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아직 《유전》와 《미드소마》로 공포영화계의 새로운 예언자가 되기 전, 아리 애스터(Ari Aster)는 AFI 영화학교의 졸업작품으로 하나의 '도시락 폭탄'을 던진다. 《존슨 가족의 이상한 일(The Strange Thing About the Johnsons)》—제목부터가 일종의 문학적 기만이다.
'이상한 일'이라는 완곡어법으로 포장된 이 29분짜리 단편은, 사실 근친상간과 성폭력,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정상'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가족제도의 썩은 내부를 적나라하게 해부한다. 애스터의 이 초기작은 단순히 충격요법을 노린 도발이 아니라, 우리의 도덕적 상상력의 한계를 시험하는 정교한 사회학적 실험이다.
1995년, 시인 시드니 존슨(Sidney Johnson, 빌리 메이요/Billy Mayo)이 12세 아들 아이자야(Isaiah)의 방에 우연히 들어선다. 아들이 자위를 하고 있었고, 당황한 아버지는 사과하며 이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안심시킨다. 하지만 카메라가 포착하는 것은 아버지가 나간 뒤 아이자야가 손에 쥐고 있던 사진—바로 젊은 시절 아버지의 모습이다. 이 첫 장면에서 아스터는 이미 모든 카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다. 관객은 앞으로 펼쳐질 지옥을 예감하지만, 동시에 그 지옥이 어떤 형태를 취할지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14년 후인 2009년, 성인이 된 아이자야(브랜든 그린하우스/Brandon Greenhouse)의 결혼식 날. 어머니 조안(Joan, 안젤라 불록/Angela Bullock)은 우연히 아들이 아버지에게 구강성교를 강요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이날 밤, 시드니는 자신의 경험을 기록한 회고록 《코쿤 맨: 시드니 존슨의 고백(Cocoon Man: Confessions by Sidney Johnson)》을 아내의 베개 밑에 남긴다. 하지만 아이자야는 이를 발견하고 아버지에게 더 이상 복사본을 만들지 말라고 경고한다.
2010년 새해 파티 이후 저녁시간, 아이자야는 목욕 중인 아버지를 강간한다. 시드니의 비명이 집안에 울려 퍼지지만, 어머니인 조안은 TV 볼륨을 높여 소리를 차단한다. 다음 날, 시드니는 《코쿤 맨》의 비밀 복사본을 들고 집을 떠나려 하지만 아이자야와 다시 대면하게 되고, 결국 도로에서 밴에 치여 죽는다.
시드니의 장례식 후, 조안은 마침내 아들과 대면한다. 아이자야는 어머니를 가스라이팅하며 자신이 아버지를 누구보다 사랑했다고 주장한다. 격투 끝에 조안은 아들을 찔러 죽이고, 《코쿤 맨》을 벽난로에 던져 태워버린다.
아리 애스터가 아들의 이름을 아이자야/이사야(Isaiah)로 명명한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구약성경의 이사야는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는 의미를 지니며, 메시아의 도래를 예언한 선지자로 추앙받는다. 특히 이사야서 53장의 "고난받는 종"에 대한 예언은 기독교 전통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로 해석되어 왔다. 하지만 영화 속 이사야는 구원자가 아니라 파괴자다. 예언자가 아니라 침묵을 강요하는 자다. 아스터는 이 이름을 통해 종교적 권위와 도덕적 순수성에 대한 신성모독적인 도전을 감행한다.
더욱 섬뜩한 것은 아이자야라는 이름이 갖는 "부름받은 자"라는 함의다. 구약의 이사야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백성들에게 회개와 심판을 선포했지만, 영화의 아이자야는 스스로를 아버지의 "선택받은 자"로 여긴다. 그는 자신의 욕망을 일종의 종교적 사명으로 포장하며, 아버지와의 관계를 신성한 것으로 신화화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아빠를 누구보다 사랑했다"는 그의 마지막 고백은, 사랑이라는 숭고한 감정을 가장 추악한 형태의 소유욕으로 전락시킨다.
한편 아버지의 시드니(Sidney)라는 이름은 '넓은 섬(wide island)'을 의미한다. 하지만 영화 속 시드니는 점점 더 좁은 공간으로 몰리고, 결국 완전히 고립된다. 이름과 현실 사이의 이 괴리는 아리 애스터가 즐겨 사용하는 언어유희의 한 예다.
존슨(Johnson)이라는 성씨 역시 치밀하게 계산된 선택이다. "존의 아들(Son of John)"을 의미하는 이 성씨는 미국에서 가장 흔한 성 중 하나로, 평범함과 익명성을 상징한다. 아리 애스터는 의도적으로 가장 "정상적"으로 보이는 가족명을 선택함으로써, 일상의 가면 아래 숨겨진 공포를 극대화한다. 존슨 가족은 어떤 면에서도 특별하지 않다. 바로 그래서 더욱 끔찍하다. 악은 괴물의 얼굴이 아니라 이웃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
또한 존(John)이라는 이름 자체가 기독교적 맥락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세례 요한, 사도 요한, 요한복음의 요한—모두 구원과 사랑, 진리의 메신저들이다. 하지만 "존의 후손들(Johnsons)"인 이들은 오히려 그 모든 가치를 전복시킨다. 이는 미국적 기독교 문화와 정상가족 신화에 대한 아리 애스터의 날카로운 냉소로 읽힌다.
아리 애스터는 존슨 가족의 집을 아메리칸 드림의 표본으로 설계한다. 잘 정돈된 잔디, 깔끔한 인테리어, 따뜻한 조명—모든 것이 1950년대 할리우드 멜로드라마의 그것과 흡사하다. 이는 더글러스 서크(Douglas Sirk) 감독의 작품들에 대한 직접적인 오마주처럼 보인다. 서크가 테크니컬러로 칠한 교외의 표면 아래 숨겨진 욕망과 억압을 폭로했듯이, 아리 애스터는 이 완벽한 집을 지옥의 무대로 전환시킨다.
주목할 것은 문과 벽의 상징성이다. 영화 전반에 걸쳐 등장하는 닫힌 문들, 복도를 가로지르는 벽들은 가족 구성원들 간의 소통 불가능성을 시각적으로 구현한다. 시드니가 욕실에서 강간당하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의도적으로 조안이 있는 거실과 욕실 사이의 벽을 보여준다. 물리적 거리는 불과 몇 미터지만, 그 벽은 진실과 침묵, 행동과 무기력 사이의 절대적 경계선이 된다.
아스터의 조명은 전형적인 가정 드라마의 그것을 따라간다. 따뜻한 황금빛이 집안을 가득 채우고, 특히 가족이 함께하는 순간들—결혼식, 새해 파티—은 거의 성화처럼 빛난다. 하지만 이 인위적으로 밝은 조명은 오히려 상황의 끔찍함을 부각시키는 역설적 효과를 낳는다. 가장 밝은 순간에 가장 어두운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빛의 패러독스는 《미드소마》에서도 구현된다.
특히 시드니의 서재 장면에서 조명의 활용은 압권이다. 그가 《코쿤 맨》을 쓰는 장면에서, 책상 위의 램프는 그의 얼굴 절반만을 비춘다. 빛과 그림자로 분할된 그의 표정은 피해자와 증언자, 침묵과 폭로 사이에서 갈등하는 내면을 철저히 시각화한다.
아리 애스터의 카메라는 철저히 계산된 거리를 유지한다.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은 이 거리는 관객을 불편한 관찰자의 위치에 놓는다. 열쇳구멍으로 펼쳐지는 간음의 장면을 보면서 관객인 우리는 마치 이웃집을 훔쳐보는 관음증 환자처럼 이 가족의 비극을 지켜본다. 이는 실제로 성폭력 사건에서 방관자들이 취하는 태도와 일치할 것이다.
특히 욕실의 강간 장면에서의 카메라 포지션이 의미심장하다. 카메라는 조안의 위치에서 시작해, 점차 욕실 문 쪽으로 이동한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문을 보여줄 뿐, 그 너머로는 들어가지 않는다. 이는 관객의 불편함을 극대화하는 동시에, 우리 모두가 어떤 면에서는 조안과 같은 위치에 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사진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모티프다. 아이자야가 첫 장면에서 쥐고 있던 아버지의 사진은, 기억이 어떻게 욕망으로 변질되고, 사랑이 어떻게 소유욕으로 전락하는지를 보여주는 완벽한 소품이다. 사진은 정지된 시간, 통제된 이미지다. 아이자야는 살아 숨 쉬는 아버지가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대로 조작할 수 있는 이미지로서의 아버지를 욕망한다.
《코쿤 맨》이라는 책 제목 역시 다층적 의미를 담고 있다. 코쿤(cocoon), 즉 번데기는 변화와 변태의 상징이지만, 동시에 갇힘과 보호의 의미도 갖는다. 시드니는 자신의 트라우마를 글로 써서 외부로 보내려 하지만, 동시에 그 과정에서 스스로를 더욱 깊은 고립 속으로 몰아넣는다. 책이 마지막에 불타는 장면은 진실의 소멸이자, 동시에 또 다른 형태의 해방일 수도 있다는 양가적 의미를 담는다. 하지만 시드니의 경우, 이 변태는 완료되지 않는다. 그는 코쿤 안에 갇힌 채로 죽는다.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의 글쓰기 이론에 따르면, 글쓰기는 부재하는 것을 현전시키려는 시도다. 시드니는 자신의 트라우마를 글로 써서 외부화하려 하지만, 그 글은 결국 불타 사라진다. 이는 트라우마의 비재현성, 즉 언어의 한계를 보여준다
영화는 "자연스럽다(It's natural)"는 말로 시작해, 결국 가장 부자연스러운 상황으로 귀결된다. 이 아이러니는 아스터의 언어적 전략의 핵심이다. '자연'이라는 말이 반복될 때마다, 우리는 무엇이 진정 자연스러운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된다. 아버지의 사랑인가, 아들의 욕망인가, 아니면 어머니의 침묵인가?
시드니가 시인이라는 설정은 우연이 아니다. 시는 언어의 가장 순수하고 진실한 형태로 여겨지지만, 동시에 은유와 상징으로 진실을 감추기도 한다. 시드니는 자신의 경험을 시가 아닌 산문(《코쿤 맨》)으로 기록한다. 이는 은유적 언어로는 더 이상 자신의 고통을 담을 수 없다는, 극한 상황에 내몰린 인간의 절망을 보여준다.
아스터 본인이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영화는 '서크적(Sirkian)'이다. 서크의 《천국이 허락한 모든 것(All That Heaven Allows)》이나 《바람에 쓴 글자(Written on the Wind)》처럼, 《존슨 가족의 이상한 일》 역시 완벽해 보이는 중산층 가정의 이면을 파헤친다. 하지만 서크가 사회적 억압과 계급 갈등에 초점을 맞췄다면, 아스터는 더 근본적인 인간성의 어둠으로 들어간다.
영화의 구조는 고전 그리스 비극의 그것을 따른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전도된 버전으로 읽힐 수도 있지만, 더 정확히는 일렉트라 콤플렉스의 남성적 변주로 해석된다. 아이자야의 아버지에 대한 집착은 단순한 성적 욕망을 넘어, 아버지를 완전히 소유하고 통제하려는 권력 의지의 발현이다.
전통적인 엘렉트라 콤플렉스는 딸이 아버지를 향한 리비도를 발전시키고 어머니를 경쟁자로 인식하는 구조다. 하지만 《존슨 가족의 이상한 일》에서는 이 구조가 성별과 세대를 가로질러 뒤틀린다.
칼 융(Carl Jung)은 엘렉트라 콤플렉스를 단순한 성적 욕망이 아니라, 개성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대극의 통합으로 해석했다. 하지만 아이자야의 경우, 통합이 아닌 흡수를 시도한다. 그는 아버지를 자신 안으로 완전히 끌어들여, 둘 사이의 경계를 지우려 한다.
영화는 홈 인베이전(Home Invasion) 장르의 전통을 따르면서도 뒤튼다. 전형적인 홈 인베이전 영화에서 위협은 외부에서 오지만, 여기서 위협은 가족 내부에서 발생한다. 이는 후에 《유전》에서 더욱 정교하게 발전될 아리 애스터만의 호러 문법의 원형이다.
아리 애스터는 인터뷰에서 AFI가 '할리우드 방식'으로 학생들을 훈련시키고, 오스카에서 인정받을 만한 영화를 만들도록 유도한다고 비판했다. 《존슨 가족의 이상한 일》은 바로 그런 기대에 대한 정면 도전이다. 아카데미가 선호하는 '경건하고 모범적인 흑인 가족'의 정반대를 보여줌으로써, 아스터는 영화 교육 기관의 보수성을 조롱한다. 다시 언급하자면, 이 작품은 아리 애스터의 AFI 영화학교의 졸업작품이었다.
영화는 관객을 불편한 공모자의 위치에 놓는다. 우리는 이 끔찍한 상황을 30분 동안 지켜본 후, 안전하게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 하지만 실제 피해자들은 평생 그 트라우마와 함께 살아가야 한다. 이런 비대칭성을 의식적으로 노출함으로써, 아스터는 영화 관람이라는 행위 자체의 윤리를 문제 삼는다.
2011년 미국은 포스트-페미니즘 시대를 맞고 있었다. 전통적인 남성성이 도전받고, 아버지의 권위가 약화되는 시기였다. 아이자야는 이런 위기에 대한 극단적 반응으로 볼 수 있다. 그는 약해진 아버지의 권위를 완전히 전복시켜, 자신이 가부장이 되려 한다.
코넬(R.W. Connell)의 헤게모니적 남성성 이론에 따르면, 남성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구성되고 재구성되는 것이다. 아이자야의 행위는 전통적 남성성(아버지)을 파괴하고 새로운 형태의 헤게모니적 남성성을 구축하려는 시도로 읽힌다.
이런 맥락에서 《존슨 가족의 이상한 일》은 단순한 작품이 아니라, 21세기 미국 사회의 젠더 불안을 정교하게 진단한 사회학적 텍스트로 재평가된다. 아스터는 30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정신분석학과 사회학, 젠더 이론을 가로지르는 복합적 서사를 구축했다. Isaiah Johnson이라는 이름 하나만으로도, 그는 미국 사회의 무의식적 불안을 철저히 기표화한 것이다.
물론 아리 애스터의 의도는 단순한 자극이 아니라 사회적 금기에 대한 체계적 탐구다. 영화의 모든 요소—연출, 연기, 사운드—가 일관된 메시지를 전달한다. 만약 이것이 단순한 도발이었다면, 지금까지 논의의 대상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리 애스터는 인터뷰에서 캐스팅이 우연적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흑인 가족을 주인공으로 한 것은 더 큰 의미를 갖는다. 미국 사회에서 흑인 가족은 종종 '문제적 가족'으로 스테레오타입화되는데, 아스터는 오히려 중산층 백인 가족의 전형적 이미지를 흑인 배우들로 연기하게 함으로써 인종적 편견을 교란시킨다고 볼 수 있다.
사실 논란 자체가 이 영화의 예술적 성취다. 진정한 예술은 안전한 곳에서 나오지 않는다. 아리 애스터는 관객의 도덕적 상상력을 확장하고, 불편한 질문들을 던지며, 무엇보다 침묵으로 공모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직시하게 만든다.
《존슨 가족의 이상한 일》은 불편하다. 역겹다. 충격적이다. 하지만 바로 그래서 필요하다. 아리 아스터는 29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 안에, 우리가 외면하고 싶은 현실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이 영화는 성폭력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 침묵에 대한 영화다. 시드니의 침묵, 조안의 침묵,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사회의 침묵.
영화가 처음 공개된 2011년과 달리, 지금은 모든 것이 실시간으로 공유되는 시대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진정 중요한 문제들—가정폭력, 성폭력, 정신건강—에 대해서는 여전히 침묵이 지배적이다. 조안이 TV 볼륨을 높여 남편의 비명을 차단하는 장면은, 우리가 불편한 진실을 어떻게 '음소거'하는지를 보여주는 은유이기도.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폭력 앞에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소유욕 앞에서, 정상성이라는 이름으로 은폐되는 비극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자주 TV 혹은 이어폰/헤드폰의 볼륨을 높이는가? 우리에게 이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아니, 더욱 절실하다.
아리 애스터는 마지막 장면에서 《코쿤 맨》을 태워버린다. 증거는 사라지고 진실은 재가 된다. 하지만 영화는 남는다. 29분간의 불편함은 관객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재생된다. 그리고 바로 그 불편함이, 변화의 씨앗이다. 침묵을 깨는 첫 번째 균열이다.
결국 아리 애스터가 우리에게 건네는 질문은 이것이다: 당신은 언제까지 볼륨을 높일 것인가? 언제까지 모른 척할 것인가? 언제까지 안전한 거리에서 관찰자로만 남아있을 것인가? 존슨 가족의 이상한 일은 끝났지만, 우리의 '이상한 일'은 이제 시작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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