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충무로—에로영화가 국가정책으로 장려되면서도 표현의 자유는 가위질당하던 모순의 극장. 이해영 감독의 <애마>는 바로 이 아이러니의 심장부에 시네마적 수술칼을 들이댄다. 감독이 직접 밝힌 바와 같이, "벗기려고만 하는 야만의 시대"를 2025년의 시각으로 재해석한 이 작품은 단순한 시대극을 넘어선다. 그것은 영화에 관한 영화이자 권력에 관한 우화이며, 무엇보다 여성의 목소리가 남성의 시선을 역습하는 메타시네마적 복수극이다.
<애마>라는 제목 자체가 다층적 기표다. 1982년 안소영 주연의 실제 영화 <애마부인>을 직접적 레퍼런스로 삼으면서도, 이해영은 "애마를 단순한 캐릭터가 아니라 시대의 욕망과 대중의 욕망을 응집한 상징"으로 확장한다. 애마(愛馬)—사랑하는 말이라는 한자어는 여성을 동물화하는 가부장적 시선의 은유이면서, 동시에 그 '말'을 타고 질주하며 주체성을 되찾아가는 해방의 메타포로 변증법적 전환을 이룬다.
드라마는 정희란(이하늬)의 노출 연기 거부 선언으로 시작된다. 이 장면에서 이해영이 구사하는 미장센은 권력관계의 시각적 번역이다. 희란이 앉은 기자회견장의 높은 연단과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기자들의 앙각 쇼트는 일시적 권력 역전을 보여준다. 하지만 조명은 역설적이다. 희란을 비추는 스포트라이트는 무대조명이 아니라 심문실의 조명처럼 차갑고 직선적이다.
여기서 이하늬의 연기는 이중적 정체성을 구현한다. 그녀는 배우 정희란을 연기하는 배우 이하늬이면서, 동시에 1980년대 여배우를 연기하는 2025년 여배우다. 이런 메타연기적 층위는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 이론을 연상시킨다. 원본 없는 복사본들이 무한증식하는 하이퍼리얼리티의 세계에서, '진짜' 희란은 어디에 있는가?
특히 극의 초반부 파티 장면에서 희란은 구중호를 수영장에 "담그며" 굴복시킨다. 하지만 여기서 물은 정화의 매체가 아니라 굴욕의 매체로 작동한다. 구중호의 젖은 정장은 권위의 실추를 시각화하며, 관객들에게 권력자의 추락을 집단적으로 목격하는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반면 이후 다방 장면에서 구중호가 쌍화차의 계란 노른자를 "담그는" 행위는 복수의 전주곡이 된다. 노른자를 탁한 차 속으로 담기는 짧은 컷은 복수심의 방아쇠가 당겨졌음을 시각화한다.
희란이 계약서 때문에 조연으로 강등당하는 설정은 카프카적 관료주의의 영화적 구현이다. 문서라는 물신이 인간관계를 지배하는 순간, 법적 합리성이 인간적 합리성을 압도한다. 여기서 진선규가 연기하는 구중호는 단순한 악역이 아니라 시스템 자체의 의인화다.
구중호의 "가슴 한 번 까면 타는 차가 바뀌고, 두 번 까면 사는 집이 바뀌고, 세 번 까면 ..."이란 대사는 자본주의적 교환논리의 적나라한 공식화다. 이는 마르크스의 상품 페티시즘—인간관계가 사물관계로 전도되는 현상—을 성적 착취의 맥락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여성의 신체가 화폐가 되고, 노출의 정도가 환율이 되는 야만적 시장경제의 리얼리즘이다.
신주애(방효린) 캐스팅 에피소드는 <애마>의 메타시네마적 핵심이다. 이해영 감독이 "몇 천 명의 오디션 끝에 방효린을 만나고 엉엉 울었다"고 고백한 실제 캐스팅 과정이 극중 주애 발탁 과정과 완벽하게 미러링된다. 현실의 감독이 신인 배우를 발견하는 감동과, 픽션의 감독이 신인 캐릭터를 발견하는 감동이 이중노출된다.
이는 네오리얼리즘의 현대적 변주다. 비토리오 데 시카나 로베르토 로셀리니가 비전문배우를 통해 현실성을 추구했듯이, 이해영은 신인 방효린을 통해 1980년대 신인 배우의 현실성을 이중적으로 구현한다. 연기하지 않는 연기가 가장 진실한 연기가 되는 역설적 순간이다.
오디션 장면의 중앙의 방효린을 사방에서 둘러싼 심사위원들과 관찰자들, 그리고 관객의 시선은 판옵티콘적 구조를 시각화한다. 하지만 여기서 흥미로운 역전이 일어난다. 감시당하는 객체인 주애가 자발적 '옷 벗기'를 통해 주체적 에너지를 분출하면서, 관찰자들이 오히려 매혹당하는 권력관계의 전도가 발생한다.
주애의 탭댄스는 단순한 오디션 퍼포먼스가 아니라 저항의 언어다. 1930년대 미국 대공황 시대에 흑인 문화에서 발달한 탭댄스는 경제적 궁핍 속에서도 몸의 리듬을 통해 존재의 증명을 추구한 생존의 예술이었다. 주애가 나이트클럽 탭댄서 출신이라는 설정은 이런 역사적 맥락을 의도적으로 차용한다.
발소리의 정치학도 중요하다. 탭댄스의 탭이 바닥을 치는 소리는 언어 이전의 소통이다. 주애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열망과 의지를 발의 리듬으로 번역한다. 이는 들뢰즈-가타리의 기관 없는 몸(Corps sans Organes) 개념과 연결된다. 사회적 코드화에 저항하는 욕망하는 기계로서의 몸이 직접적 강도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희란과 주애의 첫 대면 장면에서 의상의 대비는 계급관계를 즉각적으로 시각화한다. 희란의 디자이너 의상과 주애의 수수한 옷차림은 피에르 부르디외의 아비투스 이론—계급적 취향이 몸에 각인된 결과—을 보여준다. 하지만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두 여성의 시선 교환이다.
아이컨택의 지속시간과 각도가 서서히 변화한다. 처음에는 희란이 위에서 아래로 주애를 품평하는 수직적 시선이었다면, 점진적으로 수평적 시선으로 변화하고, 후에는 주애가 희란을 올려다보는 존경의 시선으로 역전된다. 이런 미세한 시선의 변화는 권력관계의 유동성을 몸짓의 정치학으로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애마> 속 <애마부인> 촬영 장면들은 이중 프레이밍 구조를 통해 메타시네마적 효과를 극대화한다. 이해영의 카메라가 극중 곽인우 감독(조현철)의 카메라를 촬영하는 순간, 관객은 삼중의 시선 구조 안에 놓인다: 이해영 → 곽인우 → 배우들의 시선 연쇄다.
여기서 핵심은 프레임 인 프레임 효과다. 극중 영화 화면이 드라마 화면 안에 삽입될 때, 1980년대의 촬영기술과 2025년의 촬영기술이 시각적으로 대비된다. 옅은 세피아 톤의 옛날 영화 필름룩과 고해상도의 16:9 비율의 현대 드라마 디지털룩이 공존하면서, 시간의 층위가 공간적으로 구현된다.
조명의 대비도 의미심장하다. 극중 영화 촬영에서는 강한 할로겐과 같은 조명으로 인공적 극장성을 부각시키고, 드라마 현실에서는 자연광에 가까운 소프트 라이팅으로 사실성을 추구한다. 이런 조명의 이중구조는 영화적 환상과 현실적 진실 사이의 경계를 시각적으로 문제화한다.
<애마부인> 마지막 촬영 시퀀스에서 80년대 필름룩과 2025년 디지털 컬러룩의 교차 편집은 <애마>의 메타시네마적 절정이다. 이해영은 여기서 단일한 시퀀스 안에 두 개의 시간층을 공존시키면서, 과거와 현재가 동시적으로 중첩되는 시간적 팔림프세스트를 구축한다.
기술적으로는 필름 그레인의 거친 질감과 디지털의 매끄러운 해상도가 대비되지만, 내용적으로는 두 시간대의 감정이 하나로 수렴한다. 1980년대 희란의 연기하는 감정과 2025년 희란의 진실한 감정이 이중노출되면서, 연기와 진실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보랏빛 꽃밭과 벼 한줄기라는 소품 선택도 정교한 상징 체계를 이룬다. 보라색은 전통적으로 고귀함과 신비를 상징하지만, 동시에 중간색으로서 양성성을 내포한다. 희란이 중성적 외모로 묘사되는 것과 호응하는 색채 선택이다. 벼 한줄기는 소박함과 순수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결실을 앞둔 성숙의 은유다. 주애의 성장 가능성을 시각적으로 암시한다.
희란의 고백 장면에서 해상도의 변화는 감정의 진정성과 직접적으로 연동된다. "그래서 마침내 네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기를 바래"라는 대사가 고해상도로 전환되는 순간은 픽션에서 진실로의 도약을 시각적으로 구현한다.
이 대사는 미셸 푸코의 자기 배려(souci de soi) 개념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타자의 시선에 종속되어 살던 여성이 자기 자신을 사랑의 대상으로 재발견하는 주체화 과정의 절정이다. "세상의 어떤 잔인한 폭력이 너를 옥죄더라도"라는 구절은 1980년대의 구조적 폭력을 지칭하지만, 동시에 모든 시대의 여성들이 경험하는 보편적 억압에 대한 언급이기도 하다.
희란이 <애마부인> 속 로맨스 장면의 남성적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젠더 역할의 전복을 넘어선 사랑의 재정의다. 동성애적 함의를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여성 간의 사랑이 이성애 로맨스보다 더 순수하고 진실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한다.
희란과 주애의 관계 변화는 <애마>의 서사적 핵심이자 정치적 메시지의 집약점이다. 초기의 경쟁구도—베테랑 vs 신인, 주연 vs 조연—가 점차 연대구조로 전환되는 과정은 전통적 여성서사의 전복을 의미한다.
할리우드 고전영화에서 두 여성은 대개 같은 남성을 두고 경쟁하거나, 계급적 차이로 갈등하는 이분법적 구조를 보여준다. 하지만 <애마>에서는 공통의 적—가부장적 영화 시스템—에 맞서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연대가 형성된다. 이는 벨 훅스의 시스터후드 개념이나 오드리 로드의 차이를 통한 연대 이론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공간의 변화도 관계의 변화를 반영한다. 처음에는 위계적 공간—사무실, 기자회견장 등—에서 만나던 두 여성이, 점차 수평적 공간—분장실, 촬영장 휴게소 등—에서 대화하게 된다. 마지막에는 완전히 열린 공간—서울 거리—에서 함께 질주한다. 공간의 확장이 관계의 심화와 병행되는 공간서사학적 구조다.
주애가 대종상이라는 권력을 쥔 문화부장에게 던지는 일갈은 <애마> 전체에서 가장 전복적인 순간 중 하나다. "너 안서지?"라는 대사는 성적 은유를 통해 권력의 무력화를 직접적으로 지적한다. 남근적 권력의 물리적 불능을 공개적으로 폭로함으로써, 가부장적 권위의 허상을 무너뜨린다.
밤무대에서 낮에 이뤄지는 인터뷰라는 시공간적 설정도 의미심장하다. 밤의 공간인 나이트클럽이 낮의 시간에 조명을 켠 채 사용되는 것은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 붕괴를 의미한다. 무대 아래에서 진행되는 대화는 연극적 상황을 만들어내며, 주애를 배우가 아닌 연출자의 위치로 격상시킬 준비 단계다.
문화부장이 '발작'하며 권력자가 피지배자의 직설적 지적에 통제 불능 상태가 되는 순간은 미셸 푸코의 권력론에서 말하는 권력관계의 역전 가능성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권력이란 고정된 소유물이 아니라 관계적 상황에서 끊임없이 재배치되는 동적 에너지라는 통찰의 시각화다. 물론 문화부장은 주애에게 자신이 가진 권력 범위 내에서 치졸한 방식의 복수로 되갚는다.
마지막 장면의 말 달리기는 <애마>의 가장 대담한 기호학적 전복이다. 원래 <애마부인>에서 성적 은유로 사용되었던 말 타기 모티프가 여성해방의 상징으로 전환되는 순간이다. 남성적 시선의 페티시였던 말이 여성주체의 해방수단이 되는 의미의 대역전이다.
광화문을 질주하는 두 여성의 모습은 공적 공간에 대한 여성의 점유 선언이다. 조선시대부터 현재까지 권력의 중심지였던 광화문이라는 남성적 공간을 여성들이 당당히 가로지르는 것은 상징적 공간 점령이다. 이는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젠더적 재해석이기도 할 것이다.
의상의 변화도 중요하다. 촬영 초기의 노출 의상에서 마지막의 당당한 정장으로의 변화는 성적 객체화에서 주체적 존재로의 전환을 시각적으로 구현한다. 옷이 몸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정체성을 드러내는 표현수단이 되는 의복의 정치학이다.
<애마>가 2025년에 제작되어 전 세계적으로 넷플릭스를 통해 배급된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맥락이다. #MeToo 운동 이후 성폭력과 성적 착취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급격히 변화한 시점에서, 1980년대 영화계의 성적 착취를 다루는 것은 단순한 과거 재현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 문제제기다.
이해영 감독이 강조한 "구중호 같은 캐릭터는 아직까지 있다"는 발언은 이 드라마의 현재적 의미를 명확히 한다. 1980년대와 2025년 사이의 45년이라는 시간적 거리에도 불구하고, 권력을 이용한 성적 착취 구조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냉소적 현실인식이다.
글로벌 배급의 맥락에서 보면, 한국의 특수한 역사적 경험—권위주의 정권 하의 영화검열—이 보편적 문제로 확장된다. 검열, 성적 착취, 여성연대라는 키워드는 문화적 맥락을 초월한 전지구적 이슈다.
더불어 문화부장이라는 캐릭터를 통한 대종상 비판은 <애마>가 1980년대 재현을 넘어 현재적 고발로 기능한다는 증거다. 영화제라는 문화적 권위가 실제로는 정치적 도구이자 경제적 이권의 분배 장치였다는 구조적 모순을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애마>는 영화를 소재로 한 영화라는 메타시네마적 특성을 통해 영화 자체의 윤리를 문제화한다. 영화가 현실을 재현할 때 발생하는 권력관계, 관객의 시선이 갖는 폭력성, 상업적 목적과 예술적 가치 사이의 갈등 등이 다층적으로 탐구된다.
특히 남성 관객의 시선과 여성 배우의 몸 사이의 관계는 로라 멀비의 남성적 시선 이론을 직접적으로 문제화한다. 극중 <애마부인>을 보는 남성 관객들의 반응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이해영은 관음증적 시선의 폭력성을 노골적으로 폭로한다. 영화관 안의 남성들이 스크린 속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소비하는 모습은 영화라는 매체 자체가 내재하고 있는 젠더 권력관계에 대한 메타 비판이다.
<애마>에 대한 예상 가능한 비판은 페미니즘의 상품화 문제다. 넷플릭스라는 글로벌 자본이 한국의 여성해방 서사를 상품으로 패키징해서 세계시장에 판매하는 것 아니냐는 냉소적 시각이 가능하다. 특히 19세 관람가라는 등급과 노출 장면을 마케팅 포인트로 활용하는 것은 결국 남성적 시선을 자극하는 전략이 아니냐는 비판도 제기될 수 있다.
더 근본적인 비판은 1980년대 여성의 경험을 현재의 페미니즘 담론으로 재단하는 시대착오적 접근 문제가 될 수 있다. 당시의 역사적 맥락과 현재의 가치관 사이의 간극을 무시하고, 현재의 관점에서 과거를 심판하는 현재중심주의적 오류에 빠질 위험이 있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이런 비판들은 <애마>의 복합성을 과소평가한다. 이해영은 완전한 해방이나 이데올로기적 순수성을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순적 현실 안에서의 제한적 저항과 부분적 해방의 가능성을 탐구한다. 희란과 주애의 연대도 영웅적 승리로 그려지지 않고, 일시적 해방감으로 마무리된다.
상품화 비판에 대해서도, 자본주의 시스템 내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예술이 가능한가라는 현실적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상업적 성공과 비판적 메시지가 양립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대중적 접근성을 확보하면서도 문제의식을 잃지 않는 전략적 타협이 때로는 더 효과적일 수 있다.
<애마>는 단일한 해석을 거부하는 다층적 텍스트다. 1980년대 충무로와 2025년 한국영화 씬, 픽션과 현실, 과거와 현재, 남성과 여성, 상업과 예술 사이의 경계들이 끊임없이 흔들리면서 의미의 증식이 일어난다. 이해영의 천재성은 이런 경계의 모호성을 드라마틱한 재미로 전환시키는 능력에 있다.
메타시네마적 구조는 단순한 기교가 아니라 현실 인식의 방법론이다. 영화를 통해 현실을 보고, 현실을 통해 영화를 보는 이중적 시선이야말로 미디어 시대의 올바른 인식론이 될 것이다. <애마>는 시청자들로 하여금 수동적 소비자에서 능동적 해석자로 변화하도록 요구한다.
여성연대의 메시지도 이데올로기적 교훈이 아니라 실존적 가능성의 탐구로 제시된다. 완전한 해방은 불가능하더라도, 순간적 자유는 가능하다는 현실주의적 희망이다. 광화문을 질주하는 두 여성의 모습은 유토피아적 환상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의 투쟁에 대한 은유다.
결국 <애마>라는 제목의 진정한 의미는 여기에 있다. 사랑받는 말(愛馬)이 되기를 강요받던 여성들이 스스로 말을 타고 자유롭게 질주하는 주체로 거듭나는 변신의 드라마. 그 질주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우리는 모두 그 질주의 목격자이자 동참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
이해영의 카메라는 과거를 향하지만, 그 시선은 미래를 겨냥한다. 벗기려는 시대는 끝나지 않았지만, 입히려는 여자들의 저항 또한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그 저항의 언어는 바로 영화 자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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