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카 구아다니노(Luca Guadagnino)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Call Me by Your name, 2017)은 표면적으로는 1983년 이탈리아 북부를 배경으로 한 17세 소년과 24세 청년 사이의 여름 로맨스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시간의 층위"와 "욕망의 지질학"을 탐구하는 철학적 명상을 그린다. 제임스 아이보리(James Ivory)의 각본과 구아다니노의 연출이 만들어낸 이 작품은 단순한 퀴어 로맨스를 넘어서 "기억이라는 매체가 어떻게 과거를 재구성하는가"라는 베르그송적 질문을 영화적 언어로 번역한다.
영화는 엘리오(티모시 샬라메)가 성인이 되어 과거를 회상하는 구조로 시작되지만, 이 회상 장치는 점차 투명해져서 관객은 "현재 진행되는 사건"을 목격하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구아다니노는 의도적으로 보이스오버를 한 번도 사용하지 않으며, 이는 기억이 언어화되는 순간 그 순수성을 잃는다는 인식을 반영한다.
엘리오가 올리버(아미 해머)에게 고백하는 순간의 핵심 대사—"당신이 알아줬으면 해서"—는 "사랑이라는 말을 담아내지 않고 고백의 순간을 만들어내는" 언어적 전략이다. 이는 오스카 와일드가 말한 "감히 그 이름을 말할 수 없는 사랑(The love that dare not speak its name)"의 현대적 변주이면서, 동시에 언어의 한계를 넘어선 소통 가능성을 탐구한다.
촬영감독 사욤부 무크디프롬(Sayombhu Mukdeeprom)과 구아다니노는 "자연광과 황금시간대의 빛만으로" 대부분의 장면을 촬영했다. 이는 단순한 미학적 선택이 아니라 "인위적 조명이 만드는 거짓된 친밀감"을 거부하고 "시간 자체가 만드는 자연스러운 변화"를 포착하려는 시도다. 특히 "오후에 길게 드리워지는 그림자, 저녁 무렵 인물을 감싸는 황금빛"은 현실감을 더하면서도 관객을 엘리오와 올리버의 세계로 끌어들인다.
펄먼(Perlman) 가족의 빌라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욕망의 지도"로 기능한다. 엘리오의 방에서 올리버의 방으로의 이동, 정원에서 호수로의 확장, 실내에서 실외로의 전이—이 모든 공간적 변화는 감정적 변화와 정확히 대응된다. 특히 "나무 그늘 아래서의 대화 장면"에서 자연광이 두 사람의 감정을 감싸는 방식은 공간 자체가 캐릭터로 기능함을 보여준다.
복숭아의 에로틱: 엘리오가 복숭아와 "관계"를 맺는 악명높은 장면은 단순한 충격 요소가 아니라 "자연과 인간, 순수와 타락의 경계"를 해체하는 철학적 실험이다. 복숭아라는 자연적 대상이 성적 욕망의 매개가 되는 순간, 문명과 자연의 이분법은 무너진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이 등장하는 장면은 "고전적 남성 아름다움"과 "현대적 욕망"의 연결점을 시사한다. 올리버의 몸이 다비드상과 겹쳐지는 순간, 르네상스 시대의 호모에로틱한 전통과 현대적 성정체성이 만난다.
두 사람이 함께 수영하는 장면들에서 물은 "욕망의 세례"이자 "정체성의 용해"를 상징한다. 특히 분수대 장면에서 물줄기가 조각상을 타고 흐르는 모습은 시간의 흐름과 욕망의 순환을 시각화한다.
펄먼 가족은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를 자유롭게 섞어가며" 의사소통한다. 이는 단순한 국제적 배경 설정이 아니라 "언어적 경계의 유동성"이 "성적 정체성의 유동성"과 평행함을 시사한다. 특히 엘리오의 어머니(아미라 카사르)가 'Mon Chéri'(프랑스어로 'My Darling')라고 아들을 부르는 것은 모성애가 국경을 넘나든다는 은유이자, 사랑 자체가 번역 불가능한 감정임을 암시한다.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소통은 "말로 이뤄지지 않는다". 엘리오와 올리버가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 손끝의 미세한 접촉, 함께 자전거를 타며 나누는 침묵—이 모든 것이 언어보다 더 직접적이고 정확한 의미 전달을 수행한다.
기차역에서 올리버를 맞이하는 장면은 "운명적 만남"의 클리셰를 피하고 대신 "일상 속 우연"의 자연스러움을 택한다. 카메라는 올리버의 카리스마를 과장하지 않고 그의 "무심한 자신감"을 담담하게 관찰한다. 이미 이 시점에서 구아다니노는 "로맨틱 판타지"가 아닌 "감각적 리얼리즘"을 추구함을 선언한다.
엘리오가 올리버의 방문을 두드리며 "자정에 만나자"고 제안했지만 거절당하는 장면은 "욕망의 비대칭성"을 보여준다. 구아다니노는 이 거절을 비극적으로 과장하지 않고 오히려 "욕망의 교육 과정"으로 제시한다. 올리버의 "Not now"라는 대답은 거부가 아닌 "때의 문제"임을 암시한다.
엘리오가 여자친구 마르치아(에스더 가렐)와 영화를 보는 장면은 "의무적 이성애성"에 대한 탐구다. 그가 마르치아와 관계를 가지면서도 올리버를 생각하는 것은 "성적 정체성의 고정성" 신화를 해체한다. 이는 아드리엔 리치가 말한 "강제적 이성애" 개념의 영화적 구현이다.
두 사람이 함께 고고학적 유적지를 방문하는 장면에서 "과거의 석상들"과 "현재의 욕망"이 겹쳐진다. 특히 물속에서 건져올린 조각상들은 "잠재된 욕망이 표면으로 드러나는 과정"을 은유한다. 엘리오의 아버지(마이클 스틸버그)가 "우리 조상들이 이런 아름다움을 당연하게 여겼다"고 말하는 것은 동성애적 욕망의 "역사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장치다.
영화의 가장 논란적 장면인 복숭아 시퀀스는 "오나니즘의 시각화"를 넘어선 "자연과 문명의 경계 해체"를 다룬다. 엘리오가 복숭아를 "사용"한 후 올리버가 그것을 먹으려 하는 장면은 "타자의 욕망을 내화하는 과정"의 극단적 표현이다. 이는 라캉의 "타자의 욕망" 이론을 문자 그대로 구현한 것이라 하겠다.
두 사람의 로마 여행은 "사랑의 절정"이자 동시에 "종료의 예고편"이다. 로마라는 "영원의 도시"에서 두 사람이 경험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사랑의 유한성"이다. 호텔 침실에서의 친밀감은 최고조에 달하지만, 동시에 올리버의 "약혼 소식"이라는 현실이 침투한다.
엘리오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건네는 마지막 조언—"슬픔을 지우려 하지 말고, 그 슬픔이 주는 축복을 받아들여라"—은 영화의 철학적 핵심을 요약한다. 이는 "고통 회피"가 아닌 "고통 수용"을 통한 성장을 제안하는 스피노자적 윤리학의 현대적 번안이라 할 수 있다.
벽난로 앞에 앉아 올리버의 전화를 받는 성인 엘리오의 모습으로 끝나는 에필로그는 "기억의 현재성"을 보여준다. 불길이 그의 얼굴을 비추는 빛의 변화는 "과거와 현재의 공존"을 시각화하며, 사랑이 "완료된 경험"이 아니라 "지속되는 상태"임을 시사한다.
영화에서 그리는 엘리오의 몸은 소크라테스가 디오티마(Diotima)로부터 들었다고 전하는 사랑 이론과 맞닿아 있다. 이는 "아름다운 몸→아름다운 영혼→아름다운 법과 관행→아름다운 앎→아름다움'"으로 이어진다는 소크라테스의 사랑론. 결국 궁극적으로 아름다움은 무엇에서 비롯되는가 이야기하려는 구아다니노의 "사랑의 단계론(Ladder of Love)"이라 하겠다.
기억을 통해 과거를 재구성하는 영화의 구조는 프루스트의 "무의지적 기억" 개념과 직결된다. 특히 복숭아라는 오브제가 "마들렌"처럼 기능하여 영화 속 엘리오의 감각적 기억을 되살리는 촉매 역할을 한다.
구아다니노가 자주 사용하는 "자연광을 통한 극적 명암"은 카라바조의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 기법을 영화적으로 번역한 것이다. 특히 실내 장면에서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 인물들을 비추는 방식은 바로크 회화의 종교적 숭고함을 세속적 사랑으로 전이시킨다.
1983년의 선택적 기억: 영화의 배경인 1983년은 "AIDS 공포가 덮치기 전, 성소수자들이 점차 사회에 목소리를 내던 시기"로, 이는 우연한 선택이 아니다. 구아다니노는 의도적으로 "성적 자유의 황금기"를 설정함으로써 현재의 복잡한 현실로부터 "목가적 도피"를 제공한다.
이는 "계급적 독해"의 한계를 보여준다. 구아다니노는 특권을 감추지 않고 오히려 "특권이 있어도 해결되지 않는 실존적 문제들"—정체성, 시간성, 상실—에 집중한다. 또한 이 영화의 진정한 성취는 "퀴어 경험의 보편화"에 있다. 성적 지향과 무관하게 모든 관객이 "첫사랑의 보편적 경험"으로 읽을 수 있게 만든 것이다.
"미학화" 자체가 구아다니노의 정치적 전략이다. 그는 "추악한 현실"에 대항하여 "아름다운 가능성"을 제시함으로써 "유토피아적 상상력"을 활성화시킨다. 이는 에른스트 블로흐의 "희망의 원리"를 영화적으로 구현한 것이며, 현실 도피가 아닌 "현실 변화를 위한 상상적 자원"을 제공한다.
구아다니노 자신이 "공개적으로 커밍아웃한 게이"이며, 이 영화는 그의 "개인적 경험"에서 우러나온 진정성을 갖는다. 그가 "사랑을 단 한 번만 경험했고 그 사람과 계속 함께하고 있다"고 고백한 것은 이 영화가 "관찰자의 시선"에서만이 아닌 "당사자의 증언"임을 보여준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루카 구아다니노가 "욕망 3부작"의 완결편으로 제시한 작품이지만, 실제로는 그의 모든 작품을 관통하는 "시간에 대한 철학"의 집약체다. 이 영화가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은 이유는 "퀴어 경험의 특수성"을 "사랑 경험의 보편성"으로 번역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현재, 이 영화의 "목가적 이상향"은 더욱 절실하게 느껴진다. 디지털 소통이 지배하는 시대에 "몸과 몸의 직접적 만남", 소셜미디어의 즉각적 소비문화에 대항하는 "천천히 익어가는 감정", 글로벌화된 문화의 획일성에 맞서는 "지역적 특수성"(이탈리아의 특정한 빛, 특정한 공간, 특정한 리듬)—이 모든 것이 "상실된 세계에 대한 그리움"을 자극한다.
하지만 이 영화의 진정한 성취는 "그리움 자체의 긍정"에 있다. 엘리오의 아버지가 말했듯이, "슬픔을 지우려 하지 말고 그 축복을 받아들이는" 것. 구아다니노는 상실을 치유의 대상이 아닌 "성장의 조건"으로 제시한다. 이는 "행복 추구"가 지배하는 현대 문화에 대한 근본적 도전이며, 동시에 "불완전성의 아름다움"에 대한 옹호다.
결국 'Call Me by Your Name'이라는 제목이 제시하는 것은 "정체성의 교환"이 아니라 "정체성의 확장" 가능성이다. 타인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자신이 되고, 자신의 이름을 내줌으로써 타인이 되는 "존재론적 순환". 이것이야말로 사랑이 인간에게 선사하는 가장 근본적 선물이며, 구아다니노가 132분 동안 구축한 "감각적 신학"의 핵심이다.
그리고 그 신학의 성전은 이탈리아 북부의 어느 빌라가 아니라, 영화를 보는 우리 각자의 기억 속에 세워진다. 매번 다시 볼 때마다 조금씩 다르게 보이는 영화, 시간이 지날수록 더 깊어지는 영화. 마치 사랑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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