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앤드류 니콜(Andrew Niccol)의 <가타카>(Gattaca, 1997)는 제목부터가 DNA의 4개 염기 - 구아닌(G), 아데닌(A), 티민(T), 사이토신(C) - 만으로 구성된 유전 암호다. 뉴질랜드 출신 감독의 장편 데뷔작인 이 영화는, 다음해 <트루먼 쇼>(The Truman Show, 1998) 각본으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기 전, 미래 디스토피아를 현재진행형으로 만드는 실험이었다. 1800만 달러 예산으로, 촬영감독 슬라보미르 이지악(Sławomir Idziak, 크쥐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세 가지 색: 블루>,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촬영)과 프로덕션 디자이너 얀 로엘프스(Jan Roelfs, <올란도> 미술) 같은 유럽 예술영화 장인들과 협업하여, 니콜은 장 뤽 고다르(Jean-Luc Godard)의 <알파빌>(Alphaville, 1965)이 돈 없이 했던 것을 약간의 돈으로 재현한다. 하지만 고다르가 1960년대 파리를 낯설게 만들었다면, 니콜은 1990년대 캘리포니아를 "아직 오지 않은 과거"로 재구성한다.[1][2][3][4][5][6][7][8]
영화의 핵심 로케이션인 가타카 항공우주 본사 외관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가 설계한 마린 카운티 시민센터(Marin County Civic Center, 1957-1962)다. 이는 라이트의 첫 번째이자 유일한 공공 건물이며, 그의 사후에 완공되었다. 라이트는 대지의 세 개 구릉을 평평하게 만들기를 거부하고 대신 건물이 지형을 따라가게 설계했다 - 이는 그의 '유기적 건축(organic architecture)' 철학의 정점이다.[9][7][10][8]
하지만 <가타카>는 이 유기성을 역설적으로 비유기적 디스토피아의 상징으로 전용한다. 라이트가 꿈꾼 민주적 공공 공간은 니콜의 손에서 유전적 엘리트만 입장 가능한 배타적 우주선 발사장이 된다. 이는 조지 루카스(George Lucas)의 <THX 1138>(1971)과 크리스토퍼 놀란(Christopher Nolan)의 <인터스텔라>(Interstellar, 2014)도 같은 건물을 사용했다는 사실과 연결된다 - 라이트의 미래주의적 비전은 SF 영화의 '기성복(ready-made)' 세트가 되었다.[7][9]
프로덕션 디자이너 얀 로엘프스는 니콜과 함께 마린 센터를 방문해 내부 디테일을 조사하고, 플라야 비스타(Playa Vista) 창고에 세트를 재현했다. 이 접근은 실제 건축물의 '인덱스(index)'를 스튜디오로 이전하는 것이며,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의 '소격효과(Verfremdungseffekt)'를 공간에 적용한다 - 익숙한 것(라이트 건축)을 낯설게 만든다.[11]
이지악은 키에슬로프스키와의 작업에서 인물의 내면을 시각화하는 인상주의적 촬영으로 유명했다.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에서 그는 반사와 정교한 카메라 움직임으로 형이상학적 연결을 표현했고, <세 가지 색: 블루>에서는 상징적 블루 조명을 반복적으로 삽입하며 애도와 재생을 탐구했다.[12][13]
하지만 <가타카>에서 이지악의 시각 언어는 냉담하고 거의 얼어붙은 미학으로 전환된다. 필름 코멘트(Film Comment) 인터뷰에서 이지악은 인정한다: "키에슬로프스키 영화들이 감정적으로 생동하고 고도로 인상주의적이라면, <가타카> 같은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그 환기적 시각 언어가 초연하고 거의 얼어붙은 미학으로 대체된다: 카메라는 밖에 있고, 결코 캐릭터 안에 들어가지 않는다".[12]
이지악은 컬러 그라데이션 필터와 ND 필터를 많이 사용하고, 라이트에 컬러 젤을 사용한다. 대부분의 룩은 카메라 내에서 만들어진다. 영화는 진동하는 금빛, 녹색, 전기 블루 톤으로 특징지어진다. 특히 빈센트의 어린 시절 플래시백은 세피아-금빛 색조로 촬영되어, <대부 2>(The Godfather Part II, 1974) 같은 영화의 회상 장면을 연상시킨다.[14][15][16][7]
니콜은 이지악에게 "가능한 한 감정적이 되라"고 밀어붙였다고 말한다. "나는 낭만주의자다, 믿기 어렵겠지만!". 하지만 이 '낭만주의'는 차갑게 통제된 낭만주의다 - 마치 프리츠 랑(Fritz Lang)의 <메트로폴리스>(Metropolis, 1927)가 표현주의적 과장으로 미래 도시의 냉혹함을 표현했듯, <가타카>는 미니멀리즘과 색채 절제로 유사한 효과를 낳는다.[2]
빈센트(에단 호크 Ethan Hawke 연기)와 제롬/유진(주드 로 Jude Law 연기)이 사는 아파트의 나선형 계단은 DNA 이중나선 모델을 직접 재현한다. 이 계단은 많은 장면의 초점이며, 유전학과 과학적 이상에 기초한 사회를 상징한다. 또한 생명과 인간성의 강력한 상징이기도 하다.[17][18]
더 흥미로운 것은 계단의 수직적 위계다. 영화 후반부, 빈센트가 계단 꼭대기에 서고 제롬/유진이 바닥에 위치할 때, 이는 "두 사람이 본질적으로 서로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 빈센트가 제롬의 정체성을 채택하는 동안, 제롬은 더 깊은 불명예로 떨어졌다". 나선 계단은 승격과 강등을 동시에 포착하는 시각적 장치다.[17]
프로모션 포스터와 DVD 커버에 이 나선 계단이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그것이 영화의 아이콘으로 기능함을 의미한다. 마치 알프레드 히치콕(Alfred Hitchcock)의 <현기증>(Vertigo, 1958)에서 나선 계단이 강박과 추락을 상징하듯, <가타카>의 나선은 유전적 운명과 그것을 거스르려는 의지를 동시에 표상한다.[17]
빈센트(Vincent)는 라틴어 'vincere'(정복하다)에서 유래하며, 그의 성 프리먼(Freeman)은 자유인을 의미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빈센트는 "부적격자(in-valid)"로 태어나 사회에서 가장 자유롭지 못하다. 그의 이름은 열망의 이름이자 동시에 현실의 조롱이다.[19][18]
반면 제롬(Jerome)은 'hieronymus'(신성한 이름)에서 유래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진짜 이름 유진(Eugene)을 선호하는데, 이는 '잘 태어난(well-born)'을 의미하거나 우생학(eugenics)에 대한 직접적 참조다.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의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 1932)에서 보칸노프스키 과정(Bokanovsky's Process)을 통해 대량 생산되는 하층 계급 감마, 엡실론, 델타와 유사하게, <가타카>의 '유효자(valid)'들은 유전적 카스트 시스템의 정점이다.[20][18]
하지만 유진/제롬의 비극은 그가 완벽한 유전자를 갖고도 은메달밖에 따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실패를 생각할 수 없는 개념으로 여겼고, 제롬이라는 완벽한 정체성 주위에 자신을 구축했다. 하지만 "제롬의 완벽무결함은 달성 불가능했고, 유진이 자신의 삶을 기초한 것은 무거우면서도 취약한 껍질에 불과했다".[21]
제롬은 유진에게 짐이었다 - 그 완벽한 유전자라는 껍질 아래 의심과 꿈을 가진 진짜 유진이 압축되어 있었다. 빈센트에게 정체성을 넘기는 것은 해방이었다. 영화 마지막, 유진이 자신을 화장하며 목에 은메달을 거는 장면은 뼈를 때리는 은유다 - 2등은 사회가 규정한 실패이지만, 그는 그 실패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끌어안는다.[6][22][21]
빈센트의 동생 안톤(Anton)은 '매우 칭찬받는(highly praised)'을 의미한다. 그는 빈센트와 달리 유전적으로 설계되었고, 모든 면에서 형보다 우월하다. 하지만 영화는 반복적으로 형제간 수영 시합을 제시하며, 이는 마이클 나이만(Michael Nyman)의 스코어에서도 특별한 큐(cue)를 갖는다.[4][23][18]
어린 시절 안톤은 항상 이겼지만, 성인이 된 후 두 번째 수영 시합에서 빈센트가 승리한다. 안톤은 묻는다: "어떻게 해낸 거야?" 빈센트는 답한다: "나는 돌아갈 힘을 아껴두지 않았어". 이는 영화의 핵심 메시지다 - 유전자는 운명을 결정하지 않으며, 의지와 헌신이 한계를 초월할 수 있다.[4]
하지만 동시에 영화는 이 메시지를 비판적으로 문제화한다. 빈센트는 승리하기 위해 자신의 신체를 극한까지 밀어붙인다 - 매일 아침 피부를 문지르고, 제롬의 소변과 혈액 샘플을 휴대하며, 속눈썹 하나까지 제거한다. 이는 신자유주의적 자기-착취의 극단적 형태다. 마치 미셸 푸코(Michel Foucault)가 『감시와 처벌』에서 논한 '규율권력'이 외부에서 부과되지 않고 개인이 스스로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것처럼.[24]
영화에서 '부적격자'는 십자가로, '유효자'는 무한대 기호로 표시된다. 이는 DNA 검사 후 컴퓨터 화면에 나타난다. 십자가는 성경적·종교적 함의를 가지며, 부적격자들이 "신앙 출생(faith births)"으로 불린다는 점과 연결된다.[17]
하지만 종교적 이미지가 보통 긍정적인 반면, 이 십자가는 개인의 유전적 열등함과 약함의 지속적 상기다. 빈센트는 말한다: "어머니가 신의 손에 믿음을 두신 이유를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지역 유전학자 대신". 신앙은 열등의 표지가 되었다.[17]
반면 무한대 기호는 무한한 잠재력을 상징한다. 유효자들은 완벽과 성공을 향해 운명지어졌다는 사회의 사고방식을 나타낸다. 하지만 유진/제롬의 사례는 이 무한대가 환상임을 폭로한다 - 그는 무한한 잠재력을 갖고도 2등에 머물렀고, 결국 자살한다.[17]
마이클 나이만(Michael Nyman)의 스코어는 <가타카>의 정서적 핵심이다. 나이만은 피터 그리너웨이(Peter Greenaway)의 <피아노>(The Piano, 1993), <굶주림>(Ravenous, 1999) 등으로 유명한 미니멀리스트 작곡가다. 니콜은 그에게 "지금까지 가장 감정적이 되라"고 밀어붙였다.[22][23][25][2]
스코어의 대부분은 현악 아다지오로 구성되며, "턱을 떨어뜨릴 만큼 아름다운 오케스트라 음악"이다. 오프닝 크레딧은 특히 놀랍다. 나이만은 모든 주요 캐릭터를 위한 테마를 썼고, 라이트모티프(leitmotiv) 시스템을 훌륭하게 활용한다.[23]
특히 흥미로운 것은 12손가락 피아니스트 장면이다. 유진과 아이린(우마 서먼 Uma Thurman 연기)이 독점 피아노 공연에 참석하는데, 연주자는 기형이지만 각 손에 6개 손가락을 갖고 있어 이를 장점으로 활용한다. 아이린은 말한다: "그 곡은 12개 손가락으로만 연주될 수 있어".[23]
나이만은 슈베르트(Franz Schubert) 스타일로 피아노 곡을 작곡했다. 이것이 실제로 12손가락이 필요한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나이만은 슈베르트를 매우 잘 채널링한다. 이 장면은 '결함'이 어떻게 '능력'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며, 빈센트의 여정 전체를 음악적으로 알레고리화한다.[23]
레딧 사용자는 나이만의 "The Departure"를 "가장 단순하고 아름다운 사운드트랙 중 하나. 동시에 우울하고..."라고 평가한다. 또 다른 사용자는 말한다: "이 음악은 제롬이 불타기 직전이고 빈센트가 우주를 응시하며 깨어나는 순간을 환기한다. 말했듯이, 나는 슬픔과 행복의 혼합을 경험한다. 결국 이것이 내가 심오한 서사시성으로 묘사할 것이다".[22]
나이만의 음악은 <가타카>를 SF 스릴러에서 비극적 오페라로 승격시킨다.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의 라이트모티프 시스템을 차용하지만, 바그너의 과잉 대신 필립 글래스(Philip Glass)의 미니멀리즘을 도입한다. 결과는 절제된 웅장함 - 거대한 감정이 작은 음향 공간에 압축된다.
니콜과 로엘프스는 20세기 전체의 건물과 제품을 혼합한다. 스튜드베이커 아반티(Studebaker Avanti, 1962년 디자인)부터 바르셀로나 의자(Barcelona Chair, 미스 반 데어 로에 Mies van der Rohe, 1929)까지, 영화는 "절제되면서도 절충주의적인 룩"을 만든다.[2]
이는 레트로-미래주의(retro-futurism)의 한 형태다. 월리엄 깁슨(William Gibson)이 말했듯, "미래는 이미 여기 있다 - 단지 고르게 분포되지 않았을 뿐이다." <가타카>는 미래를 과거의 미래주의 디자인을 재활용하여 구축한다. 이는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의 '시뮬라크르' 개념을 연상시킨다 - 원본 없는 복사, 혹은 더 정확히는 과거의 미래 상상을 원본으로 삼는 현재의 미래.
<가타카>는 1997년 개봉 당시, 돌리(Dolly) 양 복제(1996)와 인간 게놈 프로젝트(Human Genome Project, 1990-2003 진행 중) 같은 실제 과학 발전의 맥락에서 예언적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영화가 참조하는 것은 20세기 초 우생학 운동이다.[24]
J.B.S. 홀데인(J.B.S. Haldane)의 『다이달로스, 혹은 과학과 미래』(Daedalus, or Science and the Future, 1924)는 '새로운 우생학'의 비전을 제시했다 - 선택적 번식을 피하고 기술적 돌파구에 의존하는. 홀데인은 '외배엽 생성(ectogenesis)' - 자궁 밖 임신 - 을 구상했다. <가타카>는 이를 한 걸음 더 나아가 유전자 선택 임신으로 만든다.[24]
중요한 구별은 목표 지향적 진화와 인간 지향적 진화(즉 우생학) 사이다. 올라프 스테이플던(Olaf Stapledon)의 『스타 메이커』(Star Maker, 1937)나 아서 C. 클라크(Arthur C. Clarke)의 『유년기의 끝』(Childhood's End, 1953) 같은 SF 소설에서 진화는 인류 전체의 변형을 목표로 한다.[24]
하지만 우생학은 누가 '개선'되어야 하고 누가 배제되어야 하는지를 결정한다. <가타카>의 천재성은 우생학이 유전적 결정론(genetic determinism)을 전제로만 작동함을 폭로한 것이다. 만약 유전자가 운명을 결정하지 않는다면, 유전자로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근거 없다.[24]
영화의 오프닝 자막은 경고한다: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not-too-distant future)". 2025년 현재, CRISPR 유전자 편집 기술은 실제로 인간 배아에 적용되고 있다. 중국 과학자 허젠쿠이(He Jiankui)는 2018년 유전자 편집된 쌍둥이를 탄생시켜 국제적 비난을 받았다. <가타카>의 '미래'는 더 이상 미래가 아니다 - 그것은 윤리적 논쟁의 현재다.[9]
마침내 <가타카>가 증명하는 것은 인간의 가치는 코드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이다. 빈센트는 99% 심장병 위험을 갖고 태어났지만 우주에 도달한다. 유진/제롬은 100% 완벽한 유전자를 갖고도 은메달에 만족할 수 없어 자살한다. 니콜의 카메라는 이 역설을 금빛과 녹색 빛으로 포착하며, 나이만의 현악은 그 비극을 애도한다. 나선 계단은 계속 올라가고, DNA는 계속 복제되지만, 인간은 염기서열의 합 이상이다. 빈센트가 우주선에서 지구를 내려다볼 때, 그가 보는 것은 자신의 결함 있는 심장이 만든 기적이다. 그리고 유진이 화장로에서 은메달을 움켜쥘 때, 우리는 깨닫는다 - 완벽함의 저주는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것이며, 그것이야말로 가장 치명적 결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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