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케 쇼(三宅唱)의 『ケイコ 目を澄ませて』(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2022)는 역설적이게도 '듣지 못하는' 주인공을 통해 관객의 청각을 극도로 예민하게 만드는 영화다. 감독이 청각장애를 가진 프로복서 오가사와라 케이코(小笠原恵子)의 자서전 『負けないで!(지지마!)』를 원안으로 삼으면서도, 단순한 장애 극복 서사나 스포츠 영화의 클리셰를 철저히 거부하는 태도는 이미 제목에서부터 드러난다. '귀 기울이다'라는 의미의 '耳を澄ませて' 대신 '目を澄ませて'(눈을 맑게 하여)라는 시각적 전치는 감각의 위계질서를 뒤흔드는 첫 번째 신호탄이 아닐까.
영화는 첫 장면부터 소리에 대한 독특한 접근을 보여준다. 미세한 마찰음으로 시작되는 오프닝은 케이코(岸井ゆきの)가 노트에 펜을 달리는 소리인데, 이는 곧 그녀의 '목소리' 없는 소통 방식을 예고하는 메타포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계속해서 등장하는 얼음을 씹는 소리, 줄넘기 줄이 바닥을 치는 소리들이 점층적으로 쌓이면서 복싱 체육관이라는 공간을 '음향적 조각품'으로 변모시키는 과정은 단순히 분위기 연출을 넘어선 존재론적 질문을 던진다.
특히 주목할 만한 건 케이코와 동거하는 남동생 세이지(佐藤緋美)와의 초기 대화 장면이다. 두 사람이 수화로 대화할 때, 화면 중앙에 세로로 배열된 흰 글씨가 등장하는데, 이는 1920년대 무성 영화의 자막 방식을 그대로 차용한 것이다. 미야케 감독은 마치 영화사 130년을 관통하듯 다양한 소통 방식을 실험하는데, 수화-자막, 구화-입모양 읽기, 필담-화이트보드까지, 각각의 방식이 지닌 제약과 가능성을 탐구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감독이 인터뷰에서 밝힌 "영화를 찍는다는 것은 영화가 없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타자에 대해 부모보다, 연인보다 깊게 생각하는 것"이라는 철학은 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윤리적 지향점처럼 느껴진다. 케이코와 아파트 계단에서 마주치는 이웃 남성(조명기사 후지이 유우가 출연)과의 짧은 회심(會心) 장면은 이러한 타자성에 대한 세심한 배려를 보여준다. 서로를 '모르는 척할 수 없는' 관계의 미묘함이, 도시적 익명성과 근린적 친밀성 사이의 애매한 지대를 포착한다고 여겨진다.
16mm 필름으로 촬영된 이 영화의 시각적 질감은 단순한 레트로 취향을 넘어선다. 거친 입자감이 만드는 따뜻함은 디지털의 차가운 완벽함과 대비되면서, 케이코라는 인물이 살아가는 '현재'에 물질적 무게감을 부여한다. 특히 야간 장면에서 가로등이나 전차의 불빛이 만들어내는 후광 효과는 도시의 쓸쓸함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포착하는데, 이는 오즈 야스지로(小津安二郎)의 후기 작품들에서 보이는 '일상 속 숭고함'의 계보를 잇는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 같다.
미야케 감독의 카메라는 대체로 정적이다. 측정된 카메라 움직임보다는 고정된 프레임 안에서 인물들의 미세한 움직임과 표정 변화에 집중하는 방식은 로베르 브레송(Robert Bresson)의 '시네마토그라프' 이론을 연상시킨다. 특히 케이코가 회장(三浦友和)과 둑 아래에서 훈련하는 장면에서 빨간 모자가 자연스럽게 주고받아지는 순간은 말 없는 대화의 극치를 보여준다. 이 모자는 영화 후반부에서도 다시 등장하는데, 이런 오브제의 순환적 등장은 구조주의적 서사 기법을 암시한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2020년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일상화된 시기다. 이는 원래 청각장애로 인해 소통의 어려움을 겪던 케이코에게는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마스크 착용으로 인해 입모양을 읽을 수 없게 된 상황은 건청자와 농아인 사이의 격차를 더욱 벌려놓지만, 동시에 모든 사람이 '소통의 제약'을 경험하게 되면서 케이코의 일상적 경험이 보편적 조건이 되기도 한다.
체육관의 폐쇄 위기 또한 팬데믹의 직접적 결과다. 대인 접촉을 기반으로 한 사업들이 타격을 받는 현실을 냉정하게 그려내면서도, 감독은 이를 단순한 사회 고발로 그치지 않고 '관계의 소중함'에 대한 성찰로 승화시킨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순간 중 하나는 케이코가 트레이너와 콤비네이션 미트를 하는 장면이다. 건조한 타격음이 만들어내는 리듬은 아다지오에서 알레그로로 가속되면서, 농아인과 건청자의 '심장박동 동조' 현상을 연상시킨다. 이는 언어를 넘어선 소통 가능성, 즉 몸과 몸이 만나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원초적 공명을 시각화한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지 않을까.
작품 곳곳에 삽입되는 '모방' 시퀀스들은 주목할 만하다. 트레이너의 펀치 동작을 따라 하는 케이코, 세이지의 여자친구가 춤추면 따라서 움직이는 케이코, 후배 직원에게 침대 정리법을 몸으로 보여주는 케이코까지. 이러한 반복은 일본 전통 수련 체계인 '守破離'(수파리)의 현대적 변주처럼 읽힌다. '지켜보고(守), 깨뜨리고(破), 떠나는(離)' 과정이 시각적 학습을 통해 이루어지는 모습은 농문화의 인식론적 특성을 보여주는 메타포일 수도 있을 것이다.
미야케 감독의 이 작품은 결국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으로 귀결된다. 토키 영화 이전 시대의 시각적 웅변술을 현대적으로 복원하면서도, 동시에 디지털 시대의 감각 마비에 대한 해독제를 제시하는 듯하다. 케이코가 '귀 기울이는' 대신 '눈을 맑게 하여' 세상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영화를 보는 우리 관객에게도 새로운 관람 태도를 요구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냉소적으로 보자면, 이런 '감각의 재배치'를 통한 감동 전략이 자칫 장애를 미학적으로 소비하는 위험성을 내포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감독이 장애 극복 서사를 의도적으로 피하고, 케이코를 '완전한 개인'으로 그려내려는 노력은 그런 우려를 어느 정도 불식시키는 것 같다.
영화의 마지막, 다시 한 번 울려 퍼지는 콤비네이션 미트의 리듬은 처음과 분명히 다른 의미를 갖는다. 케이코의 표정도, 그 리듬도 변화했지만, 그 변화가 '성장'이나 '극복'이라는 단순한 프레임으로 환원되지 않는 복잡함을 간직한다. 이것이야말로 미야케 쇼라는 작가가 도달한 성숙의 지점일 것이다.
소리 없는 세계에서 들려오는 가장 아름다운 음악은, 결국 우리 각자가 귀 기울이고자 하는 의지에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 케이코의 눈을 통해 본 세상은 그래서 더욱 선명하고, 더욱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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