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렌(테일러 러셀)과 리(티모시 샬라메)는 1980년대 러스트벨트의 황무지를 질주한다. 그들은 ‘이터(eater)’라는 기이한 종(種)―먹어야만 살아남는 식인(食人)-퀴어다. 루카 구아다니노(Luca Guadagnino)는 캄브리아 시대 화석처럼 고색창연한 아메리카나 로드무비를 끌어다, 그 피막 아래에 『폭풍의 언덕』식 파괴적 로맨스와 『프랑켄슈타인』식 존재론적 짐승을 이식한다.
루카 구아다니노의 『Bones and All』은 사랑의 본질을 물어뜯으며, 관객의 미각과 심장을 동시에 전율시킨다. 그 어떤 감독도 이렇게 파격적으로 “사랑”과 “식인(카니발리즘)”을 연결해 본 적이 없다. 이 영화는 인간 존재의 경계, 욕망의 ‘비(非)사회적’ 조건, 그리고 사랑이란 진정 무엇인가에 대해 신화적 깊이와 생물학적 냉혹함으로 침투한다.
이 영화의 두 주인공 마렌(테일러 러셀)과 리(티모시 샬라메)는 “이터(eater)”—사람을 먹어야 하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영화는 그들을 뱀파이어 같은 초월적 괴물이 아니라, 가장 외로운 아웃사이더로 그린다. 구아다니노는 그들이 사회에 속하지 못하는 소수자임을 거듭 강조하며, “우리 모두는 방식만 다를 뿐 아웃사이더”라고 말한다. 식인 행위조차 미식 취향이 아니라, 본능적 허기와 생존의 비극적 조건으로 다룬다.
식인이라는 퀴어적 연대는 단순한 욕동에 머물지 않는다. 구아다니노는 “욕망의 불가항력 이상의 고차원적 관계”가 가능함을, 식인을 통해 역설적으로 사랑의 본질을 드러낸다. 즉, 남들과 다르기 때문에 사랑할 수밖에 없는, 아웃사이더의 사랑. 네가 날 사랑한다면, 내 모든 것을 먹어줘—이 얼마나 극단적이고, 순수한 고백인가.
뼈를 물려받은 연인들은 타인의 살을 씹으며 ‘정상’ 사회를 벗어난다. 루카 구아다니노는 『Bones and All』에서 1980년대 러스트벨트를 배경으로, 식인(Man-Eater) 청춘 마렌과 리를 사랑 이야기의 주어로 세운다. 첫 장면에서 마렌이 친구의 손가락을 깨무는 클로즈업은 ‘식욕’이 아닌 ‘접촉’을 갈망하는 몸의 비명을 보여준다. 형광 조명 아래 울리는 Siouxsie and the Banshees의 “Cities in Dust”가 문명의 잔해를 예고하자, 카메라는 손가락의 섬세한 조직 대신 관객의 촉각 기억을 자극하는 심장박동음을 스며들게 한다. 그 즉시 영화는 고어를 멜로드라마로 치환하는 자기 방식—“잔혹함을 사랑으로 변조”하는 구아다니노의 서명을 각인한다.
버스 창문에 겹쳐지는 미국 중부의 들판은 『파라다이스 로스트』의 낙원 잔해처럼 스러져 있다. 아버지가 남긴 카세트테이프에 섞인 백색소음이 엔진 소리와 뒤엉키며 “나는 너를 지켜줄 수 없었다”는 한줄 독백을 흩뿌리는데, 이 음향 설계가 혈연의 무력감을 시각적 질감으로 번역한다. 길 위에서 마렌이 처음 만난 설리는 자신이 잡아먹은 사람들의 머리카락을 땋아 만든 목걸이를 걸고 나온다. 이 외설적 토템은 홀로코스트 기념관에 놓인 ‘머리카락 벽’을 연상시키며, “기억은 되새김질의 의례”라는 감독의 메시지를 물질화한다.
마렌과 리가 네브래스카 옥수수밭에서 함께 첫 사냥을 치를 때, 카메라는 줄창 시선 높이를 낮춰 잎사귀에 얼굴을 세게 부딪친다. 촬영감독이 16㎜ 필름을 고집해 얻어낸 거친 그레인은 살점을 물어뜯을 때 터지는 섬유질과 놀랍도록 비슷한 질감을 제공한다. 트렌트 레즈너와 애티커스 로스가 깔아 놓은 드론베이스 위로 80년대 라디오 히트곡이 겹쳐지면, 순수한 노스탤지어와 불순한 소음이 충돌해 “사랑인가 식욕인가”라는 질문이 청각적으로 선명해진다.
설리 다음에 등장하는 제이크는 ‘뼈까지 남기지 않고 먹는 행위’를 “본즈 앤 올”이라 명명한다. 이 순간 식인은 단순한 육체의 연소가 아니라, 관계를 완전 소화하며 상대의 역사를 자기 안으로 이식하는 급진적 친밀성으로 재정의된다. 영화는 여기서 에밀 시오랑의 “사랑은 상대를 삼킨다”는 역설, 그리고 디오니소스 신화 속 ‘분열적 포식’을 떠올리게 한다. 마렌과 리가 호숫가에서 입맞춤을 망설이다 역광 실루엣으로 얼어붙는 숏은, 그 두 개의 충동―포식과 포옹―을 한 프레임에 고정하며 몸의 윤리를 질문한다.
엔딩 욕실 시퀀스는 『폭풍의 언덕』의 “죽음 속 결혼”을 노골적으로 인용한다. 설리를 찢다시피 죽이고 피범벅이 된 연인은 서로를 부둥켜안는다. 브라우니 반죽과 옥수수 시럽으로 만든 혈액이 45℃ 온도로 분무돼 다시 흐르게 설계된 덕분에, 관객은 미지근한 피가 손바닥에 묻히는 듯한 감각을 체험한다. 죽어가는 리가 “뼈까지 전부 먹어 달라”고 청할 때, 카메라는 그의 뚫린 폐에 마렌이 입을 대는 모습을 키스 신처럼 래킹 포커스로 당긴다. 사랑과 식인의 경계가 완전히 붕괴하는 장면이자, ‘완전 수용’이라는 영화의 제목이 구체적 육체로 환원되는 순간이다.
이 영화는 미국 중서부의 거대한 풍광을 쓸쓸함과 아름다움의 복합체로 포착한다. 카메라는 로드무비의 언어로 방랑, 소외, 그리고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는 존재들”의 서사를 기록한다. 자연은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을 받아들이는 유일한 피난처이자, 절대적 법칙의 상징으로 작용한다. 자연은 무심하지만, 사랑에 굶주린 자들에겐 아직 집이 되어준다.
문학적 혈통도 다층적이다. 구아다니노는 캔자스의 평원을 달리는 로드무비 틀 위에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을 만든 사회” 논리를 얹고, 브론테 자매가 그린 ‘초월적 사랑’의 파괴성을 섞는다. 설리의 집착은 『라스 폰 트리에의 멜랑콜리아』에서 행성 충돌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초조에 가까운데, 그 긴장을 해소하는 방식이 ‘먹는 것’이라는 점에서 식인 욕망은 묵시록적 쾌락으로 탈바꿈한다.
비평적 반론도 만만찮다. 식인을 퀴어 은유로 쓰는 건 “소수자 욕망을 혐오와 동일시하는 위험한 환유”라는 지적이 있다. 그러나 구아다니노는 인터뷰에서 “이터는 괴물 아닌 외로운 자”라고 못 박으며, ‘타자화된 존재가 사랑을 통해 세상에 자리를 내는 법’을 신화적 잔혹담으로 드러내려 했다고 설명한다. 이 영화는 혐오를 복제하기보다 관객에게 ‘무조건적 수용’이 얼마나 난망한가를 체감시킨다는 것이 감독의 반론이다.
팬데믹 이후 신체 접촉이 금기와 구원의 이중 표상을 띠는 이 순간, 『Bones and All』은 “몸을 나누지 못하면 아무것도 나눌 수 없는” 피지컬 공동체의 열망을 거울처럼 비춘다. 동시에 레이건 시절 배경은 ‘나 홀로 생존’ 신화를 박제해, 트위터 밈 “#EatTheRich”의 시대정신을 씹어 먹는다.
구아다니노는 『Bones and All』로 “사랑의 모든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희망의 미학을 제시한다. 죽음이 생략된 채, 사랑만이 불사처럼 남는다. 그는 아웃사이더의 사랑을 성적·혈연·신분을 넘어선 본원적 초월로 찬미한다. 사람을 먹는 이터조차, 내면의 외로움과 열망을 드러낼 수 있다면—그 이야기는 끝내 로맨스가 된다.
이 영화는 “사랑을 뼈와 살, 그리고 심장까지 삼키는 것”이다.
구아다니노가 정말로 묻는 것은, 우리가 사랑할 때 어디까지 상대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일 것이다.
마렌의 대답은 “뼈까지, 그리고 사랑까지.” 그 답이 잔혹해서 아름답고, 아름다워서 몸서리친다.
그 대답 앞에서, 관객은 경악하고, 동시에 감동에 젖는다. 이게 바로 구아다니노의 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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