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 구아다니노(Luca Guadagnino)가 윌리엄 S. 버로스(William S. Burroughs)의 미완성 소설을 영화화한 『퀴어』는, 역설적으로 가장 육체적인 영화가 가장 탈육체적인 갈망을 다루는 메타텍스트다. "I'm not queer; I'm disembodied"라는 핵심 대사가 암시하듯, 이 작품은 동성애(homosexuality)가 아닌 존재론적 고독(ontological loneliness)에 대한 철학적 탐구로 읽힌다.
구아다니노가 "짝사랑이 아닌 타이밍이 어긋난 사랑"이라고 규정한 이 영화는, 1950년대 멕시코시티라는 시공간적 설정을 통해 비트 제너레이션의 반문화적 정신을 시각언어로 번역한다. 리(다니엘 크레이그)의 흐트러진 리넨 수트와 유진(드류 스타키)의 세련된 외모 사이의 대조는 단순한 세대차이가 아니라, 시간성 자체의 어긋남을 상징적으로 구현한다.
바나의 'Come As You Are'가 1950년대 바에서 흘러나오는 시대착오적 순간은 구아다니노 특유의 시간적 층위 붕괴를 보여준다. 이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 80년대 이탈리아에 현재적 감수성을 이식했던 전략의 극단적 발전형이다. 과거와 현재가 충돌하는 지점에서, 퀴어한 욕망은 시간을 초월하는 보편적 경험으로 재맥락화된다.
영화는 리(다니엘 크레이그)가 직접 관객을 응시하며 "You're not queer"라고 선언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이 메타시네마틱 개막은 단순한 도발이 아니라 영화 전체의 해석학적 열쇠다. 에필로그에서 리가 "I'm not queer, I'm disembodied"라고 깨닫는 순간과 완벽한 키아스무스 구조를 이룬다.
첫 장면에서 관객에게 던진 부정의 선언이, 마지막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존재론적 재정의로 귀결되는 이 순환적 대칭성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시작과 끝이 하나로 수렴되는 구조다. 구아다니노는 이를 통해 퀴어함이 정체성이 아니라 관계 맺기의 방식임을 시사한다.
영화는 3막 구조로 전개되며, 각 막은 서로 다른 의식 상태의 시네마틱 표현을 시도한다. 1막의 아름다운 영상미가 버로스의 현실주의에 기반한다면, 3막의 환각 시퀀스는 푸코의 '역담론'(지배적 담론의 대항하는 담론, reverse-discourse)의 시각적 구현체다.
특히 리와 유진이 환각제를 복용한 후 입에서 거대한 음낭 모양의 살덩이 거품(혹은 심장)을 불어내는 장면은 구아다니노가 어린 시절 목격한 숙모의 토혈 경험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밝혔다. 이러한 자전적 트라우마의 초현실주의적 전치는 크리스테바의 '아브젝트(abject)' 개념과 공명하며, 동시에 달리의 회화나 부뉴엘의 영화와 계보를 잇는다.
리가 카페에서 유진을 바라보며 이중노출된 투명한 손으로 그의 얼굴을 어루만지려 하는 장면은 전 영화를 관통하는 "접촉 불가능성"의 원형이다. 이는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 속 아담과 신의 손가락 사이의 간극을 퀴어적으로 전유한 것이면서, 동시에 부뉴엘의 초현실주의적 시각언어와 공명한다.
흥미롭게도 이 "닿으려 하는 손"의 모티브는 구아다니노의 이전 작품들과도 계보학적 연속성을 갖는다. 『아이 엠 러브』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도 "망설이며 다가가다가 물러서는 손"이 핵심적 시각 모티브로 작용했다. 하지만 『퀴어』에서는 이 손이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유령적 존재가 됨으로써, 욕망 자체의 비실체성을 더욱 극단적으로 드러낸다.
리가 헤로인을 주사하는 장면에서 구아다니노는 롱샷을 유지한다. 여기서 바늘이 피부에 닿는 순간의 유일한 확실한 접촉이 역설적으로 자기파괴적 행위라는 점이 중요하다. 뉴 오더의 "Leave Me Alone"이 흘러나오며 "On a thousand islands in the sea, I see a thousand people just like me"라는 가사가 고독의 보편성과 연결 욕망을 동시에 암시한다.
이 장면에서 담배 연기가 리의 얼굴을 감싸는 시각적 처리는 1막의 투명한 손과 구조적 대응을 이룬다. 둘 다 실체와 비실체 사이의 중간적 존재로서, 접촉하고 싶지만 닿을 수 없는 갈망을 물질화한다.
환각 상태에서 리와 유진이 경험하는 완전한 육체적 결합은 앞선 두 변주의 극한적 완성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가장 육체적인 순간에 리는 "I'm disembodied"라는 깨달음에 도달한다. 이는 플라톤의 동굴 우화를 뒤집은 것으로, 그림자(환각)를 통해서만 진리(탈육체적 존재)에 도달할 수 있다는 역설적 인식론을 제시한다.
영화 속 바는 극장의 회전 무대처럼 기능한다. 1막에서는 사냥터로, 2막에서는 출발점으로, 3막에서는 귀환지로 그 기능이 순환한다. 특히 너바나의 "Come As You Are"가 1950년대 바에서 흘러나오는 시대착오적 순간은 단순한 아나크로니즘이 아니라 시간의 층위가 붕괴된 공간임을 알리는 신호다.
"Come as you are, as you were / As I want you to be"라는 가사는 리가 유진에게 느끼는 조건 없는 수용의 욕망과 공명하지만, 동시에 "I don't have a gun"이라는 구절은 리가 항상 권총을 패용하고 다니는 설정과 아이러니컬하게 대비된다. 무기는 팔루스적 권력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자기파괴의 도구라는 이중성을 갖는다.
리와 유진의 첫 성적 접촉이 이뤄지는 호텔방은 1막의 익명적 섹스 장면과 정확히 같은 공간이다. 하지만 조명과 카메라 앵글이 완전히 달라진다. 익명적 섹스 장면에서는 차가운 형광등과 하이앵글 숏이 거래적 관계의 소외감을 강조한다면, 유진과의 장면에서는 따뜻한 백열등과 아이레벨 숏이 정서적 친밀감을 연출한다.
하지만 구아다니노는 이를 로맨틱하게 이상화하지 않는다. 섹스 후 유진이 보이는 정서적 철수를 통해, 동일한 공간에서도 서로 다른 경험을 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공간이 중립적이지 않으며, 주체의 욕망에 따라 의미가 재구성된다는 현상학적 공간론의 영화적 구현이다.
리와 유진이 함께 장 콕토의 『오르페』를 관람하는 장면에서, 장 마레가 거울을 통과하여 저승으로 향하는 장면이 삽입된다. 이는 단순한 시네필로서의 오마주라기 보다는 영화 전체의 구조적 메타포라 할 수 있다.
거울은 라캉적 상상계와 상징계의 경계를 의미하며, 동시에 현실과 환상, 의식과 무의식의 임계점을 상징한다. 리가 야헤를 통해 추구하는 텔레파시적 소통은 결국 거울 너머의 세계로의 이행 욕망이다.
레슬리 맨빌이 연기하는 Dr. Cotter는 과학자이자 마녀, 이성적 존재이자 신비적 존재라는 이중적 정체성을 갖는다. 그녀가 아마존의 뱀을 훈련시킨다는 설정은 이브의 유혹자이자 지혜의 수여자인 뱀의 젠더적 전복을 의미한다.
특히 그녀의 남성적 복장과 중성적 외모는 안드로진(androgyne) 미학의 구현체다. 이는 리가 추구하는 성별 이분법을 초월한 존재 방식의 시각적 예시로 기능한다.
1950년대 배경에 너바나, 프린스, 시네이드 오코너 등의 음악이 삽입되는 것은 의도적인 시대착오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스타일적 선택이 아니라 퀴어 주체의 비동시적 존재감을 음향적으로 구현한 장치다.
특히 시네이드 오코너의 "All Apologies" 커버는 커트 코베인의 원곡이 갖는 자기파괴적 우울감을 여성적 목소리로 재해석함으로써 젠더를 횡단하는 보편적 고독감을 창조한다. 이는 리의 성적 정체성이 남성성의 위기와 맞물려 있음을 시사한다.
나인 인치 네일스의 트렌트 레즈너가 참여한 스코어는 인더스트리얼 일렉트로닉 사운드를 기반으로 한다. 이는 기계적이고 차가운 음향을 통해 현대 도시의 소외감을 1950년대 멕시코시티에 아나크로니즘적으로 투영한다.
특히 환각 시퀀스에서 사용되는 앰비언트 드론 사운드는 의식의 확장과 동시에 해체를 음향적으로 재현한다. 이는 브라이언 이노의 앰비언트 음악이나 팀 헤커의 노이즈 앰비언트와 유사한 정신변성적 효과를 노린다.
영화에서 뱀은 세 번의 서로 다른 형태로 등장한다. 첫째는 Dr. Cotter가 훈련시킨 살아있는 뱀, 둘째는 아야후아스카 환각 중의 환상적 뱀, 셋째는 엔딩의 우로보로스 뱀이다.
첫 번째 뱀은 인간의 통제 하에 있는 자연을 상징한다. 두 번째 뱀은 무의식적 욕망의 발현이다. 세 번째 뱀은 자기 자신을 삼키는 자율적 존재로서 영원회귀의 시각적 구현이다. 이 삼중 변주는 리의 의식 변화 과정을 상징적으로 추적한다.
너바나의 "I don't have a gun"과 리가 항상 총을 휴대하는 설정 사이의 모순은 의도적인 아이러니다. 총은 남성성의 팔루스적 상징이지만, 동시에 자기파괴의 도구이기도 하다.
흥미롭게도 영화에서 총은 실제로 사용되지 않는다. 이는 잠재적 폭력성이 현실화되지 않음을 의미하며, 동시에 남성성 자체가 허구적 구성물임을 암시한다. 리의 총은 사용되지 않는 기호로서 기표와 기의의 분리를 보여준다.
아야후아스카 시퀀스에서 리와 유진이 입에서 거대한 음낭 모양의 거품을 뿜어내는 장면은 크리스테바의 아브젝트 개념을 극단적으로 시각화한 것이다. 이 장면에서 생식과 배설, 창조와 파괴, 내부와 외부의 경계가 붕괴된다.
특히 입에서 나오는 것이 말인지 체액인지 구토인지 구분할 수 없는 이 이미지는 언어의 한계를 육체적으로 표현한다. 리가 그토록 원했던 "말 없는 대화"가 이런 원시적 형태로만 가능함을 보여주는 잔혹한 은유다.
환각 중에 리와 유진의 신체 경계가 해체되고 하나의 유기체로 융합되는 장면은 들뢰즈-가타리의 "기관 없는 몸" 개념과 공명한다. 여기서 개별적 주체성은 사라지고, 대신 욕망하는 기계들의 연결만이 남는다.
하지만 이 육체적 융합의 절정에서 역설적으로 "I'm disembodied"라는 깨달음이 온다는 점이 핵심이다. 이는 최대한의 육체적 경험을 통해서만 탈육체적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변증법적 논리를 보여준다.
유진의 부재를 지네(centipede)라는 대체 오브제로 메우며, 리는 자기 전기를 낭송하듯 늘어놓는다. 여기서 “말”은 접촉의 대용물이자 결핍의 봉합술이다. 하지만 그 봉합은 과잉으로 드러난다. 상대는 지네처럼 촉수 많고 다리가 많은 “다른 가능성”의 분신이지만, 리의 언어는 그 다리들을 하나씩 꺾는다. 말이 완료될수록 대화는 사라진다. 말이 많을수록, 접촉은 덜하다. 이 장면은 이후 꿈에서 지네가 “노화된 리”의 외형적 비유로 귀결될 것을 예고하는 전주(前奏)다.
리는 “나를 알아줘”라는 간청을 “내러티브로 압도하기”로 대체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비웃는 술집 대화와 같은 축에 있다. 리의 조소는 자기 기원에 대한 불신(가계-권력-법-금지의 족보)에 더 가깝다. 조롱의 리듬으로 상징계를 비틀면서, 사실은 그 상징계에 종속된 자신(나이, 계급, 백인 남성성, 총이라는 팔루스 기호)을 폭로한다. 말하자면 “오이디푸스를 비웃는 오이디푸스.” 그 이중 제스처가 이후 총의 ‘항상 휴대–한 번도 발사되지 않는’ 아이러니와 연결된다. 팔루스가 기호로만 남을 때, 욕망은 표류한다.
조리-절단-양념-저온 장시간 익힘의 프로세스를 리는 시적으로 읊조리는데, 이건 미식교양의 유희가 아니라 자기 상태의 메타포다. 고기는 “천천히 부드러워지도록” 자기 조직을 포기한다. 리는 자신도 그렇게 “먹힐 수 있는 상태”로 길들여지고 있음을 은연중에 고백한다. 요리 묘사는 아름답지만, 아름다움은 잔혹의 언어다. 여기서 음식은 사랑의 언어가 아니라 “자기 소거의 기술서”로 기능한다. 이후 환각 장면의 체액-거품-침윤 이미지가 이 조리 은유의 육체적 문장부호가 된다.
축소 모형은 권력의 은유다. 만질 수 있고 배열할 수 있는 세계. 리는 실제 세계에서 실패한 통제를 디오라마에서 실현한다. 하지만 카메라는 이 축소 우주를 ‘초월 시점’과 ‘접사’로 번갈아 보이며, 리의 전능감과 왜소함을 교차 편집한다. 리가 “상상 속에서 유진과 함께 있는” 장면이 이어붙으며, 현실의 실패가 상상-모형-환각이라는 대체 계열로 미끄러진다. 이때 모형의 병정들은 리의 대사처럼 설명적이다. “죽음의 규칙”을 설명하면서, 리는 사랑의 법칙을 잃는다.
이 장면은 총-뱀-지네 모티브를 하나의 연쇄로 봉합한다: 총은 발사되지 않는 팔루스(권력의 표식), 뱀은 지식과 유혹과 순환(우로보로스), 지네는 마디진 시간(노화/강박/걱정의 다리). 디오라마는 이 세 가지를 “조립 가능한 서사”로 만들려는 마지막 시도다. 그러나 조립은 끝내 작동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랑의 시간은 조립이 아니라 감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는 감염의 이미지—거품, 침, 구토, 액체—로 귀결한다.
『퀴어』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는 욕망의 시작과 그 파국적 결과를 보여주는 액자식 구성을 이룬다. 리가 소유했던 사물들은 결국 그 자신을 소유하게 되었고, 타인에게 닿으려던 욕망은 결국 자기 자신을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프롤로그가 사물의 언어로 서사를 예고했다면, 에필로그는 육체의 언어로 서사를 완결 짓는다. 에필로그의 침대는 프롤로그의 침대와 대칭을 이루면서, 리와 유진이 함께 누운 침대 장면이다. 하지만 이 포옹은 해피엔딩의 증거가 아니라, 시간의 비극적 불일치를 가장 잔혹하게 드러내는 피에타(Pietà) 상에 가깝다
지네 목걸이, 뱀, 권총, 약병, 사진—영화 전체의 ‘변주 주제들’이 악보처럼 배열된다. 침대는 사랑의 무대라기보다 “전시대(展示臺)”이자 예언판이다. 침대에 놓인 사물들은 한 편의 악장이 시작되기 전, 조표와 주제를 관객의 무의식에 삽입한다. 침대는 모든 사건의 목적지가 아니라, 모든 모티브가 출발하는 악보의 첫 마디다.
늙은 리와 젊은 유진의 병치된 육체. 리의 몸이 지네처럼 굽고 마디진 형상으로 늙어 있고, 유진의 몸은 최초 등장 때처럼 매끈하게 보존돼 있다. 이는 “사랑의 시간은 서로 다른 속도로 흐른다”는 사실의 조형화다. 하나는 다리를 늘리며 마디를 늘리고(지네처럼 노화), 다른 하나는 시간을 고정시킨 표본으로 보존된다. 스푸닝은 접촉의 완성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시간의 비동시성이라는 잔혹한 대칭이다. 사랑은 닿았으나, 동일한 시간에 살지 않는다. 결국 프롤로그의 오브제 악보가 에필로그의 침대 위에서 “완주곡”으로 닫힌다.
『퀴어』는 구아다니노 자신의 이전 작품에 대한 비판적 재검토이기도 하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 로맨틱하게 이상화했던 나이 차이가 있는 동성 간 사랑을, 여기서는 더욱 복잡하고 문제적인 관계로 재탐구한다.
특히 권력 관계와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인식이 확연히 달라진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엘리오와 올리버가 상호적 성장을 경험했다면, 『퀴어』의 리와 유진은 비대칭적 욕망의 함정에 빠진다. 이는 #MeToo 이후의 젠더 정치학이 구아다니노의 작품 세계에 미친 성찰적 영향을 보여준다.
『퀴어』는 동성애 영화라는 장르적 기대를 의도적으로 배신한다. 구아다니노와 크레이그 모두 "리의 퀴어함의 중요성을 축소"했다고 밝혔는데, 이는 정체성 정치를 넘어선 보편적 인간 조건으로의 확장을 의미한다.
영화가 "너무 이원론적인 것은 흥미롭지 않다"고 선언하는 순간, 우리는 퀴어 시네마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목격한다. 이는 본질주의적 정체성을 거부하고 유동적 주체성을 포용하는 포스트모던적 접근이다.
백인 미국인 남성들이 "원시적" 남미에서 신비로운 깨달음을 추구한다는 설정 자체가 오리엔탈리즘의 퀴어적 변주라는 점을 구아다니노는 의도적으로 노출한다.
치네치타 스튜디오에서 인공적으로 제작된 정글 세트는 이러한 식민지적 환상이 순전히 구성된 것임을 메타적으로 드러낸다. 에드워드 호퍼의 회화를 연상시키는 인공적 조명과 페인트로 칠해진 붉은 구름은 현실이 아닌 시뮬라크르임을 강조한다.
터키 이스탄불에서 "공공질서에 대한 위협"으로 상영금지를 당한 이 영화의 도발적 내용은 단순한 성적 노골성을 넘어선다. 알베르토 바르베라가 "용감함의 증거"라고 평한 친밀한 로맨스 장면들은, 사실상 사랑의 자기파괴적 본성에 대한 잔혹한 해부학이다.
구아다니노가 "삶을 그 추악한 영광 속에서 보여주는 것"이라고 표현한 이러한 접근은 아름다움과 추함의 이분법을 해체한다. 이는 파졸리니의 『살로』나 아르젠토의 『서스페리아』(구아다니노가 리메이크한) 전통 위에서, 이탈리아 영화의 육체성과 관능성을 퀴어적으로 재해석한 결과물이다.
2024년 현재, 전 세계적으로 퀴어 권리가 보수주의적 반격에 직면한 시점에서 이 영화의 출현은 우연이 아니다. 구아다니노가 "정치적이라면, 그것은 영화가 틀에서 나올 필요가 없고 프로토타입을 만들 수 있음을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정치적"이라고 말한 것처럼, 『퀴어』는 형식적 혁신을 통한 정치적 저항을 수행한다.
하지만 동시에 이 영화에 대한 비판적 시선도 필요하다. 중년 백인 남성의 식민지적 시선으로 멕시코를 바라보는 관점, 계급적 특권을 바탕으로 한 성적 거래의 미화 가능성 등은 포스트콜로니얼 비평의 렌즈로 재검토되어야 할 지점들이다.
엔딩에서 자신의 꼬리를 물고 있는 뫼비우스의 띠 모양의 뱀을 마주하는 장면은 니체의 영원회귀 개념과 융의 우로보로스 상징을 결합한 시각적 명제다. 이는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운명에 대한 고뇌"이면서 동시에 순환적 시간관 속에서의 해방 가능성을 암시한다.
구아다니노는 이를 통해 선형적 서사의 한계를 넘어선 순환적 영화언어를 실험한다. 이는 단순한 포스트모던적 유희가 아니라, 퀴어한 시간성 자체에 대한 존재론적 탐구다. 리 헬만의 "퀴어 시간"(queer time) 이론이 지적하듯, 퀴어 주체는 이성애적 재생산의 선형 시간과는 다른 시간성을 경험한다.
『퀴어』는 결국 사랑이라는 이름의 존재론적 실험이다. 텔레파시를 가능하게 하는 식물을 찾아 나선 여행은, 궁극적으로 타자와의 완전한 소통이라는 불가능한 꿈에 대한 영화적 사유다. 구아다니노가 "절대적으로 구체적이면서 동시에 보편적"이라고 규정한 이 작품은, 퀴어함의 급진적 가능성을 구현하면서도 인간 조건의 근본적 고독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제공한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육체를 버리고 영혼으로만 대화하고 싶어 하는 탈육체적 존재들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퀴어』는 가장 보편적인 영화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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