 새로운 소외를 그려낸다.
결국 <어쩔수가없다>는 "어쩔 수 없다"는 말 자체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진다. 과연 무엇이 정말로 "어쩔 수 없는" 것인가? 그리고 그 "어쩔 수 없음"을 누가, 어떤 방식으로 규정하는가? 만수의 극단적 선택은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시스템이 강요하는 논리적 귀결이며, 관객들은 그 끔찍한 합리성 앞에서 자신만의 윤리적 답을 찾아야 한다. 박찬욱의 카메라는 우리가 모두 잠재적 만수일 수 있음을, 그리고 그것이 정말로 "어쩔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가능성을 제시한다.
박찬욱은 자신의 필모그래피에 대한 메타적 성찰을 <어쩔 수가 없다>에 교묘히 직조한다. <올드보이>의 복수 서사나 <아가씨>의 계급적 전복과 달리, 이 작품은 개인의 선택이 체제적 모순에 의해 규정당하는 상황을 다룬다. 특히 "헤어질 결심이 시적이고 정적이라면 어쩔 수가 없다는 산문적이고 동적"이라는 감독의 언급은 , 자신의 작품 세계에 대한 의식적 반성을 보여준다.
영화의 결말에서 등장하는 AI와 로봇 기계들은 인간 노동자를 완전히 대체하는 미래에 대한 묵시록적 전망을 제시한다. 이는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가 기계 문명에 대해 제기했던 우려를 2025년의 맥락으로 업데이트한 것이다. 박찬욱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인간이 기계와 경쟁해야 하는 상황 자체의 부조리를 폭로한다.
결국 <어쩔 수가 없다>는 개인의 선택이란 것이 얼마나 제한적이고 조건적인지를 묻는다. 그 자유의지라는 환상. 만수의 '어쩔 수 없는' 선택들은 실상 신자유주의 체제가 개인에게 강요하는 가혹한 게임의 규칙을 따른 것에 불과하다. 박찬욱은 이 작품을 통해 현대 한국 중산층이 마주한 실존적 위기를 해부하면서, 동시에 그 위기가 결코 개인적 차원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을 예리하게 지적한다.
영화는 마지막까지도 쉬운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과연 '어쩔 수 없다'는 말로 모든 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어쩔 수 없음' 자체가 누구에 의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가? 박찬욱의 이 신작은 단순한 오락 영화를 넘어서, 현대인의 실존적 조건에 대한 냉혹하면서도 따뜻한 성찰을 제공하는 작품으로 기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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